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패션지 에디터가 올림픽 선수들을 인터뷰하며 깨달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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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패션 매거진의 피처 에디터 출신인 내가 올림픽위원회 IOC 산하 OBS 올림픽닷컴 에디터라는 직함을 갖게 된 경위다. 각종 스포츠 대회들, 별별 종목의 월드컵부터 세계선수권까지 리뷰하고, 랭킹과 기록을 모으고, 다양한 종목의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과 인터뷰를 하고, 다가올 올림픽 기사들을 구성하는 일이 주 업무다.
나에게 스포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아마 보통의 사람이리라. 올림픽 금메달 결승전과 축구 A 매치를 찾아보는 정도. 오타니가 나오는 야구 경기 정도는 즐겨 볼 수 있는 정도. 그러나 솔직히 올림픽과 월드컵이 시작되면, 스포츠 중계로 인해 중단된 드라마를 훨씬 더 그리워했던 쪽이랄까. 전문가의 영역에서 보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수들이 어떤 방식으로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올림픽 출전권을 얻고, 세계 랭킹은 또 어떻게 집계되는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이외에 중요한 세계대회는 무엇인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올림픽은 종목도 많고, 룰도 자주 바뀌기 때문에 아무리 스포츠를 좋아한다 한들 이 모든 종목의 정보를 완벽하게 꿰고 있는 기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과 패션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의 피처 에디터 출신들은 단기간 학습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기사 하나를 쓸 때면 그것이 미식이든 아트든 스포츠의 특정 종목이든 전문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전문가와 대거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학습하는 일이 지난 10여 년간 내가 해온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생소한 스포츠의 세계 여기저기를 더듬거리며 수많은 종목을 파고들기 시작했고, 그 종목의 선수들을 인터뷰했다.
그렇게 시작한 올림픽 에디터의 생활은 생각보다 여러 면에서 나의 감정들을 뒤흔들었다. 올림픽 종목 중에는 축구, 야구, 농구, 골프, 테니스처럼 평소에도 프로 경기나 리그로 즐기는 인기 종목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평소에 무관심하던 것들이다. 유도, 양궁, 수영, 펜싱처럼 익숙한 종목조차 올림픽 시즌이 아니면 4년간 선수들이 어디서 무슨 경기를 하든 크게 관심이 없는데, 메달권에서 멀어져 있는 종목들은 올림픽 중에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듯 없는 듯 흘러가버린다. 물론 대중의 탓이 아니다, 스포츠에 승부를 통한 카타르시스가 없다면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가치는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선수들에게 스포츠란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꿈이자 업이며 또한 삶. 도대체 올림픽이 뭐길래, 4년에 한 번 반짝 올라오는 대중의 관심을 반영하듯 그들의 최종 목표 역시 올림픽 무대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이라는데, 인생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정도 밟을 수 있는 올림픽의 그 짧은 순간을 위해 인생을 온전히 투자한다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유도선수 김민종은 세계선수권에서 39년 만에 금메달을 땄는데도 “올림픽을 위해 경험하고 배우는 대회라고 생각하고 임했기 때문에 마음의 동요는 없었다”며 스스로를 다잡았다고 했다. 모두 올림픽으로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실제로 그가 골리앗 같은 테디 리네르에게 한판 패로 지며 은메달을 거는 장면이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다. 39년 만의 세계선수권 챔피언의 기록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제아무리 세계 랭킹 1위를 오래 지켜온 선수라도 그 시즌 부상이나 경기 당일의 컨디션으로 올림픽에서 빈손으로 돌아온다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남더라도 비운의 선수로 기억되는 아이러니. 그러니 안세영이 부상의 고통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하면서까지 마지막 올림픽 타이틀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냉혹한 찰나의 승부’의 기록을 따라다니다 보니 이들의 삶이 지독하게 공정해서 혹은 또 지독하게 불공정해 보여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대부분의 국가대표 선수는 초등학생, 늦으면 중학생 때 자신의 삶을 일찌감치 결정한다. 그리고 선수생활의 하이라이트를 체력적으로 가장 유리한 20대 초중반에 맞이하기 위해 10대 시절의 자유와 사춘기의 방황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며 달려간다. 박탈된 자유, 억압 이런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면서 과거 스포츠 팀들에서 이루어졌던 강압과 폭력 같은 뉴스들도 떠올랐다. 어쩐지 이 멋모르는 어린 선수들이 어른들의 욕심 아래 목표만을 향해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건 아닌가 속으로는 걱정도 됐다. 나의 인터뷰 질문지는 온통 그들의 사춘기와 잃어버린 10대, 루틴과 훈련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관련한 질문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런 시선은 지난 시대를 살아온 내가 가진 내적 편견이었다. 정작 선수들을 직접 만난 뒤엔 그들이 내가 만나온 사람들 가운데 가장 단단하고 안정감 있고 유쾌한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평소 특정 집단을 스테레오타입화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에게서 받는 일관적인 긍정의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안정감과 밸런스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버티며 얻어낸 것이라기보다 반복과 루틴 속에서 생성되는 일종의 명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려서 유도를 시작하고 좋아했던 이유는 분명 사람을 메칠 때의 쾌감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는 상대를 메칠 때 자체의 시원함보다도 제가 훈련해온 수많은 기술 중 하나를 무의식중으로 사용해서 상대방을 힘들이지 않고 메칠 때, 그러니까 노력과 준비가 완벽해서 자연스럽게 발휘될 때 느끼는 행복감이 더 커요. 저는 저를 통제하고 절제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편이에요. 규율, 규칙, 규제가 많지만, 이런 걸 지켜내면서 살아가는 게 편하고 익숙하고, 때로는 이러한 루틴이 없으면 허전할 것 같아요. 유도를 위해서 하는 모든 과정이 그냥 재밌고 행복한 거예요.” -김민종(유도 국가대표)
“어쩌면 저는 늦게 시작해(중학교 2학년), 수업도 듣고 학원도 가고 하면서 10대 때 할 수 있는 건 다 누렸기 때문인지 몰라도, 고등학생 시절에 이러한 루틴화된 삶이 답답하거나 일탈하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 자체가 없었어요.” -김하윤(유도 국가대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코미디 영화 <Everybody Wants Some!!>에는 야구선수로 대학에 특채 입학해 들어온 주인공이 엉뚱하게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이야기를 꺼내는 장면이 있다. 물론 이 장면은 더 많은 인생의 담론을 내포하려는 노력이지만, 실제로 신화 속 한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삶과 운동선수들의 반복되는 훈련의 삶을 굳이 비유한다면, 카뮈가 말한 ‘행복한 시지프’의 실존주의를 그들은 이미 몸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운동을 취미 이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한계의 순간을 지나고 나면 온전히 몸의 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무념무상의 안정감을 경험하게 된다고들 하는데, 내가 발견한 그들의 안정감은 분명 내적인 비워내기를 매일같이 반복적으로 해내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일종의 건강함이었을 것이다.
며칠 전 양궁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여자 양궁대표팀이 경기 직후 기자들과 한 인터뷰 쿼트 녹음을 팀 동료에게 전달받아 적어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한 기자가 굉장히 중요했던 ‘한 발’을 쏘기 전의 부담감에 대해 전훈영에게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부담감조차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그 순간 저는 그저 오롯이 제 화살에 집중하고 있었거든요.” 질문했던 기자는 그 대답을 ‘집중을 잘 하려고 했다’ ‘부담을 안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식상한 대답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모습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슬로모션까지 걸어 상상하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아득해지고 오롯이 숨을 멈추고 바람의 흐름을 느끼며 활시위를 당기는 전훈영과 멀리 과녁만이 보이는 찰나의 순간을.
“현재 마음의 흐름에 집중해보세요.” 내 심리상담사가 자주 하는 말이다. 한동안 우울증에 고통받았던 나는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심리상담을 받아왔고,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2년이 넘는 시간 명상앱 등을 다운받으며 노력해왔는데, 그들은 자신의 훈련 속에서 이를 체득하는 방법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Being Present’ 그들은 흔히 ‘멘털 관리’라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마음과 신체의 동기화 훈련 같은 것이 아닐까.
“물론 모두 목표는 금메달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최종적인 목표만을 보면서 달려가면 오히려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을 잘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매번 그런 것 때문에 실수한 경우가 많았고요. 그래서 저는 선수 한명 한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그 경기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노력했더니 결국 목표에 도달한 기분이 들었어요.” - 이혜경(유도 국가대표)
그중에서도 내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선수는 요트 남자 딩기 1인승에 출전한 하지민이다. 이미 아시안게임 3연패, 지난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아시아권 선수로 최고 기록인 7위, 이번 파리 올림픽 출전으로 5회 연속 출전을 달성한 선수인데도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정작 그는 그 따위 명예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나는 그의 이야기들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자못 아쉽다. 그는 마치 배의 균형을 잡듯, 어떻게든 이어가야 하는 세속의 인생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대가 없는 성취와 자기만족의 세계인 스포츠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추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소설 속 뱃사람들이 모두 그렇듯 나름대로 깊은 인생의 철학을 간직한 듯 들렸다.
“세일링이라는 것 자체가 바다에 나가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거든요. 물론 대회에 나가면 경쟁적으로 이기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대부분 유유히 바다 위에서 사색하는 과정이 많아서 이 스포츠가 너무 좋았어요. 선수로서는 전략과 전술을 이용해 바람을 예측하는 정확도를 높이고, 예측이 잘 안 되더라도 위험관리를 하면서 배의 위치를 만들어가는 것이 매력적이에요 요트는. 5분 후 혹은 10분 후를 예측해서 조금 더 안전하겠다 싶은 곳, 보다 유리하겠다 싶은 곳에 배를 위치시키는 가정들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로 배를 운영하는 것이 결국 인생을 은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죠.” - 하지민(요트 국가대표)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이틀 전, 여기저리 돌아다니며 깜짝 메달을 안겨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호언장담했던 스포츠클라이밍의 이도현이 매우 아쉬운 실수로 준결승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그가 홀드 하나를 움켜쥐기 위해 보여줬던 집념만은 내 기억에 남았다. 산과는 거리가 먼 내가 이번 올림픽이 끝나면 클라이밍에 반드시 도전해보리라 다짐하게 된 일. 어쩌면 그 다짐 자체가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우연히 얻었던 이 6개월간의 기회가 조금씩 조금씩 나름 클라이밍에 도전하도록 바꾸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선수들만큼 현재에 집중하는 멘털을 가꾸고 나면 어쩌면 나도 더는 ‘슬럼프’ 같은 변명 뒤에 숨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들을 하루씩 하루씩 쌓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끝낼 수도 있지 않을까?
손혜영은 프리랜스 에디터로, <마리끌레르> <인스타일> 등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현재 남편, 딸과 함께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거주하고 있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손혜영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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