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 향료와 인공 향료, 그 지루한 다툼

프로필 by 김현유 2023.01.04
 
우연이었다. 거리를 걷던 중, 누군가 흘린 향에서 20대 초반에 자주 가던 카페를 떠올린 건. 오래된 나무 바닥과 드라이플라워가 꽂힌 디퓨저, 쌉쌀한 커피와 약간의 담배 연기가 어우러진 그 장소의 향을 접한 순간, 당시의 기억이 당혹스러울 만큼 생생하게 펼쳐졌다. 늘 함께하던 친구들과 그 시절 소개팅 이야기, 턴테이블에 흐르던 보사노바와 벽에 걸린 영화 포스터까지… 완전히 잊었다 생각했던 과거의 찰나마저 돌이켜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게 향인 것이다.
한 차례의 추억 여행 후, 오래전 즐겨 썼던 향수들을 다시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향수는 그때 그 향과 느낌이 아니었다. 향수업체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물으니 “같은 향수라도 향료는 계속 바뀔 수 있다”고 답했다. 원료 수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새롭게 출시된 향료로 대체되는 등 리뉴얼이 약간씩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쩐지 향수 브랜드 홈페이지 하단에 깨알같이 ‘더 나은 품질과 안전을 위해 성분은 예고 없이 바뀔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더라니!
원료 수급 문제가 생기는 건 주로 천연 향료다. 천연 향료는 증류, 압착, 추출 등의 방식으로 향 성분의 화학 구조를 건드리지 않은 채 분리해낸 것이고, 인공 향료는 그 반대다. 천연 향료와 인공 향료에 대해서는, 마트 아이스크림 맛으로 잘 알려진 향료 ‘바닐라’의 역사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멕시코 원주민 톤토낙(tontonac)인이 야생 바닐라를 밭에 옮겨 심은 것을 시작으로, 16세기에 들이닥친 유럽의 침략자들을 통해 세상에 퍼졌다. 스페인의 펠리페 3세, 영국 엘리자베스 1세, 프랑스 앙리 4세 등 각국의 왕들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에 매료돼 바닐라 원두를 같은 무게의 금과 바꾸기도 했다. 이후 마다가스카르에서 대규모 노예 경작에 성공했지만, 늘 수요가 공급보다 폭발적이어서 오래도록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9세기 후반 들어 핵심 성분인 ‘바닐린’을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데 성공하면서 바닐라 향의 대중화가 시작됐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바닐라 맛’ 시판 제품은 다 합성 향료 바닐린이 든 것이다. 하지만 그 영혼까지 천연 바닐라와 같을 순 없었다. 제과 제빵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더 잘 알겠지만, 천연 바닐라 추출물은 풍부하면서도 복잡한 향을 내지만 합성 향료 바닐린은 다들 아는 그 향을 낸다. 동식물의 에센셜 오일, 수지, 즙, 페로몬 등의 오케스트라가 천연 향료라면, 인공 향료는 그 핵심 성분들을 모방해 만드는 것이라 향이 더 단조롭고 강하다. 극단적 예를 들자면 딸기 대 딸기맛 풍선껌, 바나나 대 바나나맛 우유의 차이와 비슷하다.
그럼 무조건 천연 향료가 좋은 게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역으로 인공 향료는 원료의 이취를 없앨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천연물은 쉽게 변질되며 품질이 들쭉날쭉하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내추럴 와인은 작황과 보관 방법에 따라 수시로 맛이 변해 잘 골라야 하지만 알코올을 합성한 후 물을 타는 희석식 소주는 같은 브랜드면 언제, 어디서 사든 같은 맛을 보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공 향료는 자연에 없는 무한한 향의 세계를 열기도 했다. 대표적 예가 그 유명한 샤넬 No.5다. 1921년,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리던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은 향수업계에 발을 들이며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에게 값비싼 향료도 아낌없이 쓰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보는 귀한 향료들을 마음껏 썼지만, 샤넬이 최종 선택한 건 인공 향료 알데하이드를 톱 노트로 쓴 다섯 번째 샘플이었다. 어디에서도 맡은 적 없던, 도도하지만 세련되게 인조 진주를 두른 현대 여성이 떠오르는 향을 샤넬은 부지불식간에 구별한 것이다.
천연 향료와 인공 향료의 장점만을 따서, 또는 인공 향료들을 섞어 만든 조합 향료도 있다. 순진했던 신입 에디터 시절, 전설 속 신비롭고 고결한 꽃 향을 담았다는 신상 향수를 접하고 감탄하며 그 꽃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냈냐고 홍보 담당자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 자사 조향사들이 발견했다고 얼버무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러 향료를 조합해 이미지화한 가상의 꽃이었다. 현재는 사실상 거의 모든 향기 제품이 조합 향료를 어느 정도 쓴다. 음악에서 화음이란 뜻인 어코드(accord)는 향장업에선 여러 향료가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말하는데, 캐시미어의 포근하고 매끄러운 느낌을 표현한 캐시머란(cashmeran)과 남국 햇살처럼 따뜻하고 에너지 넘치는 솔라(solar) 등이 바로 어코드의 좋은 예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지만, 세계적 화두인 ‘지속가능성’에 대해선 상반된 의견이 공존한다. 자동차 회사 테슬라에서 일했던 디자이너 엔리코 피에트라(Enrico Pietra)와 로드리고 카울라(Rodrigo Caula)는 천연 향료를 일절 쓰지 않고 인공 향료로만 향수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며 올해 브랜드 ‘에어(Aeir)’를 론칭했다. 천연 향료는 향료를 추출하기 위해 오래된 나무를 베거나 동물을 학대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겔랑, 디올 같은 전통적 퍼퓨머리와 유기농 화장품 브랜드들은 천연 및 유기농 국제 인증 ISO 16128을 강조하며 친환경적으로 천연 원료를 재배해 멸종 위기에도 맞서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고전 장미(Old Rose, 18세기 이전 장미)의 일종인 센티폴리아(Rosa Centifolia) 향을 얻으려고 프랑스 남부 그라스에선 늦봄부터 초여름까지 새벽마다 꽃송이를 수확한다. 각 퍼퓨머리가 관리하는 특별한 농장이 아니었다면 꽃잎 백 장이 모여 한 송이를 이루는 그 아름다운 자태와 향은 기후변화와 병충해에 스러졌을지도 모른다. 또 감귤류 껍질이나 외국에서는 잡초로 여겨지는 민트 잎 등 천연이라도 생산량이 많거나 부산물처럼 여겨지는 원료를 알차게 활용한 경우도 많다. 천연 향료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인공 향료가 탄생할 때마다 동물실험으로 안전성을 검증하는 경우가 많다며 향료업계의 이면을 폭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연’은 무조건 좋고 안전하며, ‘인공’은 그 반대”라 믿는 천연 맹신자를 만나면 “사약도 100% 천연 ”이라고 말하곤 한다. 일각에서는 인공 향료를 석유와 동급으로 여기는 인식도 있지만, 원료가 무엇이든 화학 구조가 완전히 달라지면 새로운 물질이니 안심해도 좋다. 소금으로 만든 락스를 음식에 뿌려 먹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향료 역시 천연, 인공 할 것 없이 공평하게 알레르기, 발암, 생식 독성 가능성이 존재한다.
2009년 유럽연합은 리날룰, 쿠마린, 제라니올 등 알레르기 유발 가능성이 높은 26종 향 물질을 화장품에 ‘향료(fragrance)’ 외에 별도로 표기하게 하고 그 함량도 제한했다. 그중엔 고대부터 쓴 신비로운 숲 향, 이끼 추출물 및 참나무 이끼 추출물(오크 모스) 등이 떡하니 포함돼 있고 나머지 물질들도 천연, 인공 원료 모두에 함유된 게 많다. 2019년엔 유럽이 기존 26가지 주의 성분 중 HICC를 아예 금지해 우리나라는 2020년부터 25종을 전 성분 리스트에 표기 의무화했다. 다시 유럽은 올해 3월 흰 백합, 은방울꽃 등이 연상되는 부틸페닐메틸프로피오날, 일명 릴리알을 생식 독성 우려 물질로 금지했다. 이런 규제가 한 번 내려질 때마다 업계는 비슷한 향을 내는 대체 향료를 찾는 대란을 겪는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인공 향료 개발에 더 박차를 가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나저나 왼쪽 팔목엔 아쿠아틱 플로럴, 오른쪽엔 알데하이드 계열 향수를 뿌리고 이 글을 쓰자니 두 배로 향기롭긴커녕 슬슬 역한 느낌이 올라온다. 역시 조향사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이선배는 패션, 뷰티, 콘텐츠를 만든다. <멋진 사람들의 물건> <맨즈 잇스타일> <잇 코스메틱>을 썼다. 

Credit

  • EDITOR 김현유
  • WRITER 이선배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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