새빌 로의 테일러가 전하는 영국식, 미국식, 이탈리아식 슈트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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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예술대학 양복과에 입학해서 한 한기를 넘길 무렵, 겨우 완성한 재킷에 단추를 달던 때가 기억난다. 단추는 소매에서 얼마만큼 떨어져야 하고 몇 개를 달아야 하며 그 간격은 몇인지 아무런 개념이 없던 학생 시절이었다. 단추를 힘겹게 달고 있는 나를 자세히 보며 교수는 “이렇게 단추를 겹쳐서 다는 것은 영국 양복에서는 안 되네. 단추는 항상 그 끝이 키스하듯이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거야”라는 짧은 한마디를 던지고는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 시절의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나는 새빌 로 마스터 테일러 출신인 교수의 간결하고 단호한 가르침을 생생히 기억한다. 단지 단추를 다는 방법에도 영국적인 것과 아닌 것이 존재한다면 얼마나 더 많은 부분이 각 지역의 스타일을 대변할까. 우리는 보통 양복 스타일을 정의할 때 그 본가인 영국의 브리티시 스타일, 이탈리아인이 독자적인 심미안으로 발전시켜온 이탤리언 스타일, 미국의 자유분방하고 실용적인 감성이 내포된 아메리칸 스타일로 구분 짓는다.

대중적으로 쉽게 접하는, 편안하고 넉넉한 착용감과 실루엣으로 대표되는 아메리칸 스타일은 그들의 실용주의에서 기인한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로 이루어진 기회의 땅 미국에서는 옷으로 계급이나 개인의 개성을 뚜렷이 나타내는 일은 소수의 상류층을 제외하고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미국의 슈트 실루엣은 인체를 옥죄지 않는 선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색 슈트(sack suit, 주로 미국에서 신사복을 일컬을 때 쓰는 표현)라는 이름으로, 그 특징은 가슴의 볼륨을 강조하기 위해 넣는 앞판 다트가 생략되어 있고 겨드랑이 밑부분이 넉넉한 낮은 암홀, 강조되지 않은 허리선으로 표현된다. 센터 벤트(center vent, 재킷 뒤의 가운데 트임)가 일반적이며 스리버튼 재킷이 주류를 이룬다(영국의 승마용 재킷은 말을 타기 위해 가운데 트임을 길게 만든 반면, 미국의 슈트는 단지 간편하다는 이유로 가운데 트임을 준다. 영국은 비즈니스 슈트에 센터 벤트를 하지 않는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양복은 귀족과 상류층이 유행을 이끌어간 것에 비해 미국은 1950~1960년대의 중산층이 캐릭터를 형성했으며, 브룩스 브라더스라는 남성복 브랜드가 그 정체성을 확고히 자리 잡게 했다.


영국 찰스 왕세자의 옷을 만드는 앤더슨 앤 셰퍼드 숍 풍경. 정통 브리티시 슈트 스타일을 보여준다.

영국 찰스 왕세자의 옷을 만드는 앤더슨 앤 셰퍼드 숍 풍경. 정통 브리티시 슈트 스타일을 보여준다.

브리티시 슈트를 이루는 특징, 도톰하게 솟은 로프트 숄더와 날렵한 허리선, 탄탄한 가슴판이 돋보인다.

브리티시 슈트를 이루는 특징, 도톰하게 솟은 로프트 숄더와 날렵한 허리선, 탄탄한 가슴판이 돋보인다.


반면 이탈리아는 각기 다른 아이덴티티를 표방하는 도시국가의 이합집산이 역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듯이, 이들의 슈트도 밀라노와 로마로 대표되는 북부 지방의 슈트와 나폴리로 대표되는 남부 지방의 슈트로 나뉜다. 이탤리언 스타일의 슈트는 전반적으로 앞주머니 덮개가 생략되어 있고 뒤트임이 없다. 고지(gorge, 라펠과 칼라가 만나는 선)가 높고, 허리선보다 첫 번째 단추의 위치 역시 높으며(이것은 재킷의 분위기를 근엄하기보다는 경쾌하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슬림하고 극단적으로 몸에 잘 밀착되는 깔끔한 라인을 추구한다. 그레고리 팩이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입은 슈트가 북부 지방이 추구하는 간결한 선과 우아한 실루엣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와는 미묘하게 다른 남부 지방의 나폴리 슈트는 그들만의 독특한 재봉 방식이 있다. 스팔라 카미치아(spalla camicia)라는, 소매 솔기를 안쪽으로 몰아 셔츠처럼 꿰매는 방식이다. 그리하면 소매가 물결 흐르듯 주름 잡히며 아래로 떨어지는데 이것은 남부 이탈리아인의 장인 정신과 나폴리 특유의 여유를 옷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소매의 단추는 포개어 단다. 학생 시절에 내가 단추를 달았던 방식이 이탈리아 스타일이었다.

새빌 로 스타일로 대표되는 영국식 양복은 탄탄하고 근엄한 이미지로 대두된다. 투버튼, 겨드랑이에 밀착되는 높은 암홀, 잘록한 허리선, 양 옆트임. 여기에 오른쪽 앞주머니 위 ‘티켓 포켓’이라 불리는 작은 주머니를 추가한다면 영국적 분위기가 배가된다. 영국 양복의 모든 디테일과 실루엣에는 군복의 이미지가 포함된다. 실제로 영국 양복은 영국의 군복, 그리고 말을 타는 습관에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적에게는 두려움과 공포, 아군에게는 든든한 신뢰와 위엄을 주는 옷. 영국의 양복은 그러한 필요를 바탕으로 설계되었다. 밧줄을 잡아맨 듯 도톰하게 솟은 소매선 로프트 숄더(roped shoulder). 날렵한 허리선과 더불어 어떤 상황에서도 몸의 앞부분에 주름이 가지 않게 탄탄하게 만든 볼륨감 있는 가슴. 이탈리아는 각 지방마다 지역색이 뚜렷한 양복을 만든다면 영국은 전국 어디에서 양복을 맞춰도 봉제 방식이나 실루엣에 큰 변함이 없다. 다양한 형태의 옷에서 공통된 영국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다.


브리티시 슈트의 많은 부분은 군복에서 기인했다.

브리티시 슈트의 많은 부분은 군복에서 기인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드레스메이커였던 하디 에이미스가 쓴 〈영국인의 슈트〉를 읽어보면 슈트의 디테일보다는 영국인의 습관, 행동 양식, 취향에 대해 저자 나름대로 해석한 내용이 책의 절반을 차지한다. 정원, 집, 가구, 스포츠 같은 언뜻 보기에 크게 옷과 관련 없어 보이는 영국 문화에 대해 말이다. 결국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영국 슈트라는 것은 영국인과 그것을 둘러싼 모든 양식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말 아닐까. 비단 옷을 짓는 사람뿐 아니라 옷을 입는 이의 취향을 모두 반영해 옷에 담아내는 것이 진정한 ‘브리티시 스타일’인 것이다.


인물은 브리티시 슈트 스타일의 기본을 보여주는 앤더슨 앤 셰퍼드의 테일러.

인물은 브리티시 슈트 스타일의 기본을 보여주는 앤더슨 앤 셰퍼드의 테일러.

군복에서 기인한 브리티시 슈트의 요소들은 다양한 형태의 옷에서 공통된 영국적인 가치를 지킨다.

군복에서 기인한 브리티시 슈트의 요소들은 다양한 형태의 옷에서 공통된 영국적인 가치를 지킨다.


남성복 시장의 큰 지분을 차지하며 발전해온 세 국가의 스타일을 정리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스타일이란 단지 몇 가지 수식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적어두고 싶다. 앞서 언급한 각 나라의 슈트 스타일의 특징을 그대로 살려 옷을 입는다면 우리는 런던의 젠틀맨이나 월 스트리트의 아이비리거나 아말피 해변에 휴가를 즐기러 온 시뇨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을 안개처럼 둘러싸고 있는 문화 역시 이해해보려는 자세다. 각 나라의 문화와 성격은 각기 다른 양복 디자인과, 그만큼 또 다르게 옷을 즐기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어떤 스타일이든 전적으로 소화하고 향유하려면 그 저변에 깔린 문화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참고로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가 세 국가의 스타일에 대해 평한 단순 명료한 표현은 이렇다. ‘세련된 남자의 멋이란 첫째, 조금은 왕년의 영국적인 것. 둘째, 미국의 색채. 마지막은 이 두 가지를 이탈리아식 감각으로 걸러낸 것’. 전통적인 영감은 영국에서 빌려오고 미국인이 좋아하는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하되 이탈리아식 미적 감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각국의 스타일을 알고 좋은 점을 발견하여 개성이란 필터로 정제하는 일, 그것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방법 아닐까.

TIP 새빌 로의 테일러가 전하는 브리티시 스타일 소화하는 법
1 짙고 어두운 색 슈트 사이로 얼핏 보이는 아이템들에 원색을 사용해볼 것. 네이비 재킷 안의 핑크색 안감, 바짓단 아래 알록달록한 색 양말은 영국식 반전 매력이다.
2 스포츠는 영국의 옷을 다양하게 발전시킨 요소다. 스포츠에서 유래된 클래식 아이템을 사용해볼 것. 로잉 블레이저, 크리켓 니트, 폴로 코트, 럭비 셔츠 등.
3 영국 북부의 험준한 산지는 다양한 종류의 트위드를 탄생시켰다. 트위드와 청키한 니트류를 매치하는 시도는 올바른 브리티시 캐주얼을 구현하는 방법이다.
4 브리티시 스타일은 단지 외관으로 표현되는 게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선뜻 전할 행커치프, 타인의 말을 받아 적을 만년필, 비를 맞는 이에게 건네는 우산. 영국식 액세서리에 신사적인 매너를 지킨다면 더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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