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83세의 영국 거장 화가가 회고전을 앞두고 가진 생각들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Ba)’의 대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런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을 맞아 그의 긴 경력을 그 자신과 함께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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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 of the Storm’, 2003
사물이 가진 힘을 꿰뚫듯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크레이그 마틴이다. 한 달 후면 83세 생일을 맞는 그는 여전히 일상적인 물건들을 눈부신, 예상치 못한 색채로 구현하고 있다. 수레바퀴, TV 세트, 전구, 하이힐, 카세트테이프, 선글라스, 그리고 우산. 익숙하고 상징적이며 때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물건들이다. 그의 이름을 알렸던 1973년 작품 ‘An Oak Tree’는 선반 위에 놓인 한 잔의 물과 한 페이지짜리 텍스트로 구성된 작품이었다. 텍스트에는 ‘작가’(아마도 크레이그 마틴 본인일 가능성이 높은)가 대화 상대와 함께 그 물 한 잔이 어째서 실제로는 참나무인지 논쟁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일단 호주농림부는 이 내용을 납득했고, 1976년 순회 전시 당시 해당 작품을 압류했다.)
크레이그 마틴은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출신 부모의 슬하에 태어났다. 그리고 농업경제학자인 아버지가 일했던 세계은행이 있는 미국 워싱턴DC에서 자랐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소비주의가 탄생한 곳, ‘물건’이야말로 중요한 것이었던 전후 시기 미국에서 성인이 되었다. 그는 뉴욕의 포드햄대학교를 다니다가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으로 편입했다.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와 그의 동료들, 이를테면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브라이스 마든(Brice Marden), 척 클로스(Chuck Close) 등의 가르침을 따르는 커리큘럼이 있는 곳이었다. 1960년대 중반, 그는 바스 미술학교(The Bath Academy of Art)의 교수직을 수락하고 당시 아내였던 예술가 잰 하시(Jan Hashey), 딸 제시카와 함께 잉글랜드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켄트의 캔터베리대학, 런던의 골드스미스대학에서도 가르쳤다. 그가 골드스미스에서 가르친 학생들 중에는, yBa라는 약자로 영원히 불리게 된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들도 있었다. 리암 길릭(Liam Gillick), 피오나 래(Fiona Rae), 사라 루카스(Sarah Lucas), 게리 흄(Gary Hume), 마이클 랜디(Michael Landy) 같은 작가들. 그는 40대 때 아내와 별거를 시작했으며,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했다.
그가 골드스미스에서 가르친 학생들 중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는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다. 크레이그 마틴이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는 수많은 제자 중 한 명이기도 한 허스트는 <에스콰이어 UK>에 직접 크레이그 마틴이 당시 yBa 세대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말해주었다. “마이클은 나와 내 세대 전체에 영감을 주었다.” 그의 이메일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이든 가능하며, 경계나 한계가 없다고 믿게 해주었다. 그저 작품을 만들어 발견되기만 기다리지 말고, 예술가가 되라고 격려해줬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현재를 어떻게 살지, 과거를 어떻게 흡수할지, 미래를 어떻게 창조해내야 할지를 가르쳐주었으니까. 위대한 예술가이자, 지금은 훌륭한 친구이기도 하고 말이다.”

‘Sea Food’, 1984

‘Untitled (corkscrew)’, 2014

‘An Oak Tree’, 1973

‘Untitled (papercup)’. 2014
지난 9월 말부터 런던 왕립 미술 아카데미(Royal Academy)에서는 크레이그 마틴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50대가 된 허스트는 최근 크레이그 마틴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크레이그 마틴을 처음 만난 당시의 크레이그 마틴의 나이가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회고전은 그가 1966년 영국에 온 이후로 수십 년 동안 만든 작품들을 아우르는 방대한 규모로 기획되었다. 한 번도 세상에 공개된 적 없는 초창기 작품인 1967년 ‘book’ 조각도 포함되어 있다. 정원에서는 대형 강철 조각품 중 일부를, 팔각형 방에서는 뮤지션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과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변형 디지털 초상화를 포함한 커미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전시의 백미는 크레이그 마틴이 여러 해에 걸쳐 제작한 수백 점의 사물 드로잉 작품들 중 300점 이상을 사운드 스케이프와 프로젝션으로 구현한 몰입형 전시관이다. 이런 유형의 설치 작품은 그에게도 완전히 새로운 방식일 것이다.
크레이그 마틴은 2015년 출간한 저서 <On Being an Artist>에서 자신이 꾸준히 ‘사물들’에 매혹되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내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그렸다. 대부분 내 소유물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 사물들을 선택한 것은 개인적으로 중요한 물건이어서가 아니라, 공유된 가치가 있어서였다. 그것들은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보편적인 언어를 구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나 익숙해서 결국 보이지 않게 된, 특별한 의미도 없는 사물들 말이다.” 그의 책에는 그가 20대 때, 은둔 생활을 하기로 유명한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에서 스웨덴까지 배와 기차를 타고 여행했던 것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들도 포함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베리만은 만남을 거절했다.)
인터뷰날 크레이그 마틴이 궁극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리시 수낵의 우산이라기보다는 (결국 비는 오지 않았지만 리시 수낵의 아내 악샤타가 남편을 위해 접힌 우산을 들고 나왔다. 그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에게 맡기겠다) 더 큰 정치적인 그림이었다. 그날 아침 감정에 대해 그는 “환희를 느꼈다”고 표현했다. “그저… 신께 감사한다. 나는 이 나라가 지난 15년 동안 완전히 망가졌으며, 영국의 너무나 많은 중요한 것들이 버려졌다고 생각한다. 전부 다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복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만 말이다.”
넓고 하얀 그의 스튜디오에는 작품이 거의 없었다. 한때 그림이 걸려 있던 벽 한쪽은 그 가장자리 부분이 변색된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 있던 작품들 대부분은 최근에 왕립 미술 아카데미로 옮겼거나, 혹은 다음 작품을 만들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창고로 옮겨진 상태였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물감이 든 병들이 단정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벽에는 앞으로 작품을 만들 검은 캔버스가 몇 점 걸려 있었다. 크레이그 마틴은 컴퓨터로 그림을 그린 후 그것을 캔버스로 옮긴다. 테이프로 선을 표시하고, 조수의 도움을 받아 작은 롤러로 색을 칠한다.
우리는 낡은 가죽 임스체어에 나란히 앉아, 우리 앞에 있는 벽에 걸린 유일한 대형 그림을 바라보았다. 임스체어만큼이나 상징적인 의자, 샬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이 1927년 디자인한 ‘스위블(Swivel)’을 그린 그림이었다. 또 오른쪽 위 구석, 작은 네모 안에 있는 스위스 군용 칼 그림도 바라보았다. 나는 그림에 묘사된 사물의 직관적이지 않은 색상들에 관해 정신없이 메모했다. ‘의자 프레임이 분홍색?’ ‘소파 커버는 빨간색?’ ‘칼날을 초록색으로 칠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 메모 종이를 그만 어딘가에서 잃어버렸다. 크레이그 마틴의 요점은 색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가 입은 옷의 색깔은 차분했다. 그는 네이비 블레이저와 초록색 울 스웨터를 입었지만, 양말에서 밝은 파란색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숱이 많은 흰머리는 단정하게 가르마를 타서 넘겼다. 그는 런던 스튜디오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다. 베니스에도 집이 있어 최근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가 가진 여권은 아일랜드 여권뿐이다. 그렇다, 아일랜드 국적이어도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다. 그는 2016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크레이그 마틴의 말투에는 미국 억양이 남아 있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직접 들을 때면 여전히 충격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가 회고전을 준비하면서 생각하게 된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8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에는 비로소 사물의 이치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그날 들은 그의 이야기 중 가장 뾰족하거나 울림이 있는 것들이다.
아이들은 내 작품을 좋아한다. 내가 하는 일이 곧 자신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드로잉을 하고 그 안에 색깔을 칠한다. 어떤 색깔을 쓰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미국인이었던 적이 없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아버지의 우산 아래 미국에서 보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미국, 미국적인 정신에 대해 친숙하게 잘 알고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50년 동안 살았지만 내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는 현대성(modernity)에 끌렸다. 어릴 때 나는 시각적인 것에 민감했고, 눈에 보이는 물건들의 모습을 아주 좋아했다. 나는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했다. 현대적인 세계는 1950년대 미국에서 창조되었다. 나는 그 낙관주의와 새로움의 물결에 이끌려갔다. 그게 내 작업의 기반이다.
지금 내가 하는 작업은 어릴 때 했던 것들과 매우 비슷하다. 그때 나는 윤곽선을 그렸고, 음영을 넣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매우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열네 살 때에는 드로잉 수업도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20, 30년 동안 드로잉은 내 작업의 중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다시 하게 되었다.
어린아이들은 내 작품을 좋아한다. 내가 하는 일이 곧 자신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드로잉을 하고 그 안에 색깔을 칠한다. 어떤 색깔을 쓰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10대 때 유럽에 반했다. 성장하는 동안 유럽 문화의 복잡한 부분에 매료되었다. 아주 짧은 거리를 이동해도 문화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나 예술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어느 마을에나 감탄스러운 측면을 가진 교회가 있었다. 유럽 문화의 깊이는 아주 깊다.
나는 의욕적인 사람이었다. 무작정 잉마르 베리만을 찾아갔던 것처럼. 나는 베리만에게 아무 할 말이 없었다. 그를 왜 만나고 싶은지도 몰랐다. 만약 그가 정말로 나를 만나주었다면, 나는 가만히 서서 “안녕하세요. 당신의 영화를 정말 좋아해요”라고만 말했을 것이다.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의욕이 넘쳤고, 아주 끈질겼다.
한 곳에서 오래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은 이제는 흔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 이주했을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1960년대 중반에 이곳에 왔다. 그때에는 사람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주한다는 감각이 없었다. 지금은 지구 인구의 4분의 1 정도는 이주를 하는 것 같다. 자신이 선택하거나, 난민이 되거나, 이런저런 종류의 이주민들이.
우리 가족은 옮겨 다니며 산다. 내 할아버지는 아일랜드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태어나 아일랜드에서 학교를 다녔다. 내 딸은 잉글랜드에서 자랐으며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손자는 뉴욕에서 자랐고 지금은 이곳에서 미술 학교에 다니고 있다. 우리는 대서양을 건너 다니는 가족이다.
사람들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글쎄, ‘브리티시 드림’은 어떤가? 이곳에 왔을 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내게는 수중에 500달러 밖에 없었다. 게다가 가족까지 세 명이 함께 온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미친 짓을 했다고 생각했고, 물론 어떤 면에서 그건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아주 친절하게 대우받았다.
다른 나라로 이주한 경우, 5년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곳에 남기를 원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당신이 떠나온 예전의 나라는 다시 돌아갔을 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돌아갈 거라면 5년이 절대적인 최대치라고 말하고 싶다.
나에게 잉글랜드란 ‘웨스트 컨트리(west country)’다. 1966년 예일대학교 학생이었던 나는 졸업하기 전에 바스 미술 학교(Bath Academy of Art)에 채용되었다. 그리고 기이하도록 고풍스러운 윌트셔의 깊숙한 시골로 가게 되었다. 마치 19세기에 발을 들여놓는 것 같은 감각을 안기는 곳이었다.
그때의 잉글랜드에서 철물점에 가서 망치를 달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철물점에서는 망치 하나를 꺼내주었다. 미국에서는 10가지 망치를 꺼내준다. 그러면 그중에서 원하는 물건이나 원하는 가격을 고르는 것이다. 더 오래된 문화권에서는 그저 망치 하나를 꺼내준다.
나는 나 자신을 이국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국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후의 미국은 전후 유럽에 비하면 엄청나게 부유했다. 전후의 유럽은 엄청나게 가난했다. 나는 내 평생 만난 그 누구보다도 가난해지게 되었다.
나의 아티스트로서의 커리어는 1966년, 1967년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잉글랜드에 오기 전, 나는 미국에서 중요한 판매를 한 건 했다. 학생 시절에 (건축가) 필립 존슨에게 조각 작품 하나를 팔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작품은 분실되었다. 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물건을 남겼지만, 모두 사라졌다.
나는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 가르쳤을 뿐이다. 먹고살기 위해 가르치는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지자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웠다. 가르치는 일 덕분에 많은 것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나는 부끄러움이 많았다. 이름을 불리지 않으려고 교실 뒷자리에 숨어 있는 아이가 바로 나였다. 그런 내가 갑자기 여러 명의 아이들에게 강의를 해야 했고, 때때로 나로서는 정말 끔찍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했다.
1960년대의 영국은 미술 학교들의 황금기였다. 수업 내용 측면에서 자유가 있었다. 모든 규칙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골드스미스에서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아마도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 자유를 멀리까지, 더욱 진심으로 활용하여 상당히 독특한 종류의 미술 학교를 만들어냈다. 우리에게는 불필요한 요식도, 그 무엇도 없었다.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의 컴퍼니 소속이었던 무용수가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춤을 가르쳤다. 그게 학생들의 연습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누가 알겠는가! 춤 수업은 그곳에서의 풍부한 문화 교육의 일부였다. 그 결실은 19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에 yBa로 나타났다.
순진함(naivete)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 학생들은 아주 높은 수준의 작업을 하고도 스스로 알지 못하기도 한다. 선생의 역할 중에는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한 일의 특별함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있다고, 나는 항상 생각해왔다.
줄리안 오피(Julian Opie)는 매우 흥미로운 학생이었다. 나는 1980년에서 1981년 사이의 1년 동안 미국에 갔었다. 뉴욕에서 흥분되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후, 우연히 오피의 골드스미스 졸업 전시를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작품이 정말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1년이 지나지 않아 엄청난 관심이 쏟아졌다. 그는 자기가 보기에 ‘맞다’고 느끼는 걸 하고 있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젊은이들이 가진 일종의 대담함도 있었다. 데이미언의 초기 전시 중 하나는 경기가 불황이던 시기에 열렸다. 그는 본드 스트리트에서 바로 벗어난 곳에 있는 가게 앞 공간을 빌렸다. 계절은 겨울이었다. 아주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시장 안은 가습기들이 들어차 수증기로 가득했다. 벽에는 마름모꼴 형태가 붙은 단색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각 그림 아래에는 꽃들이 자라고 있는 쟁반이 있었다. 그리고 곧 그림에 있는 검은 덩어리들의 정체가 번데기라는 걸 알게 된다. 개막식 날, 번데기는 부화해 나비가 되었다. 전시장 안에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비들은 그림에서 날아올라 꽃 위에 앉곤 했다. 정말이지, 대단했다.
결국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시민 케인>이다. 그 시기의 오슨 웰스에게는 뭔가가 있다. 그는 그때까지 영화를 만들어본 적 없었고, 그래서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영화적인 장치를 넣었다. 진정으로 강력하고, 영리한 젊은 사람만이 그가 한 일을 할 배짱이 있을 것이다. 그는 놀라운 영화를 만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 영화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후 영화 제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그걸 잘하는 편이 좋다.
현대적인 세계는 1950년대 미국에서 창조되었다. 나는 그 낙관주의와 새로움의 물결에 이끌려갔다.

‘Common History: Conference’, 1999

Untitled (painting), 2010
자하 하디드는 자신의 초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지 마이클은 자신의 초상화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가 이곳 스튜디오로 왔고 우리는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매우 좋은 사람이라는 점과, 여러 가지 면에서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그에게는 내가 여느 창조적인 사람들에게서 본 것과 동일한 문제가 있었다. 그의 재능은 그 자신의 본성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어, 스스로 그 재능을 쉽게 생각했다. 자신의 재능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는 그냥 앉은자리에서 노래를 쓸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는 게 정당하지 않거나 사기를 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의 재능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어려웠다.
그는 또한 매우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가 죽은 후에 나온 뉴스들을 보라. TV에서 수술 같은 도움이 필요한 아이를 보면, 그는 조용히 돈을 보냈다. 그는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다. 데이미언 허스트 역시 그런 사람이다. 그는 아마도 역사상 그 어떤 예술가보다도 더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기부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알지 못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기술들을 아주 좋아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사람들, 혹은 내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 조각품은 나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다. 내 판화들도 나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다. 나는 네온을 만드는 사람들, 포마이카 상자를 만드는 사람들, 금속을 다루는 사람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었다. 나는 그들과 매우 긴밀하게 일한다. 내가 작품의 재료를 제공한다.
많은 사람이 과소평가되고 저평가되는 것 같다. 내가 했던 가장 중요한 일들 중 하나는 아마도 룩셈부르크에 있는 유럽 투자 은행을 위해 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두 건물을 잇는 88m 길이의 벽에, 여러 색깔의 선으로 72개의 이미지를 코리안(corian) 소재로 상감 세공을 해 그려 넣는 일이었다. 코리안을 전문으로 하는 프랑스의 한 회사와 함께 그 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회사가 평소에 하는 일이란 호텔에 납품할 욕실 세면대 2000개를 만드는 것이다. 그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 그 회사는 기술이 아주 뛰어났지만, 보통 그런 진정한 기술은 거의 소환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이 거대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작업했다.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오브제다.
창조적인 활동이란 그런 것이어야 한다. 이미 있는 기술을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 가르쳤을 뿐이다. 먹고살기 위해 꼭 가르치는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지자 그만두었다.

‘Untitled (four laptops blue)’, 2024
근대에 만들어진 가구 중 고전이 된 작품들은 모두 현대적으로 보인다. 만들어진 지 100년쯤 지났음에도 여전히 현대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모습이다. 놀라운 업적이다.
전 세계에는 온갖 것들로 만든 의자들이 있다. 종이는 물론 금속, 가죽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말해보라. 누군가는 그것을 재료로 의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것들은 재료와 무관히 그저 의자다. 누구나 보는 순간 바로 어떤 용도의 물건인지 알아볼 수 있다. 무엇으로 만들건 그건 언제나 의자다.
나는 매우 끈기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매우 느리게 발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의 가장 유명한 그림들, 컬러 그림들 중 가장 첫 번째 작품을 만들었을 때 내 나이는 55세였다.
내가 정말 어리둥절하게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내가 해낸 양이다. 그 양 자체가 엄청나다. 나의 생애를 돌아보면, 나는 이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1966년부터 해온 것이다!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만들 수 있는지 놀랄 것이다. 지금 나는 그 많은 작품을 보면서 생각한다. ‘대체 내가 어떻게 저걸 한 걸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말이다.
나는 세상이 어떤 면에서는 놀라울 만큼 더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른 면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도 나는 잘 알고 있다.
브렉시트 이전의 영국은 분열된 나라가 아니었다. 경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브렉시트가 재앙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터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브렉시트는 우리가 누렸던 특권을 청년 세대에게서 앗아갔다. 그리고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쪽은 우리 세대였다. …젠장할! 나는 이곳에서 사는 것에 대해 의문점을 품게 되었고, 지난 10년 동안 많은 것이 싫었다. 하지만 내 삶은 이곳에 있었으며, 그건 특권적인 삶이었다.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폭넓은 다양성을 가진 도시다. 그리고 그 다양성으로 인한 이점을 누리는 도시다. 정말 많은 나라에서 온 정말 많은 사람이 이곳에 있다. 나는 런던의 위상이 전보다 떨어졌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에서 사라진 것 중에는 이미 몇 세대 이전부터 사라진 상태인 것이 있는데, 바로 기술의 즐거움이다. 내 작품들은 세련되지 않았고 수작업으로 만든다. 투박하지는 않지만, 그 작업을 하는 장소는 엉망이 된다. 그렇지 않은가? 세계가 가상화될수록 물리적인 세계는 점점 더 흥미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동시대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저항하려 한 적이 없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받아들이고자 했다. 거기에 저항하는 데는 의미가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타협점을 찾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내가 퇴장하고 있는 중이라는 느낌을 분명하게 받고 있다. 소셜미디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의 삶이 정의하는 발전으로부터 내가 멀어지고 있다는 걸 처음 느낀 게 그때인 것 같다. 나는 내가 전과 달리 호기심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아마도 빠르게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요리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 점에 대해 종종 후회한다. 나는 악기도 배운 적이 없고, 그 점에 대해 굉장히 후회한다. 나는 다른 언어를 할 줄 모르고, 그 점에 대해 후회한다. 하지만 아주 어릴 때에도 나는 그런 일들이 산만하며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만약 내가 요리에 관심을 갖는다면, 나의 성향상 지나치게 빠져들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작업하는 시간을 빼앗겼을 테다. 내 작업을 지키기 위해, 나는 여전히 요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나이에 전시회를 연다는 사실에 설레면서 놀라워하는 중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몰입형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작품은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다. 제법 위험을 무릅쓰는 작업이다. 게다가 8월이면 나는 83세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 인생이 그랬다. 한 개의 문이 열리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한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살면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특정한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하도록 이끌린다.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가 직접 선택한 일이라고 스스로 확신하지만, 진정으로 선택한 것인지에 대해 나는 전혀 확신하지 못한다. 그럴 운명이었거나, 그러지 않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어떤 의도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계획을 가지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작업이 나를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사람들은 영감을 받아서, 대단한 아이디어를 가지고서 무언가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매일 작업을 하면서 만들어지는 작업물들을 통해 그다음 작업물의 느낌을 알게 되는 식이다.
절대로 뭔가를 끝마친 상태에 머물지 마라. 언제나 한편에서 다른 무언가를 진행하라. 내가 학생이었을 때 한 강사가 그런 말을 했다. 언제나 그 말이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낙관적인 사람이다. 이토록 낙관적인 날에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좋은 일이다.
*‘Michael Craig-Martin’ 전시는 런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9월 21일부터 12월 10일까지 열린다. royalacademy.org.uk
Credit
- EDITOR MIRANDA COLLINGE
- TRANSLATOR 박수진
- ART DESIGNER 최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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