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각기 다른 분야의 극한 체험들이 만들어내는 인간 이야기

스카이 다이빙, 대양 횡단, 초고층빌딩 등반까지 극한 도전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프로필 by 오성윤 2025.11.14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위업들이 있다. 며칠 만에 에베레스트를 등정한다든가, 홀로 카약을 타고 대양을 횡단 한다든가, 맨손으로 초고층 빌딩을 오른다든가 하는 일들 말이다. 이런 도전에 나서는 이들은극히 소수다. 자기 의지로 기꺼이 뛰어드는 이들은 더욱 드물다. 두려움, 희망, 실패, 또 승리, 그러나 그보다도 언제나 열정이 넘쳤던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가장 특별한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기분이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브리지를 보며 상공을 가르는 매코맥.

샌프란시스코 베이 브리지를 보며 상공을 가르는 매코맥.

WHAT IT FEELS LIKE…TO SURF IN THE SKY

숀 매코맥(Sean MacCormac), 50세, 스카이다이빙 선수

헬리콥터의 문이 휙 열리고 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드를 발에 고정하고 활주부 위에 선 채 샌프란시스코 베이 브리지를 내려다보며 나는 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2만 2000번의 점프가 나를 지금 여기로 인도했다. 그 모든 점프는 헛되지 않았다.

스카이다이빙은 나에게 초자연적으로 직관적인 것이었다. 열여덟 살 때 프랑스의 스카이다이버 파트리크 드 가야르동(Patrick de Gayardon)이 ‘스카이 서핑’을 하는 사진을 보았다. 개조한 스노보드를 발에 고정한 후 이를 이용해 날아다니는 기술이었다. 이 보드들은 일반 스노보드와 달리 매우 단단하고 가벼워 비행기 날개에 더 가까웠다. 이 보드를 프로펠러나 날개로 활용하면 시속 320km로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다닐 수 있다. 직접 시도해본 결과, 몇 달이 걸려야 익힐 수 있는 기술을 몇 시간 만에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스카이서핑은 늘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착지하기 전, 모두가 자신의 보드를 마치 일회용 장비인 것처럼 발로 차서 떼어낸다. 나는 급강하해 훅턴을 하고 시속 110km 이상으로 다이빙한 뒤 그 힘을 전방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으로 전환해 지면 바로 위를 스치듯 나는 기술을 10년 이상 연마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샌프란시스코 베이 브리지 위를 스쳐 내려가보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마치 하늘을 가로지는 레일처럼 뻗은 현수교의 케이블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스케이트 구조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난도의 기술이 요구되었다. 1.5km 상공에서 뛰어내린 후, 단 450m 위에서 착지 경로를 설정하며 낙하산을 펴야 했다. 결정을 내릴 시간이 오직 25초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다음 훅턴으로 다리 타워로 다이빙하는 속도를 두 배로 끌어올려 약 2cm의 강철 안전 케이블에 착지해야 한다. 케이블 위를 스치며 내려가다 발을 떼고 물 위에 있는 바지선에 착지하는 것까지가 전체 과정이다. 몇 밀리미터의 오차만 있어도 낙하산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도로 60m 위, 수면 150m 위에 있는 강철봉에 처박힐 수 있다.

그날 아침은 길조가 느껴졌다. 헬리콥터가 내는 드럼 소리를 빼고는 도시 전체가 조용했다. 위로 올라가는 동안 바지선이 바람과 조수 때문에 힘겹게 흔들리며 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순간순간 상황에 맞춰 접근하는 법을 조정해야 했다. 낙하산이 펼쳐진 후 30초 동안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오직 나와 낙하산, 그리고 아래로 펼쳐진 도시만이 있었다. 그러다 헬멧의 고도계가 삐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실행할 시간이었다. 넓은 풍경을 즐기던 나는 시야를 레이저처럼 집중하여 좁혔다.

타워 뒤쪽에서 접근하는 바람에,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목표물을 볼 수 없었다. 마침내 그 2cm짜리 케이블에 닿자 마치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소리가 났다. 마치 날카롭게 울부짖는 익룡이나 다른 차원에서 내는 트럼펫 소리 같았다. 시야 한구석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이면서 나는 그 꿈결 같은 상태에서 깨어났다. 바지선이 위치를 옮긴 상황이었다. 하마터면 착륙 지점을 놓칠 뻔했다. 나는 애써 180도 회전을 한 후 레일에서 힘차게 뛰어내렸다. 그리고 즉석에서 접근 방식을 바꿔 바지선의 중앙으로 파워 슬라이드를 했다.

스치는 시간은 아마도 4초 정도였고, 그동안 케이블 위에서 18m 정도를 달렸다. 보딩 기준으로는 기록적인 거리는 아니었다. 연습 때는 더 긴 거리를 간 적도 있었지만 거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현실로 이뤘다는 것이 중요했다.

editor SEAN EVANS


하마 한 마리가 옐도어가 탄 카누 아래에서 그녀를 공격했다.

하마 한 마리가 옐도어가 탄 카누 아래에서 그녀를 공격했다.

WHAT IT FEELS LIKE…TO BE ATTACKED BY A HIPPO

크리스틴 옐도어(Kristen Yaldor), 43세, 사파리 방문자

2018년 12월 1일.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남편 라이언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며칠간 긴 사파리 투어를 한 참이었다. 우리가 속한 투어 그룹은 잠베지강에 카누를 타러 가기로 했다. 가이드들은 우리에게 “만약 배에서 떨어진다면 가장 가까운 뭍으로 헤엄쳐가라”고 짧게 말해주었다. 라이언이 배 오른편에 하마 여러 마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노를 저어 강 가운데 쪽으로 이동했다. 수위가 얕은 시기였기 때문에 강바닥의 일부가 섬처럼 군데군데 튀어나와 있었다. 그렇게 튀어나온 한 곳에 배가 거의 닿았을 때쯤, 배 오른쪽으로 하마 한 마리의 등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마치 큰 바위 같았다. 우리는 계속해서 강둑을 향해 노를 저었다. 그때 하마가 우리가 탄 카누를 아래에서 치더니 물 위로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시 아래에서 쳐서 옆으로 엎어버렸다. 라이언은 뒤쪽으로, 나는 앞쪽으로 떨어졌다. 나는 헤엄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을 뒤로 한 번 차자마자 하마가 내 오른쪽 다리를 물고 끌어당겼다. 강한 충격을 느끼지는 않았다. 고통이나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도 받지 못했다. 그저 엄청난 압력과 아래로 끌어내려지는 느낌뿐이었다. 왼쪽 다리와 나머지 몸은 자유로운 상태였지만 어둡고 거무칙칙한 물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마의 입을 붙잡았다. 물론 그 입을 벌려 열 힘은 없었지만, 뭐라도 해야 했으니까. 하마의 피부는 꼭 미끈거리는 가죽 조각에 수염이 나 있는 느낌이었다. 결국 하마는 내 다리를 놓았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던 덕분에 나는 곧 수면으로 튀어 올라갔다. 라이언은 막 강둑에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는 가까운 바위를 향해 배영을 했다. 다른 카누에서 노를 내밀어주었고, 그걸 붙잡자 배 안의 사람들이 나를 끌어 올려주었다. 뭍으로 올라간 후에야 내 다리가 찢겨 있다는 걸 알았다. 피부와 지방의 가장 바깥층이 찢겨 나간 상태였다. 근육이 뼈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C자 모양의 큰 피부 조각이 다리 한쪽에 매달려 있었다. 피는 많이 나지 않았지만,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어쩐 일인지, 그 아래로 신고 있던 플립플롭은 그대로 발에 신겨져 있었다.

editor RYAN D’AGOSTINO


레이싱 중인 파스트라나의 차 바퀴에서 연기가 나고 있다.

레이싱 중인 파스트라나의 차 바퀴에서 연기가 나고 있다.

WHAT IT FEELS LIKE…TO CRASH A RALLY CAR

트래비스 파스트라나(Travis Pastrana), 42세, 모터스포츠 프로 선수

나는 정식으로 운전면허를 따기 전까지 10여 대의 오프로드 자동차를 몰며 많은 충돌 사고를 냈다. 그러나 미리 계산된 위험과 어리석은 행동은 다르다는 걸 깨달은 건 2005년 콜로라도 코그 랠리(Colorado Cog Rally)에서의 사고를 통해서였다.

그때 탄 자동차는 2005년식 스바루 WRX STI였다. 옆에는 보조운전자(codriver) 크리스찬 에드스트롬이 타고 있었다. 그와는 2003년 나의 첫 랠리 때부터 줄곧 파트너로 참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신인이었고, 그는 계속 나를 엄격하게 가르쳤다. 스바루 쪽에서도 “무리를 하다가 사고가 나는 것보다는 10위권 정도 안에 드는 게 우리는 차라리 더 좋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따랐다. 레이싱 첫날에는 3위를 기록했다. 1위와는 15초, 2위와는 5초 차이였다. 그리고 스바루 측은 “이제 제약 없이 우승을 목표로 삼으라”고 말해주었다.

첫 번째 구간을 7km가량 달렸을 때, 우리의 눈앞에 언덕이 보였다. 크리스찬이 경고했으나, 나는 시속 190km대의 속도로 언덕을 올랐다.

언덕 정상에 오르자 험난한 급커브가 있는 모퉁이가 보였다. 아래에서 봤을 때는 대단치 않게 보였던 것이다. 나는 안쪽 경사를 보고 순간적으로 판단해 가능한 만큼 최대한 직선으로 달렸다.

크리스찬은 결코 위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내가 “아, 망했다”라고 내뱉었을 때 상황을 파악했던 것이다. 우리는 (한편에 흙더미만 쌓여 있을 뿐이었던) 안쪽을 들이받고는 곧장 구르고, 구르고, 또 굴렀다. 격렬했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크리스찬은 가슴 위에 손을 얹어 충격에 대비하는 자세를 취했다.

다섯 바퀴째 굴렀을 때 차가 쾅, 부딪혔다. 엄청난 충돌 후 잠시 멍한 순간이 찾아왔다. 우리는 여전히 공중에 떠 있었고, 한 바퀴 반을 더 굴렀다. 세상이 조용해졌다.

차는 완전히 박살 났다. 롤 케이지는 파손됐지만, 다행히 제 역할을 했다. 우리 둘 다 전혀 다치지 않았고, 그저 어지럽기만 했다. 조용해진 세상 위로 나는 “세상에”라며 소리를 질렀다. “완전 죽여주는 경주였어. 와!”

editor SEAN EVANS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는 크로스.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는 크로스.

WHAT IT FEELS LIKE…TO SURVIVE TONGUE CANCER

매트 크로스(Matt Cross), 40세, 쇼콜라티에

혀 옆에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2024년 초에 정기 치아 세척을 받으러 갔지만 당시 치과 의사는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른 의사에게 이것에 대해 두 번이나 이야기해보았지만 괜찮다는 말만 들었다. 주치의는 단순한 혹이나 치석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해하기에는 하나의 문제가 더 있었다.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아내와 초콜릿 가게 ‘하베스트 초콜릿’을 운영하는 쇼콜라티에다. 그런데 바로 그 초콜릿의 미묘한 맛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다니던 치과에 진료 예약을 하고, 어떤 문제인지 알 수 있게 가장 최종적인 검사를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치과에서는 나를 구강외과에 연결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5월, 나는 3기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암은 림프절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7월이 되어 혀에 있는 혹과 목의 림프절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자 음식을 먹는 게 힘들었다. 나는 한 달 동안 맛을 느끼지 못했다. 다시 맛을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때쯤에는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

물에서는 짠맛이 났다. 나는 모든 음식을 퓌레로 만들어 먹었다. 다시 고형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초콜릿에서는 쓰고, 타닌이 많고, 역겨운 맛이 느껴졌다. 어떤 재료가 들어 있는지 알기는 어려웠지만, 나는 향기와 경험만을 바탕으로 어떤 맛이 날지 추측했다.

11월 말, 초콜릿을 한 입 먹고 ‘와, 정말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일찍 진단을 받았다면 수술은 할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암이 림프절까지 전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암에서 벗어났다. 이제 초콜릿을 먹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의식적으로 요소 하나하나를 감각하며 먹고 있다.

editor CHRIS HATLER


파리 프랭클린 빌딩을 오르는 랜도트의 모습.

파리 프랭클린 빌딩을 오르는 랜도트의 모습.

프랑크푸르트 트리아논 빌딩을 오르는 랜도트의 모습.

프랑크푸르트 트리아논 빌딩을 오르는 랜도트의 모습.

WHAT IT FEELS LIKE…TO FREE SOLO CLIMB A SKYSCRAPER

알렉시스 랜도트(Alexis Landot), 25세, 어번 클라이머

나는 죽음이 너무 무섭다. 암, 교통사고, 무차별적인 폭력까지. 내가 살고 있는 파리를 걸어 다니는 것이 불안하다. 그러나 그런 아이러니가 나를 멈추지는 못한다. 나는 밧줄 없이 고층빌딩을 맨손으로 오른다. 지금까지 부르즈 칼리파, 몽파르나스 타워, 라데팡스의 건물 등을 등반했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불안해하지만, 땅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높이에서 오직 손가락 끝에 의지해 매달리는 일은 다른 문제다.

등반을 시작하기 몇 분 전은 나에게 지옥 같은 시간이다. 입에서 말이 마구 튀어나오며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를 한다. 소리도 잘 들리지 않고, 터널처럼 시야가 좁아진다. 어깨와 팔은 납처럼 무거워지고, 무릎에 힘이 풀린다. 나는 빌딩을 오르기 위해 터져 나오는 모든 생존 본능을 억눌러야만 한다.

수평의 세계를 떠나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높이가 되는) 수직의 세계에 일단 발을 들이면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나의 뇌는 가상의 위험한 상황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춘다. 지금이 바로 실제로 위험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료해지는 순간에 나는 황홀한 기분을 느낀다. 불안이 사라지고 차분해지며 평화로워진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

빌딩을 오르는 동안 내 몸은 강력한 자동조종장치가 되어 움직인다. 모든 감각을 강렬하게 느낀다. 지금 피로가 쌓이고 있나? 손가락 위로 땀방울이 떨어지고 있나? 창턱이 내 몸무게 전체를 지탱할 만큼 튼튼한가? 대체로 이런 것들 외에는 다른 생각이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순수한 존재감만을 느낀다. 붙잡는다. 균형을 잡는다. 호흡을 한다. 어번 클라이밍은 내가 경험해본 행위들 중에서 명상에 가장 가깝다.

이런 흐름은 정상이 보일 때쯤 깨진다. 그 마지막 몇 미터가 가장 힘들다.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다시 다른 생각들을 하게 된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경찰들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일상적인 의식이 되돌아온다. 아주 강렬한 느낌이다.

등반을 마치면 앞서의 과정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중에 내 모습을 찍은 고프로 영상을 보고 놀라곤 한다. 마치 내 마음의 다른 부분이 나를 장악한 것 같다. 수년 동안 훈련을 해온, 어느 세 손가락을 어느 작은 난간 위에 올려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건물의 기하학 구조를 언어처럼 읽어낼 수 있는 그 부분 말이다.

비평가들은 나를 보고 무모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어번 클라이밍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스포츠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비평가들은 사실은 매일매일 자신도 알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며 살고 있다. 음주, 약물, 혹은 부주의한 운전 같은 위험 말이다.

나는 일상생활에서 매우 조심한다. 술을 마시지 않고, 건널목에서도 몇 번씩 확인한 후에 길을 건넌다.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여기에 대응하기로 했다. 무차별적이고 의미 없는 것 때문에 목숨을 잃느니,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에 내 목숨을 거는 편이 낫다.

사람들은 내가 아드레날린에 중독되었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명료함에 중독된 것이다. 땅과 하늘 사이에 매달려 있는 그 귀중하고 위태로운 시간에, 나는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안다.

나는 이미 다음 등반을 계획하고 있다.

editor SEAN EVANS


가파른 경사면을 오르는 스타지커와 팀원들의 모습.

가파른 경사면을 오르는 스타지커와 팀원들의 모습.

정상에 오르기 직전의 셀피.

정상에 오르기 직전의 셀피.

WHAT IT FEELS LIKE…TO CLIMB EVEREST IN RECORD TIME

나는 언제나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싶었다. 내가 가장 빛나는 때는 압박감을 느끼며 나의 한계에 도전하는 순간이다.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영국 특수부대원 출신들로 구성된 팀을 꾸려, 총 7일 만에 영국 런던을 출발해 에베레스트산 정상까지 갔다가 다시 런던으로 되돌아오는 원정을 계획했다.

보통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데는 8주 정도 걸린다. 산에 있는 동안 몸이 고도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적응 기간을 거치지 않을 경우에는 극심한 고산병은 물론 고고도 폐부종과 고고도 뇌수종에 걸릴 수도 있다. 고산병은 치료가 가능하지만 폐부종과 뇌수종에 걸리면 원정을 중단해야 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우리는 뇌와 폐를 보호하기 위해 신체 훈련을 하고 특별 관리를 받았다.

나는 매주 12시간씩 근력운동과 컨디셔닝 훈련을 했고, 완전히 밀폐된 저산소 텐트에서 총 600시간을 수면하며 7000m 고도에 있는 상황을 시뮬레이션했다. 출발 5주 전에는 신경 보호 작용을 하는 제논 가스를 흡입하기 위해 팀원들이 함께 독일로 갔다. 우리는 마취를 할 때처럼 수술용 마스크를 쓰고 30%의 순수 제논 가스와 70%의 산소가 섞인 기체를 흡입했다.

2025년 5월 16일, 우리는 런던에서 출발해 카타르 도하에 들렀다가 에베레스트산에 있는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바로 등반을 시작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우리는 왼쪽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눈사태가 산을 미끄러져 우리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클라이밍 하네스로 서로를 연결한 채 한 줄로 캠프 1까지 이동하는 중이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몇 번 심호흡을 한 다음 내가 안전한 자세를 잘 잡고 있는지 확인했다. 기이하게도 차분한 기분이었다. 눈사태의 힘이 우리를 바다의 파도처럼 덮쳤고, 30초가 걸려 우리를 지나갔다. 다행히도 밀려온 눈 대부분은 우리 앞에 있던 크레바스에 빠졌다. 우리는 일어나서 모두 무사한지 인원수를 확인한 후 다시 몸을 움직였다.

우리는 캠프 1에 45분 동안 머물렀다. 그러는 동안 해가 떠올랐다. 낮은 굉장히 따뜻하다. 우리는 따뜻한 날씨에 맞게 옷을 갈아입고 고도 6450m에 있는 캠프 2로 이동했다.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너 시간 정도 자보려고 했다. 하지만 고도가 높은 데다 산소마스크까지 쓴 상태이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잠은 숙면이라기보다는 휴식에 더 가까웠다.

5월 19일 새벽, 우리는 고도 7100m에 있는 캠프 3으로 향했다. 경사가 정말 많이 가팔라졌다. 우리는 한 번 더 쉰 후 고도 8000m에 이르는 캠프 4로 이동했다. 캠프 4로 가는 길은 죽음의 지대(Death Zone)라고 불린다. 캠프에 가까워졌을 때 루트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의 한 남자가 보였다. 죽은 지 12시간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캠프 4는 정상에 오르기 전 마지막 캠프다. 마치 달처럼, 세찬 바람이 불어 황량한 곳이다. 이곳에서 대여섯 시간을 쉰 후, 5월 20일 저녁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날씨가 아주 좋았다. 그러다 사우스 콜(South Col)에 도착하자 시속 80km의 강풍과 영하 40℃의 추위가 몰아쳤다. 기상이 악화되자 동반한 셰르파 여덟 명 중 네 명이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는 계속 나아가 5월 21일 9시에 정상에 도착했다.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30분간 머물며 사진을 찍고, 서로 포옹하고, 축하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망할, 아직 반밖에 안 왔구나.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가장 위험한 부분은 내려오는 길이다.

우리는 거의 16시간 내내 걸어서 캠프 2까지 갔다. 그곳에서 네 시간을 쉬고 그날 밤에 이어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 하산하여 5월 22일 베이스캠프로 돌아와 집으로 향했다.

이번 등정이 내가 했던 일들 중 가장 힘든 경험은 아니었다. 군인 시절 이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경험들도 했지만, 이번 에베레스트 등정은 굉장한 성공이었다.

editor STINSON CARTER


태평양을 건넌 후 하와이 해안 가까이에 접근하고 있는 데루모.

태평양을 건넌 후 하와이 해안 가까이에 접근하고 있는 데루모.

WHAT IT FEELS LIKE…TO CROSS THE OCEAN BY KAYAK

시릴 데루모(Cyril Derreumaux), 49세, 카약으로 바다를 건넌 사람

카약으로 대양을 건넌 사례는 단 다섯 번뿐이다. 내가 그 다섯 번째로, 그중에서도 두 종류의 대양을 건넌 것은 내가 처음이다. 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넜다.

바다 위에서의 내 하루는 보통 이렇게 흘러갔다. 해가 뜨기 30분 전쯤 눈을 뜬다. 수면에 아주 가깝게 떠 있기 때문에, 어떤 작은 파도가 와도 내가 앉아 있는 조종석을 덮칠 수 있다. 그날 먹을 음식(총 4000kcal의 동결 건조 식품)을 준비한 후, 가민 인리치(Garmin InReach) 위성통신장치로 날씨와 바람의 세기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그날 입을 옷을 정한다. 해가 뜨면 더블 블레이드 패들을 물에 넣고 젓기 시작한다.

나는 계속해서 장애물이 있는지 주시한다. 고래가 배를 밀어버릴 수도 있다. 언제든 다른 배, 혹은 다른 배에서 떨어진 컨테이너에 부딪힐 수도 있다. 이 모든 작업을 하루 종일 하면서 건강도 챙기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정오에 한 시간 정도 휴식 시간을 갖는다. 이때는 선실 안에서 쉰다. 아주 작은 1인용 텐트인데, 거의 관과 같은 모양이다. 다리를 꼬고 앉으면 고개가 앞으로 수그려진다. 담수화 장치를 작동시켜 해수를 식수로 만들어 먹는다. 이 장치는 하루에 내게 필요한 섭취량인 3.7L의 물을 만들어낸다. 이 작업을 끝내면 다시 다섯 시간 동안 노를 젓는다. 가끔 한두 시간 더 젓기도 한다. 그런 다음 긴장을 풀고 쉬는 시간을 갖는다. 다시 선실로 들어가 몸에 묻은 소금기를 씻어낸다.

해가 지면 한 시간에 한 번씩 깨서 플로터를 확인한다. AIS(Automatic Identification System, 자동 인식 시스템)라고 불리는 장비가 내 위치를 다른 배들에 전송해준다.

내 몸은 항상 젖어 있다. 편안한 순간은 없다. 하지만 나는 매일매일 몇 달을, 혹은 대양을 횡단하는 데 필요한 시간만큼 계속해서 나의 한계를 밀어붙이고 또 밀어붙인다.

editor STINSON CARTER


모르몬교 교회 내부.

모르몬교 교회 내부.

브렛 에반스와 그의 파트너.

브렛 에반스와 그의 파트너.

WHAT IT FEELS LIKE…TO BE GAY IN THE MORMON CHURCH

브렛 에반스(Brett Evans), 36세, 전 모르몬교 신자

1850년, 고조부가 처음 모르몬교로 개종한 후 우리 가족은 줄곧 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신자였다. 그리고 그 다섯 번째 세대에 내가 태어났다. 진로는 분명히 정해져 있었다. 선교 사역을 하고, 교회를 섬기고, 신앙을 따라 사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내가 게이라는 것이었다.

동성애에 대한 모르몬교의 입장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미묘하다. 동성에게 끌리는 것 자체는 죄가 되지 않지만 동성 간의 성관계는 죄가 된다. 게이이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 다만 모르몬교 신자로 남기 위해서는 성관계를 할 수 없다. 영원히 말이다.

열여덟 살이 되자 다니던 교회 주교와 내가 어떤 사역을 하게 될지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는 주교에게 내가 게이라고, 또 포르노를 보고 자위행위를 한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주교와 나는 내가 나의 생각과 행위를 더 잘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사역을 미루기로 결정했다. 나는 선교를 떠나는 대신 브리검영대학교 하와이 캠퍼스에 등록했고, 이후 아이다호 캠퍼스로 옮겼다.

인터넷에서 나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모르몬교 게이 신자들의 커뮤니티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다른 게이 신자 한 명과 가상 연애를 시작했다. 우리는 감정적으로 매우 가까웠으며, 섹스팅도 자주 했다. 하지만 죄책감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 왔고, 나는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 남자는 몇 달 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이다호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맞았다. 나는 학교 윤리 담당 부서에 불려갔다. 그곳의 관리자는 먼저 나의 배경에 대해 물었고, 누군가가 내가 인터넷에서 나눈 대화와 인터넷에서 맺었던 관계에 대해 신고했다고 알려주었다. 관리자는 “네가 누군가와 성적인 동영상을 주고받은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4학기 정학 처분을 받았다. 인터넷에서 교제했던 그 남자에게 연락했다. 일주일 후 그에게서는 이런 답 메일이 왔다. “네가 나한테 그런 것처럼 나도 널 똑같이 비참하게 만들고 싶었어.”

부모님은 분노했다. 나에게가 아니라, 학교의 처분에 분노했다. 엄마가 나를 옹호하자 학교 관리자는 나의 개인 메시지에서 성적인 부분을 뽑아 엄마에게 읽어주었다. 모르몬교 신자인 엄마에게 아들의 적나라한 사생활 이야기는 몹시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엄마는 그 일을 통해 학교가 아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힘들 것을 각오하고 캘리포니아로 이사해 취업했다. 계속 게이이자 모르몬교 신자로 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정직하게 교회를 다녀 보기로 했다.

내 인생에서 동성애와 관련된 모든 것을 없애버릴지 고민했다. 만약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심리 상담을 받고 모르몬 신앙 생활에 온전히 헌신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러다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만약 교회가 틀린 거라면?

그 생각은 내가 그동안 줄곧 찾고 싶었던 영적인 확신을 주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부모님에게 전화해 교회를 떠나겠다고 말씀드렸다. 신자로 살기 위해 애썼다고도 말씀드렸다. 그때 엄마의 답이 아직도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우리 집 식탁에는 언제나 네 자리가 있을 거야. 집에 오는 건 언제나 환영이야. 네가 사랑하는 사람도 누구든 마찬가지로 환영할 거야.”

우리 가족은 지금도 매년 크리스마스 예배에 함께 간다. 여러 세대 동안 우리 가족을 형성해온 신앙을 생각해서 내가 양보한 단 한 가지가 크리스마스 예배다. 하지만 교회 명단에서 내 이름을 삭제하지 않았다. 이름을 지우려면 서류도 복잡하고 많은 회의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더 이상 내가 노력을 들일 가치가 없는 단체였다. 교회는 내가 어쩌다 동성애자일 뿐인, 착한 모르몬교 신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나는 어쩌다 모르몬교 신자였던, 온전한 인격을 갖춘 한 사람이 되고 싶다.

editor SEAN EVANS


160km가 넘는 코스를 뛰고 있는 포스킨.

160km가 넘는 코스를 뛰고 있는 포스킨.

WHAT IT FEELS LIKE…TO RUN A HUNDRED MILE RACE

코디 포스킨(Cody Poskin), 23세, 울트라 마라토너

레이스는 오전 8시에 시작됐다. 그늘이나 나무가 전혀 없는 코스였지만, 기온이 영상 10℃를 조금 넘는 정도였기 때문에 처음 네 시간 동안은 그저 즐겁게 달렸다. 아픈 곳도 없었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앞으로 남은 48km는 곧 굉장히 힘들어질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1분에 230m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달렸다.

지금까지 뛰었던 ‘100마일(약 160km)’ 레이스는 모두 어려운 지형에서 열렸었다. 하지만 이번 레이스는 네바다주 헨더슨의 호수 주변을 도는 약 1.9km 도로에서 진행됐다. 나는 몇 바퀴에 한 번씩 구호품을 지급하는 곳에 멈춰 탄수화물을 보충해줄 달콤하고 소화가 잘되는 젤 간식과 얼음물을 챙겼다.

이런 레이스에는 굴곡이 있다. 약 48km에서 96km까지의 중간 구간을 달릴 때에는 기온이 27℃ 정도까지 올라갔다.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바람까지 불면서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졌다. 아직도 반나절을 더 달려야 했기 때문에, 구호품 지급소에 멈춰 서 얼굴에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뿌렸다. 그 시점에서는 손에서 젤을 내려놓지 못했고, 저 아래쪽 신체 부위가 심하게 쓸리는 느낌도 받았다. 나는 차츰 포기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00km 가까이 달렸을 때, 내 순위가 4등이라는 말을 들었다. 어쩌면 앞으로 다섯 시간 동안 시상대 자리를 두고 경쟁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뭔가를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약간의 활력도 되찾았다. 그러다 해가 지면서 기온이 떨어졌다. 112km쯤 갔을 때 누군가가 “셔츠가 너무 예뻐요!”라고 소리쳤고, 그 말에 나는 정신적인 추진력도 얻었다.

2위 주자와의 격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나는 1분에 약 200m를 달리는 낮은 페이스를 유지하다가 거리가 줄어들면서 2위 주자를 따돌렸다. 8바퀴, 7바퀴, 줄어드는 바퀴 수를 세어 나갔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는 동안 쭉 페이스를 유지했다. 결국 나는 활짝 웃으며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기록은 13시간 26분 3초였다.

다음 날, 쓸림이 너무 심했던 탓에 나는 뒤뚱뒤뚱 걸어 다녔다. 팔다리도 후들거렸지만, 느리게 3km를 뛰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얼마 후에 그날 1위를 차지했던 참가자가 실격 처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덕분에 내가 1위로 승격되었지만, 나의 주요 목표 중 하나인, 1위만 끊을 수 있는 결승 테이프를 끊는 것은 하지 못했다. 어쩌면 다음번에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레이스는 고비사막을 통과하는 400km 경주다.

editor CHRIS HATLER


그라카의 TCL 폴더폰.

그라카의 TCL 폴더폰.

WHAT IT FEELS LIKE…TO GIVE UP YOUR SMARTPHONE

일리아스 그라카(Elias Graca), 28세, 법학 전공 학생

부정적인 글을 중독적으로 클릭하며 어두운 인터넷의 늪에 빠졌다거나, 뭐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법대 기말시험 기간, 나는 아이폰에서 소셜미디어 앱들을 삭제하고도 몇 시간 동안이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다. 수업 준비를 위해 책에 집중하려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휴대폰을 켜고 열 개도 넘는 알림을 확인했다.

그리고 안 쓰는 폴더폰을 갖고 있던 형제가 내게 그 물건을 주었다. TCL의 기본 폴더폰이었다. 그런 물건을 쓴다는 건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컴퓨터로 음악 파일을 올렸고, 어딘가 갈 때에는 움직이기 전에 미리 이동 경로를 확인했으며, 책과 똑딱이 카메라를 따로 챙겨 다녔다. 문자를 주고받는 속도는 느리긴 해도 할 만했지만, 친구들에게 전화해달라고 말하는 건 마치 전보를 보내달라고 말하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전화가 걸려오면 우리는 예전보다 더 효율적이고 의미 있는 대화를 했다.

공공장소에서 볼 것이 없어지자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기차에서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한 번씩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우리가 전자기기에 얼마나 파묻혀 사는지 인지하게 됐다. 모두가 문을 향해 서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홀로 벽을 보고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대사회는 우리가 스마트폰 없이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식당의 QR 코드 메뉴를 봐야 하고, 2단계 본인 인증까지 해야 한다. 나는 속보를 몇 분 후가 아닌 몇 시간 후에야 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강박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하던 때가 그립지는 않다. 실제로 울리지 않은 진동을 느끼고, 알고리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그때가 말이다. 폴더폰을 사용한 덕에 나는 지루함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는 지루함 속에서 살아야 한다. →

editor SEAN EVANS

Credit

  • EDITOR Sean Evans
  • Ryan D’agostino
  • Chris Hatler
  • Stinson Carter
  • PHOTO ⓒJavier Fernandez Sanchez
  • ⒸGetty Images
  • ⓒLat Images/Getty Image
  • ⓒMatt Cross
  • ⓒAlexis Landot
  • ⓒAnthony Stazicker
  • ⓒMission: Everest Thrudark
  • ⓒCyril Derreumaux
  • ⓒGeorge Frey/Getty Images
  • ⓒDillon Phommasa
  • ⓒCody Poskin
  • ⓒElias Graca
  • TRANSLATOR 박수진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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