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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지로' 열풍이 지나간 이후 을지로에 터를 잡은 6곳의 가게

을지로가 ‘힙지로’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 조롱 섞인 표현의 여파였을까? 이제 을지로는 이전의 힘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힙’은 성수동에 뺏기고, 내실은 연남동만 못하다. 그러나 그 안에도 여전히 태동하는 것들은 있다. 최근 을지로에 들어선, 여전히 이곳에서 좋은 것을 만들고 싶어 하는 가게 여섯 곳을 찾았다.

프로필 by 오성윤 2024.04.05
탄노이 웨스트민스터 로얄 스피커와 매킨토시 MAC7200 앰프의 조합으로 다양한 희귀 음반을 감상할 수 있는 헬카페 뮤직.

탄노이 웨스트민스터 로얄 스피커와 매킨토시 MAC7200 앰프의 조합으로 다양한 희귀 음반을 감상할 수 있는 헬카페 뮤직.

( 커피+음악 ) 헬카페 뮤직
헬카페의 네 번째 매장인 헬카페 뮤직은 탄노이 웨스트민스터 로얄 스피커로 음악을 튼다. 숨겨진 사실인 양 새삼스럽게 소개할 부분도 아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게 사람 몸집보다 큰 스피커 두 대가 매장 전체를 소리로 채우고 있는 광경이니까. 가리모쿠60 케이체어에 비스듬히 앉아, 탄노이 웨스트민스터 로얄과 매킨토시 MAC7200 앰프가 빚어내는 소리를 들으며, ‘균형감이 좋다는 게 바로 이런 뜻이구나’ 싶은 커피를 홀짝거리다 보면 저절로 망중한이 찾아온다. 신기한 건 이 상반된 감동의 매끄러운 연결이다. 들어설 때만 해도 아주 새롭고 재미있는 콘셉트를 가진 공간 같던 것이, 조금만 머물다 보면 우리가 어느 순간 잃어버렸던 아주 클래식한 의미의 카페처럼 느껴지니까 말이다. 통창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이 그 인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모르겠다. 헬카페 뮤직이 자리한 곳은 을지로4가역과 방산시장 중간쯤 되는 곳. 인근 건물들은 인쇄소, 공업사, 온갖 종류의 제조사로 가득하고, 골목골목에서 카트로 분주히 물건을 나르는 인부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딱 우리 머릿속의 전형적인 ‘을지로 풍경’이 펼쳐져 있다는 뜻이다. 아니, ‘옛 을지로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이제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을지로’라는 게 어떤 느낌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 기사는 헬카페 뮤직 앞을 서성거리는 동안 문득 들었던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헬카페는 왜 이런 곳에 이런 콘셉트의 매장을 열었을까? 이 지역의 역사성이 헬카페 뮤직이 품으려는 분위기와 맞닿는 부분이 있어서? 아니면 무엇이 생기든 흥미롭게 받아들여주는 지역이라서? 을지로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한 도심 제조업의 산실이다. 워낙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복잡한 생태계를 구축했기에 우스개로 ‘도면만 갖다주면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유산이지만, 동시에 시대에 뒤처진 낙후 시설이기도 했다. 을지로 재개발은 벌써 수십 년 전부터 나온 이야기였으나 지난 10여 년간 빠르게 구체화되며 독특한 상권을 만들어냈다. 서울이라는 메가시티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데도 임대료는 낮은 상권을. 언제 그만둬야 할지 모르는 곳에서 사업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결국 굳이 간판을 달지 않는, 부족한 부분을 재치와 취향으로 채우는 가게들이 낙후한 동네의 높고 깊은 곳 여기저기에 들어섰고, 그게 바로 ‘힙지로’의 시작이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좋은 것과 엉뚱한 것이 마구 섞이면서 ‘무엇이 생기든 이상할 것 없는 곳’이라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젠트리피케이션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온갖 기믹이 난무하고 엉성함이나 무성의함을 무심함으로 포장하는 행태가 늘면서 ‘힙지로’는 언젠가부터 조롱 비슷한 표현이 되었다. 그러니 헬카페가 지금의 을지로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새삼 궁금해졌던 것이다. 비록 임성은 대표의 대답은 다소 맥 빠지는 것이었지만. “좋은 자리가 우연히 좋은 가격에 나와서요.” 하지만 부연이 흥미로웠다. 그는 그전까지 오히려 새 가게터로 을지로 쪽은 배제했다. “제가 옛날에 종로3가나 을지로3가 쪽에 술 마시러 많이 다녔는데, 얼마 전에 가보고 깜짝 놀랐어요. 완성도 있게 잘 만든 매장이랑 그냥 그거 보고 따라 만든 매장들이 너무 기준 없이 섞여 있더라고요. 사실 을지로 콘셉트가 어려운 게, 의도를 잘 품고 열심히 만들면 뭐가 됐든 작품이 될 수 있지만 의도가 없으면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거거든요.” 다만 그는 개업을 하기 전에 미처 몰랐던 ‘을지로의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바로 을지로가 장사를 하기에 기본적으로 유리한 입지라는 점이다. 올드 타운이라 상주인구도 많고 회사가 많아서 주중 낮에도 손님이 오며, 주말에는 사람들이 찾아서 온다. “사대문 안은 사대문 안이라, 기본적으로 사람이 많아요. 여전히 가능성은 많은 동네인 거죠.”

빈 인쇄소 건물을 재단장하고 미술감독과 함께 내외부 모든 요소를 집요하게 스타일링해 경남 산청의 정서를 전하는 고깃집 산청숯불가든 을지로.

빈 인쇄소 건물을 재단장하고 미술감독과 함께 내외부 모든 요소를 집요하게 스타일링해 경남 산청의 정서를 전하는 고깃집 산청숯불가든 을지로.

( 고기+풍류 ) 산청숯불가든 을지로
다만 임성은 대표가 보기에, 이제 을지로의 중심부에서 개인이 뭔가를 하기는 좀 힘든 상황이다. 앞서 묘사했듯, 그곳은 이제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나 아예 전문가만’ 들어가는 ‘요지경’이니까. 그가 최근 을지로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곳으로 산청숯불가든을 꼽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일단 실력이 좋고(고기가 맛있고), 콘셉트를 집요할 정도로 추구했으며, 전문가다. 산청숯불가든은 외식 전문 기업 세광그린푸드와 외식 기획자 바비정이 협업해 만든 브랜드다. “황토벽부터 화로, 수작업으로 만든 테이블, 고기를 직접 썰어 주는 오픈 주방… 공간에 따라 조명 방향이나 조도도 다르게 연출했죠. 대표님이 경남 산청을 우연히 찾았다가 느꼈던 정서를 이곳에 오는 모두가 경험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요.” 세광그린푸드 신서정 마케팅팀장의 설명이다. 헬카페 임성은 대표가 ‘종이 한 장 인쇄해 놓은 것까지 디테일 밀도가 너무 높아서 기획 쪽 일하는 사람이 보면 머리가 아플 정도’라고 묘사한 인테리어는 ‘정서적 경험’에 대한 이런 집요함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럼 이미 마곡에 첫 매장을 낸 바 있는 산청숯불가든이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을지로에 두 번째 매장을 차린 이유는 뭘까? “산청숯불가든이라는 브랜드 결에 걸맞은 공간을 찾다가 을지로로 오게 된 거죠. 지점이라고 이해하는 분도 많은데, 사실 저희는 둘을 따로 놓고 보고 있거든요. 실제로 느낌도 많이 다르고요. 산청숯불가든 마곡이 호방한 느낌을 준다면 산청숯불가든 을지로는 아늑하고 ‘아지트’ 같은 느낌이 나요. 산청숯불가든 을지로는 원래 인쇄소였던 공간을 재단장한 곳이라, 미술감독님과 처음 콘셉트를 잡을 때부터 그런 매력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죠.”

필름 현상소 망우삼림에서 오픈한 ‘기존에 없던 형태의 인쇄소’이자 윤병주 대표의 아카이빙 공간인 20세기인쇄사무실.

필름 현상소 망우삼림에서 오픈한 ‘기존에 없던 형태의 인쇄소’이자 윤병주 대표의 아카이빙 공간인 20세기인쇄사무실.

( 필름+인쇄 ) 20세기인쇄사무실
‘을지로스러운 공간’을 논하자면 20세기인쇄사무실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을지로3가역 11번 출구 바로 앞에 위치한, 필름 현상소 망우삼림에서 지난 10월 오픈한 공간. “을지로 인쇄산업의 시작은 무려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20세기에 그 꽃을 피우게 됩니다. (중략) 망우삼림의 새로운 공간 20세기인쇄사무실은 을지로의 인쇄소 명맥을 감히 이어받고자, 그리고 망우삼림과 마찬가지로 기존에 없는 형태의 인쇄소가 되고자 태어났습니다.” 망우삼림 인스타그램 계정의 소개글 중 일부다. 다소 간편하게 풀어 설명하자면, 건물 3층의 현상소에서 현상하고 스캔한 필름 결과물을 다양한 형태의 굿즈로 만들어주는 4층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그럼 이들은 애초부터 언젠가 인쇄 문화와 관련한 공간을 차릴 작정으로 6년 전 을지로에 터를 잡은 걸까? 윤병주 대표는 딱히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지나가면서 보는데 이 창문의 형태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날 바로 계약했습니다. 창피한 얘기지만 뭐 전략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가 <쉘 위 댄스>(1996)라는 영화를 정말 좋아했는데, 그 영화 속 댄스 교습소 사장님이 밖을 내다보던 창과 똑같이 생겼었거든요.”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이 감탄부터 내뱉는 ‘운치 있는 현상소’ 망우삼림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 위층인 20세기인쇄사무실의 분위기도 마찬가지. 아니, 조금 더 놀랍다. “사실 제가 4층을 임대한 지는 4년 정도 됐어요. 3년을 월세만 내고 비워둔 거죠. 돈 벌 궁리를 하고 ‘이런 장사 합니다’ 하는 걸 제가 너무 힘들어해서. 그래서 제가 수집했던 물건들을 가져다 놓은 건데 어느새 작은 박물관처럼 되어버렸고, 다들 여기가 뭘 파는 공간이라고 생각들을 잘 안 하더라고요.” 이렇듯 다소 방만한 운영이 가능했던 건 역시 이곳이 을지로이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을지로에서 건물 3층 이상의 공간들은 여전히 어마어마하게 저렴하다. 시설도 낙후됐고, 1·2층은 보통 건물주가 직접 조명가게 같은 장사를 하거나 친한 사람에게 내주는 경우가 많아 건물 전체 임대료가 자연스레 동결되곤 한다는 것이다. “저는 사실 사업을 할 팔자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도 나중에 사람들이 ‘아, 그래 망우삼림이란 재미있는 곳이 있었지’ ‘20세기인쇄사무실이란 곳이 있었지’ 기억하게 할 자신은 있거든요.” 어쨌든 을지로는 아직 윤병주 대표 같은 사람까지 품고 키워줄 수 있는 곳이다.

영화를 매개로 공간, 사람, 지역사회를 잇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회적협동조합 커뮤니티시네마가 세운상가 3층에 오픈한 커뮤니티 거점 금지옥엽.

영화를 매개로 공간, 사람, 지역사회를 잇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회적협동조합 커뮤니티시네마가 세운상가 3층에 오픈한 커뮤니티 거점 금지옥엽.

( 영화+굿즈 ) 금지옥엽
커뮤니티시네마의 김남훈 이사 역시 을지로의 역사성을 좀 더 밝은 눈으로 돌아보는 사람이다. “종로의 세운상가부터 충무로의 인현상가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과거에 아세아극장, 국도극장, 대한극장이 위치해 있던 곳입니다. 인근에는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서울극장, 스카라극장, 명보극장 같은 영화관의 중심 지역이기도 했고요. 1980, 90년대에는 다양한 레코드숍과 소위 ‘빽판’ 가게들이 있던 서브컬처 소비의 중심지이기도 했죠.” 커뮤니티시네마는 영화를 매개로 공간, 사람, 지역사회를 잇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회적협동조합이며, 금지옥엽은 커뮤니티시네마가 을지로에 오픈한 매장이다. 영화 단체들이 모여 협업하고 자생력을 만들도록 하는 ‘소셜프랜차이즈 매장’으로 일반 대중의 관점에서는 포스터, 음반, 책, 카드, 핀 등 다양한 영화 굿즈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다만 김남훈 이사는 이 지역의 역사성 때문에 세운상가 3층을 금지옥엽의 터로 정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사실 을지로 매장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는데, (커뮤니티시네마는 금지옥엽 외에도 부산과 전주에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브랜드의 인지도 확장과 마케팅 전략 측면에서 오히려 가장 먼저 오픈하게 됐다는 것이다. 영화관 문화, 나아가 영화 문화가 처한 상황을 우려하는 김남훈 이사가 을지로에서 주목한 건 이 지역 특유의 소비문화였다. “과거와 달라진 환경 안에서 영화관, 영화계도 새로운 시도들이 필요하겠죠. 저희도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을지로에서는 과거와 전혀 다른 차원의 문화 소비, 장소성 소비가 일어나고 있어요. 금지옥엽 역시 그런 트렌드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인생의 단맛, 오무사, 수도원, 법원, 텅 비어있는 삶 등을 통해 독창적 브랜딩 철학을 선보여온 현현이 위스키와 디저트의 조화를 테마로 만든 위스키바 필로소피 라운지.

인생의 단맛, 오무사, 수도원, 법원, 텅 비어있는 삶 등을 통해 독창적 브랜딩 철학을 선보여온 현현이 위스키와 디저트의 조화를 테마로 만든 위스키바 필로소피 라운지.

( 위스키+디저트 ) 필로소피 라운지
반면 현현의 하덕현 대표는 을지로 같은 입지 조건을 피해 온 종류의 사람이다. 갑자기 각광받거나 침체되는 곳에서는 제아무리 실력 있는 매장도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인생의 단맛, 오무사, 수도원, 법원, 텅 비어있는 삶 등 현현이 낸 모든 가게는 하덕현 대표의 이런 인식을 따라 모두 조용한 길목에 자리를 잡았고, 그건 충무로 한적한 골목에 오픈한 10번째 가게 필로소피 라운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미처 예상치 못했던 건, 사람들이 이 가게의 입지를 ‘을지로’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검색창에 ‘필로소피 라운지’를 치면 대부분의 게시물이 ‘을지로 필로소피 라운지’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희는 사실 을지로를 피해 왔거든요. 필로소피 라운지도 분명 충무로라고 생각하고 오픈했던 건데…. 을지로의 경계가 계속 외곽으로 넓어지고 있는 거라고 봐요.” 을지로가 가진 이점이 분명히 존재하는 데 반해 그 중심에서는 섣불리 뭔가를 하기가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면서 가장자리가 점점 넓어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필로소피 라운지가 을지로로 인식되는 건 이 가게가 가진 어떤 특성 때문은 아닐까? 필로소피 라운지는 인쇄소와 공업사가 즐비한 골목에 자리한, 역시나 과거에 인쇄소였던 공간을 재단장한 위스키바다. 그런 거리에 호텔 로비처럼 우아한 공간을 짓고, 위스키와 디저트를 매치해낸다는 독특한 콘셉트를 내세운 것이다. “위스키가 나이 많은 사람, 남자들의 술이라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우호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디저트랑 같이 낸다는 콘셉트가 떠오른 거죠. 실제로 사람들도 저희 의도보다 더 잘 이용해주고 계세요. 술을 마시러 오는 분도 있고, 아예 디저트만 드시러 오는 분도 있고요.” 고객 구성은 하덕현 대표가 이 지역에서 가장 놀랐던 부분 중 하나이기도 하다. 현현이 이전에 매장을 냈던 종로나 서촌도 다양한 연령대가 오는 곳이긴 하지만, 필로소피 라운지는 그 폭이 정말 넓다는 것이다. “그렇게 뒤섞인 풍경이 딱히 어색하지도 않고요. 아주 자연스럽죠.”

44년의 세월로 구축한 노하우, 더 넓고 쾌적해진 매장, 변함없이 소박한 태도를 품고 다시 을지로로 돌아온 을지OB베어.

44년의 세월로 구축한 노하우, 더 넓고 쾌적해진 매장, 변함없이 소박한 태도를 품고 다시 을지로로 돌아온 을지OB베어.

( 맥주+커뮤니티 ) 을지OB베어
갓 스무 살이 된 듯한 이들부터 중장년층까지 한데 뒤섞여 술을 마시는 광경은 확실히 을지로 노가리 골목 같은 곳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1, 2년 전에는 말이다. “을지로의 변화에 대해 단편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시대의 변화라는 게 어쩔 수 없는 거고, 또 그런 변화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물론 처음 ‘힙지로’라 그러고 젊은 세대가 유행처럼 몰려올 땐 ‘저게 얼마나 갈까’ 하는 우려가 들긴 했죠. 실제로 벌써 젊은이들이 다 떠나고 노가리 골목 자리가 휑해진 걸 보면 마음이 좀 그래요.” 을지OB베어 최수영 대표의 말이다. 을지OB베어는 무려 44년 역사를 가진 호프집이다. 한국 최초의 생맥줏집으로 회자되며, 중소벤처기업부 ‘백 년 가게’에 유일한 술집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그러다 건물주와의 갈등 끝에 재작년 봄 갑자기 문을 닫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현재 노가리 골목을 점령한 만선호프의 사장이 전 을지OB베어 건물 지분을 매입한 상태였다.) 지난 2월 다시 을지로로 돌아온 것이다. 비록 42년의 세월을 쌓았던 그 자리는 아니지만 가게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그대로다. 급속 냉각하지 않고 고유의 노하우로 냉장 숙성을 한 생맥주 맛, 기밀 레시피로 전해 내려오는 노가리 소스, 그리고 ‘상생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분위기. 을지OB베어는 오전에 퇴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아침 10시부터 문을 여는 희한한 술집이었고, ‘떼어오는 가격이 파는 가격의 두 배가 될 때까지 노가리 값을 올리지 마라’는 창업주의 당부를 계승한 호프집이었으며, 여전히 후한 급여에 대학생 알바를 우선 채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연탄불에 일일이 구워낸 노가리나 튼실한 존슨빌 소시지 한 그릇에는 아직도 몇천 원 단위의 가격을 붙인다. “만 원을 넘기는 게 그렇게 조심스럽더라고요. 그건 저희가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책임감 같은 것이죠. 우리도 잘 몰랐던 우리 가게의 가치를 알려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너희 가게가 그런 가게라고. 그러니까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창업주의 딸인 강호신 사장이 메뉴를 설명하다 더듬은 건 을지OB베어가 원래 자리에서 쫓겨날 때 함께했던 사람들이었다. 음악 공연을 벌이고, 다 함께 모여 기도를 하고, 일부러 멀리 찾아와 유대의 말을 전한 사람들. 확실히 그건 ‘을지로의 힘’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Credit

  • PHOTOGRAPHER 박기훈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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