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왜 쉬는가
'쉬었음 청년'이라는 자조 뒤에 숨은 이야기들을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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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토론대회에서 만나 친해진 동생에게 오랜만에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요즘 뭐 하고 지내냐니 잠깐 뜸을 들이다 답하더라. “그냥 살죠, 뭐.”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대학은 가지 않은 채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던 것만 알았는데, 그사이 중소기업도 두 곳 거쳤단다. 조금 더 캐묻자 요즘은 밤마다 PC방에 나가 게임 아이템을 현금으로 바꾸는, 이른바 ‘쌀먹’으로 산단다. 잘 풀리면 한 달에 칠팔십만원. 근로계약서도, 4대 보험도, 어디 가서 떳떳하게 댈 직함도 없는 벌이다. 그러니 통계청 조사원이 “지난주에 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라고 물어도 그 애가 내놓을 답은 사실상 정해져 있다. 게임으로 푼돈을 만졌다고 설명할 길도, 마음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그 애는 조사표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 곧 ‘쉬었음’으로 분류될 것이 빤하다.
나는 지금 일하기 싫어하는 청년 하나의 핑계를 옮기는 게 아니다. 지난해 일도 구직도 하지 않은 것으로 잡힌 20·30대가 처음으로 70만 명을 넘었다. 71만7000명, 2003년 통계 작성 이래 가장 큰 규모다. 20대도 40만을 넘겼고, 한창 일할 나이인 30대의 ‘쉬었음’ 역시 30만을 넘겨 역대 최대를 찍었다. 같은 해 고용률이 역대 최고였던 건 일자리가 늘어서가 아니라 저출생으로 일할 나이의 인구가 더 빨리 줄어든 탓이다. 분모가 작아지면 분수는 커진다. ‘역대 최고 고용률’과 ‘역대 최대 쉬었음’은 모순되는 두 뉴스가 아니라 같은 그래프의 앞뒷면이다.
이 숫자가 입길에 오르던 무렵 개그맨 장동민 씨가 한 예능에서 기름을 부었다. 청년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떠난다는 이야기의 진위를 가리는 자리에서, 그는 한국에 일자리가 없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잘라 말했다. 공고를 내봐야 지원자라곤 사오십대뿐이고 “이삼십대는 씨가 말랐다”는 것이다. 일리가 없진 않다. 사람을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는 중소기업과 식당, 공장은 도처에 널렸으니까. 그런데 발언이 숏폼을 타고 퍼지자 누군가 그가 대표로 있는 회사의 채용 공고를 들춰냈다. 일흔 건이 넘는 공고가 죄다 경력직만 찾고 신입 자리는 하나도 없었다. 프랜차이즈와 스타트업을 굴리는 사장조차 ‘처음’인 사람의 자리는 비워두지 않은 것이다. 뉴스의 진위를 가리겠다던 사람이 본의 아니게 가장 정직한 뉴스 한 줄을 손수 제공한 꼴이다.
그동안 대기업은 한꺼번에 신입을 뽑던 공채를 접고 필요할 때 경력자를 데려오는 수시채용으로 옮겨갔고, 좋은 일자리의 문턱은 그만큼 높아졌다. 청년들도 일찌감치 눈을 낮춘다. 요즘 애들 눈이 높다는 핀잔이 무색하게, 한국은행 보고서에서 ‘쉬었음’ 청년이 최소한 받겠다고 부른 임금은 평균 3100만원으로 지금 일하는 청년들의 대답(3200만원)과 거의 같았다. 가고 싶은 회사로는 절반 가까이가 중소기업을 꼽았고, 대기업은 다섯 중 하나도 되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제대로 된 취업’이라 취급하는 대기업과 공기업, 혹은 공무원 시험 등을 통과하는 청년은 열에 한둘뿐이다. 나머지 여덟아홉은 애초에 중소·중견기업으로, 배달이나 대리 같은 플랫폼 노동으로, 자영업으로 흩어진다. 다수가 걷는 길이 실은 ‘표준’인데도, 우리 언어는 소수의 좁은 문만 비추고 흩어지는 나머지를 예외처럼 다룬다. 문제는 그렇게 흘러드는 중소기업마저 이제 신입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경력직만 찾는 회사가 장동민 씨의 회사 하나일 리 없다. 위는 빗장을 걸고 아래는 사다리를 치웠으니, 첫발을 디딜 데가 없다. 12년 전 유병재가 “다들 경력직만 뽑으면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느냐”고 외쳤던 농담은 끝내 농담으로 늙지 못하고 이제는 더 예리하게 벼려진 날로 살아남았다. 이쯤 되면 슬슬 구직이라는 행위 자체에서 김이 새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가하게 노는 것도 아니다. 한 실태조사에서 ‘쉬었음’ 청년의 77%가 제 처지를 불안해했다. 한 달 생활비는 평균 90만원, 셋 중 하나는 빚을 졌고 그 가장 큰 사유가 생활비였다. 못 살 정도, 그러니까 말 그대로 연명을 중단할 정도는 아니라지만 한가한 백수의 가계부라 하기엔 빠듯하다. 그렇게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어쩌다 ‘쉰다’는 말로 자신을 갈음하게 됐을까. 한 연구자가 ‘쉬었음’ 청년들을 인터뷰하려 명단을 받아 만나보니, 막상 입을 연 이들은 명단과 딴판이었다고 한다. 누구는 알바를 뛰었고, 누구는 띄엄띄엄 이력서를 넣었으며, 누구는 진로 고민으로 머리가 터지는 중이었다. 가끔 공고를 들여다보는 일은 본인 기준에 ‘구직’이 아니고, 앞날을 궁리하는 시간은 ‘취업 준비’로 쳐주지 않으니 남는 답은 ‘쉬었음’뿐이다. 몇 년 전이라면 “아, 그게…. 취업 준비 중인데…” 하고 말을 늘였을 사람들이 이제는 “그냥… 쉬어요” 한마디로 갈음한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청년들은 2010년대 내내 시끄러웠다. 한편으로는 ‘헬조선’을 욕하고 수저 색깔을 따지고 ‘노오력’을 비웃으며 ‘죽창’을 외쳤지만, 그렇게 목청을 높여도 문은 더 좁아지고 신입 자리는 더 줄었다.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을 문제 삼는 이야기도 이제 구태의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떠들어도 안 듣고 들어줘도 안 바뀐다는 걸 학습한 사람에게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일은 피곤하기만 할 뿐 남는 게 없는 장사다. 이런 상황에서 ‘쉬었어요’는 패배의 고백이라기보다, 더는 설명에 드는 비용을 치르지 않겠다는 결정에 가깝다.
일을 대하는 마음도 그사이 한 뼘 내려앉았다. 몇 해 전부터는 ‘조용한 퇴사’라는 말이 돌았는데, 사표는 내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며 받는 만큼만 일하고 그 이상으로는 마음을 주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영혼 없는 표정으로 멘트를 읊어 ‘소울리스좌’라 불린 놀이공원 직원이 사랑받은 것도 같은 정서다. 받는 돈만큼만, 그러나 그만큼은 정확히. 잘 산다는 게 한때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는 일이었다면, 위로 오르기도 제자리를 지키기도 버거워진 지금은 그저 오늘 하루를 건사하는 일로 눈금이 내려왔다. ‘쉬었음’ 청년이 일자리를 고를 때 임금만큼이나 ‘일과 삶의 균형’을 따지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다. 앞서 언급한 연구자의 인터뷰에서 한 청년은 좀 쉬고 싶어 쉰다며, 인생에서 쉼이 얼마나 중요한지 거꾸로 되물었다고 한다. 쉬는 것처럼 보이는 청년이 실은 자신의 삶과 세상에 관해 골똘한 상태일 때가 많다.
우리만의 풍경도 아니다. 중국 청년들은 그냥 드러눕겠다는 ‘탕핑(躺平)’을 읊다, 부모 집에 얹혀 집안일을 거들고 용돈을 받는 ‘전업자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었다. 일본에는 더 오래된 말들이 있다. 구직을 접은 ‘니트(NEET)’, 부모에게 얹혀사는 ‘파라사이트 싱글’, 알바로 연명하는 ‘프리터’. 니트는 영국 정부가 만든 건조한 행정 용어인 반면, 미국은 한때 실업을 ‘노는 실업(funemployment)’이라는 농담으로 불렀다. 같은 처지라도 어떤 사회는 낙인의 이름을, 어떤 사회는 농담의 이름을 쥐여준다. 한국의 ‘쉬었음’은 그 사이 어디쯤이다.
먼저 통계 위의 ‘쉬었음’이 덮고 있는 저마다 딴판인 사정을 마음을 주고 두루 봐야 한다. PC방을 전전하는 동생이 한쪽 끝이라면, 다른 끝에는 집에 받쳐주는 게 있어 돈에 쪼들리진 않지만 면접에서 거듭 미끄러진 뒤로 사람 만나는 일 자체가 큰일이 되어버린 친구가 있다. 약속을 한 번, 두 번 미루다 보니 어느새 현관 밖이 통째로 두려워졌고, 요즘은 일하는 게 무섭다고까지 한다. 그의 사정을 숫자로 표현해 통계로 낸다면 ‘여유로워 쉬는 청년’으로 읽히겠지만, 그래서는 정작 그를 괴롭히는 것이 빈 통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눈을 맞추는 일이라는 사실을 구별해내지 못한다. 또 한 친구는 지방의 한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졸업하던 해 생성형 AI가 제 전공의 일감을 통째로 빨아들이는 광경을 지켜봤다. 몇 년 배운 기술이 반년 만에 헐값이 되자 구직 의욕이 바닥났고, 지금은 남자친구의 벌이에 기댄단다. 처지가 이토록 다른 셋이 설문지 앞에서는 똑같은 한 칸에 모인다. 이름표 하나가 세 개의 삶을 납작하게 눌러버린다.
그렇다고 청년들이 그 이름을 마냥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반발하자니 마뜩잖고, 수긍하자니 마땅찮은, 시대가 쥐어준 미취업 상태의 마음을 ‘쉬었음’으로 묘사하는 데 어떤 괴리를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택하는 길이 거리감을 즐기는 쪽이다. 그 처지를 행정 용어로 부르는 순간 생기는, 살짝 붕 뜬 거리감 말이다. ‘청년’ 필자들이 지면에서 정색하며 반박에 열을 올리는 동안, 정작 커뮤니티나 또래 단톡방에선 “ㅋㅋ 나 이제 쉬었음 청년”이라며 가볍게 자조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보이는 이유다. 이 자조는 이따금 부모의 목소리까지 빌린다. 지난겨울부터 인스타그램을 타고 번진 ‘아빠도 이제 한계다’라는 장문의 글이 그 절정이다. 다 큰 백수 자식에 지친 아버지가 짐 싸서 나가라고 설움을 토해내는 내용인데, 정작 이 글을 짓고 퍼 나르며 낄낄대는 것도 청년들 자신이다.
물론 이런 농담 뒤에는, 청년의 ‘쉼’을, 자취방 월세를, 생활비를, 밥상을 묵묵히 떠받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농담이 아닌 사정이 있다. 부모의 떠받침에도 끝은 있다. 그러나 가벼운 풍자든 서늘한 자조이든, 청년이 제 처지를 입에 올리는 통로는 한결같다. ‘쉬었음’이라는 행정 용어도 아버지의 호통도 타인의 목소리이긴 마찬가지다. 미취업이라는 제 상황을 제 언어로는 도무지 말하지 못하니, 남의 말에 얹어 풍자로나마 간신히 소화하는 셈이다. 변호할 언어도, 정면으로 부인할 언어도 없고, ‘긁혀서’ 반발하거나 구구절절 변명해봐야 입만 아프다. 아빠도 이제 한계라지만, 정작 짐을 싸야 하는 청년도 오래전부터 같은 문장을 속으로 삼켜왔는지 모른다. 다만 청년은 그 긴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 ‘그냥 살죠, 뭐’ 하고 멋쩍게 웃을 따름이다. 그러니 이력서 왜 안 넣냐고 그만 묻자. 청년도 이제 한계다.
장민욱은 사회학을 공부하고 글을 쓴다. 세상과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단기 아르바이트와 일용직을 전전하며 만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동시대 청년들의 내밀한 여정에 관심을 가진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장민욱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MONTHLY CEL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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