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이 가린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 의식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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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이 가린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 의식

김현유 BY 김현유 2023.06.03
 
4월 초의 일이다. 학생들을 인솔해 경북 북부 지역으로 답사를 다녀왔다. 주제는 ‘유교 문화의 지리학’으로, 코스에는 만휴정(晩休亭)이라는 정자도 포함돼 있었다. 몇 년 전 큰 사랑을 받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배경으로 나오기도 한 이 조그만 정자는 안동에서 청송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외진 지역인 데다가 규모가 크지도 않은 정자를 답사 코스에 포함한 건 〈미스터 션샤인〉 때문은 아니었다. 만휴정은 선조들의 자연관을 잘 보여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인공미를 살려 꾸민 해외의 정원과 달리,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정자다. 높은 지대를 오르는 것은 힘들었지만, 덕분에 이르게 지나가버려 놓칠 뻔한 봄꽃 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산기슭에 위치한 만휴정 인근에 벚꽃, 개나리, 진달래가 만개해 있었던 것이다.
올해는 한반도 전역에서 봄꽃이 때 이르게, 그리고 무질서하게 피었다. 3월 21일에는 대구에서, 같은 달 26일에는 서울에서 벚꽃이 개화했다. 각각 평년보다 8일, 2주일이나 빨랐다. 벚꽃 축제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결국 어떤 지자체는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축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벚꽃 없는 벚꽃 축제’를 진행하기도 했다.
해당 지자체의 해학적 돌파는 유쾌하지만, 상황 자체는 유쾌하지 않다. 이르게 핀 벚꽃만큼 문제가 되는 건 무질서한 개화 시기다. 늦겨울 피어나는 동백으로 시작해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 그리고 철쭉으로 이어지는 개화 순서가 올해는 엉망으로 꼬였다. 또 어떤 꽃은 남부지방이 아닌 중부지방에서 먼저 개화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상 개화의 원인은 너무 높은 봄 기온이다. 실제로 올해 3월의 평균기온은 평년치, 즉 지난 30년 평균치보다 무려 3.3도나 높았다. 기상관측사상 최대치였다. 만휴정 같은 고지대의 경우는 4월 중순께나 되어야 봄꽃이 피지만, 역시 이상 개화의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는 기후변화의 산물이다. 올해 최대치를 기록했다고는 하나, 처음으로 대두된 문제는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벚꽃 개화시기는 이미 1960년대부터 계속해서 앞당겨왔다. 매년 봄마다 ‘벚꽃 개화 시기가 빨라졌다’며 기후 위기의 중요성을 촉구하는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1992년 〈연합뉴스〉는 “이상난동으로 올해 벚꽃의 개화 시기는 평년보다 5~8일가량 빨라질 것”이라는 뉴스를 내놨고, 같은 매체의 2001년 기사는 “초여름 같은 날씨로 서울 지역에서 벚꽃이 예년보다 빨리 꽃망울을 터트렸다”고 했다. 30년, 20년 전에도 반복돼온 일인 것이다.
그러나 올해 이렇게 이상한 개화가 일어나기까지 기후 위기로 인해 한반도에 엄청나게 큰 사건이 발생한 적은 없었다. 실제 기후 위기로 인한 문제는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당장 올해 4월만 보더라도 태국은 기온이 40도, 체감온도 50도를 웃도는 폭염 때문에 외출 자제령을 내렸다. 인도에서는 야외 행사장에서 열 명이 넘는 참석자가 열사병으로 목숨을 잃고, 50여 명이 열사병으로 병원 치료를 받는 참사까지 일어났다. 스페인에서도 평년치를 10℃ 이상 웃도는 40℃에 가까운 폭염으로 농업에 큰 타격을 입는 바람에, 스페인산 채소를 대량으로 수입하는 영국까지 비상이 걸렸다.
한국은 이런 사례에 비하면 기후 ‘위기’라 부를 만큼 심각한 사건은 비교적 덜 회자되는 듯하다. 기후 위기가 정말 심각한 위기라는 이야기는 환경 문제에 특별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는 듣기가 쉽지 않다. 설사 언급된다 한들 “봄꽃이 너무 빨리 피었다”고 언급하는 정도로 그친다. 그다음 행동을 고민할 정도로 큰일은 아닌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극단적인 계절에 지나치게 익숙해지고 너무 철저하게 대비한 나머지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약간의 과장이 섞이기는 했을 테지만,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귀화한 루지 선수 에일린 프뤼세가 한 말은 여타 국가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사계절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내가 한국에 도착한 게 8월인데, 영상 40℃는 되는 줄 알았다. 나는 동계 종목 선수인데 이렇게 더운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니 절망감이 앞섰다. 그런데 날씨가 점점 추워지더니 지금은 너무 춥다. 이런 추위는 독일에서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아프리카보다 더운 대구, 시베리아보다 추운 철원’ 같은 묘사도 나왔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심각하게 하는 사람은 없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서 비롯되는 확연한 연교차는 한국인에게 당연한 일상이니 말이다.
아주 오랜 과거부터도 혹한기와 혹서기가 이어져온 만큼, 가뭄과 홍수에 대비하는 시설물이 잘 마련돼 있던 것도 기후 위기에 대한 착시를 불러오는 원인일지도 모른다. 기후 위기가 문제점으로 대두되기 훨씬 이전 시대, 만휴정을 짓고 자연을 즐기던 시대의 조상들부터도 집중호우가 내리는 장마철의 홍수를 막기 위해 논둑과 제방을 쌓았고, 1년간 내리는 비의 70%에 달하는 장맛비를 모아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곳곳에 저수지를 설치해왔으니 말이다. 이는 오늘날의 다목적댐이나 홍수조절 전용 댐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기술이 발달한 지금은, 여름과 겨울 강수량 차이로 최대 유량과 최소 유량의 격차가 세계 여타 국가에 비해 매우 크다는 단점을 오히려 극복해 기후변화와 관계없이 안정된 용수 공급이 가능해졌다. 2000년대 들어 홍수기 강수량이 증가하자 댐 설계기준으로 사용되는 PMP(가능 최대 강수량)를 대폭 상향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덕분에 계절과 상관없이 하천 유량은 대체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적응하고, 때로는 해학으로 넘기는 동시에 극복하며 살아온 덕분에 조금씩 일어나는 이상 현상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이상기온으로 더운 것인데도 ‘여름은 원래 덥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말이다. 은근하게 끓어오르는 냄비 속에서 서서히 익어가는 개구리 같은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열대나 아열대 지역에서 나타나는 짧은 국지성 호우인 ‘스콜’이 한국에 처음 등장한 게 2010년대 초반의 일이다. 지난 4월 19일 환경부가 공개한 ‘대한민국 기후변화 적응 보고서’에 따르면 한반도의 폭우와 폭염, 겨울철 이상고온, 한파의 강도는 더욱 강해지고 빈번해지고 있다. 이런 식의 이상한 기후가 이어지는 일은 당연히 과거에는 없었다.
태국이나 인도, 스페인만큼의 여파는 없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기후 위기로 피해를 보는 사례가 일어나고 있다. 관측 사상 가장 기온이 높았던 3월에 이어, 4월에는 이상저온 때문에 피해를 본 농가가 적지 않았다. 5월 2일에는 고용노동부가 기후 위기로 인한 산업재해 증가에 대처할 예방 매뉴얼을 제작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한반도의 기후변화, 기후 위기는 이미 현실로 닥쳐왔다. 유래 없이 이르고 뒤죽박죽으로 이뤄진 개화가 첫 번째 근거일 것이다.
지대가 낮은 곳에는 벚꽃이 시들거나 다 져버린 4월의 초순에, 나와 학생들은 벚꽃과 개나리, 진달래가 어우러진 만휴정에서 자칫 놓칠 뻔한 꽃놀이를 원 없이 즐기며 봄꽃이 어우러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봄꽃이 때 이르게 뒤죽박죽으로 만개한 만휴정의 정경은, 어쩌면 자연이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이동민은 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이자 국제학술지 〈Journal of Geography〉의 편집위원이다. 〈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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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김현유
    WRITER 이동민
    ILLUSTRATOR MYCDAYS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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