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오리건 피노 누아에 와인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이유

지금 당신이 털어야 할 면세점은 미국 북서부에 있다.

BYESQUIRE2021.06.27
 
 

Noir from Usa 

 
파트리시아 그린 셀러스, 프리덤 힐 빈야드 2018 20만원.

파트리시아 그린 셀러스, 프리덤 힐 빈야드 2018 20만원.

피노 누아는 보통의 월급쟁이가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시라에 흡족해하며 분수에 맞는 행복을 누릴 때, 도적처럼 나타나 통장을 탈탈 털어간다. 왜 한 번 마신 최상급 피노 누아의 날카로운 기억은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걸까? 어쩌다 한 번 돈 많은 동네 형이 사준 그 부르고뉴 피노 누아는 아름다운 루비의 빛깔을 흩뿌리다 내 입안으로 사라져 이름도 알 수 없는 부케로 왕궁의 정원을 수놓았다. 문예창작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팩트다. 그러나 이미 제대로 된 부르고뉴 피노 누아의 가격은 월급 깡패나 수준. 이유가 다 있다. 피노 누아는 일단 모든 포도 품종 중에 기르기 가장 힘든 품종이다.
 
피노 누아야말로 세상의 모든 포도 중 가장 까다로운 애증의 포도라니까요.


국내에서 가장 방대한 와인 관련 텍스트 아카이브를 가진 전문지 〈와인21〉의 정수지 기자가 살짝 감정을 섞어 말했다. “피노 누아는 송이도 포도알도 작은 데다 촘촘해서 바람이 잘 안 통하고, 무엇보다 껍질이 얇아 매우 기르기 힘들어요. 알이 촘촘하니 공기가 조금이라도 습해지면 포도알에 곰팡이가 피고, 껍질이 얇으니 너무 건조하거나 강한 햇빛을 쪼이면 포도알이 건포도처럼 쪼그라들죠. 풍미는 잼같이 변하고요.” 게다가 부르고뉴 피노 누아는 상대적으로 점점 더 희소해지고 있다. 피노 누아에 빠진 인간들은 점점 늘어가는데, 재배가 가능한 부르고뉴의 땅덩이는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피노 누아가 무리 없이 자랄 수 있는 거대한 지역이 신대륙에 있었으니, 미국의 북서부 오리건주 윌라메트 밸리다. “부르고뉴가 아니면 피노 누아를 기를 수가 없다”는 편견을 깨뜨리며 1966년 미국 땅에 피노 누아 재배를 시작한 ‘파파 피노’, 데이비드 렌트 씨에게 우리 모두 경배를.
 
워낙 좋은 피노 누아인데, 한국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어요. 오리건 및 워싱턴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98%가 미국 내에서 소비되거든요.
 
정 기자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오리건의 피노 누아를 접하고 쇼크를 받은 건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에 찾은 포틀랜드의 리커스토어에서였다. 별생각 없이 집어 든 피노 누아에서 레스토랑 상급 보틀의 기운을 느꼈다. 미국 놈들이 자기들만 맛있는 걸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얘기다. 그리움을 잊기 위해 오리건에서 운 좋게 수입된 파트리시아 그린 셀러스의 싱글 빈야드(한정된 밭의 포도로만 만든 것을 더 상급으로 친다) 보틀인 프리덤 힐 빈야드를 구했다. 잔을 기울이자 버건디 빛 액체 위를 살짝 덮은 루비 빛깔이 영롱하게 빛난다. 영락없는 피노 누아의 실루엣이다. 말린 자두, 블랙 베리, 체리 등의 과실 향 사이로 우아한, 그러나 꾸밈없는 산미가 올라온다. 부르고뉴 출신의 사촌보다 섬세한 부드러움은 덜하지만, 피노 누아의 장점으로 꼽는 각각의 개성이 오히려 선명하게 살아 있다. 한국의 와인 수입업자들이여, 어서 술바구니를 들고 윌라메트 밸리의 피노 누아를 사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