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게리가 다시 쓴 도시의 이야기
빌바오와 엘치에고 그리고 아를에 있는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건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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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바오와 구겐하임 그리고 프랭크 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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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에 불시착한 외계 우주선처럼 보이는 구겐하임 빌바오 뮤지엄의 모습. 왼쪽에 있는 다리에 설치된 붉은 조형물은 다니엘 뷔랑의 작품이다. © Erika Ede / FMGB, Guggenheim Museum Bilbao
네르비온강이 흐르는 빌바오는 정말 작은 도시다. 네르비온 강둑을 따라 양쪽으로 넓게 펼쳐진 보드워크가 도심의 서쪽 끝인 빌바오 해양 박물관부터 동쪽 끝인 유럽 최대의 신선식품 시장 메르카도 델라 리베라까지 두 번 크게 꺾이며 펼쳐지는데, 그 길이를 다 더해 봤자 4km가 채 안 된다. 네르비온 강가 ‘주비주리’(하얀 다리라는 뜻)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푸니쿨라(케이블카라고 하기엔 케이블이 아니라 철로를 달린다)를 타고 아르찬다 언덕 전망대로 올라가면, 한눈에 모든 시내가 다 들어오는데, 눈을 감아도 또렷이 떠오르는 특별한 구조물이 있다. 바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과 미술관 앞에 우뚝 선 타워, 그리고 타워와 구겐하임 뮤지엄 사이를 지나가는 ‘라 살베 다리’와 이 다리에 세워진 다니엘 뷔랑의 작품 ‘붉은 아치’다. 네모반듯한 옛날 건물들로 가득 찬 빌바오 시가지 속에서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과 그에 조응하는 건축물들은 외계 문명의 선물처럼 빛난다.
실제로 빌바오 구겐하임(1991–1997)은 이 도시가 받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비록 외계인이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구겐하임 뮤지엄은 한 건축물이 도시 전체를 부활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20세기 후반 건축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빌바오는 탈산업화의 직격탄을 맞은 쇠락한 항구도시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한민국과 일본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철강 및 조선 산업의 가파른 성장으로 세계적인 철강과 선박의 생산 능력은 수요를 한참 초과했고, 빌바오 지역 산업의 노후화된 구조와 석유파동까지 겹치며 몰락이 시작됐다. 도시 산업의 근간을 지탱하던 조선소와 제철소가 무너지면서 1979년부터 1985년 사이 빌바오 대도시권 안에 있는 산업 일자리의 약 25%가 사라졌고, 네르비온강은 공장 폐수로 오염되었으며, 바스크의 독립을 주장하는 분리주의 무장단체 ‘ETA’(Euskadi Ta Askatasuna) 테러까지 벌어져 도시 전체가 깊은 우울에 잠겨 있었다.
바스크 주정부는 문화·관광·서비스 쪽으로 산업의 축을 옮기기 위한 절박한 전략을 세웠고, 그 전략의 첫 미사일이 구겐하임 미술관의 유치였다. 막대한 자원이 투입됐다. 1991년부터 1997년 완공까지 건물과 조경에 투입된 돈은 유로가 없던 시절 스페인 통화로 약 190억 페세타, 대략 1억 달러라 ‘1억 달러 미술관’으로 불렸다.
프랭크 게리 아트리움의 모습. 곡선을 띠며 꺾이는 하얀색 벽의 형태가 마치 거대한 고래의 뼈대 같다. © Erika Ede / FMGB, Guggenheim Museum Bilbao
건축 이후의 변화는 통계가 증언한다. 개관 첫해(1997년 10월~1998년 10월) 방문객은 약 130만 명으로 당초 예상치인 40만 명의 세 배를 웃돌았고, 그해 미술관이 유발한 총 경제효과는 바스크 지역 전체 GDP의 약 0.5%(약 1억4400만 유로)에 달했다. 첫 3년 동안 약 400만 명이 이 스페인 북부 도시로 몰려들어 약 5억 유로의 경제활동을 일으켰으며,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빌바오 공항을 확장해야 했다.
직접 보면, 그것은 건축물이라기보다 물 밖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생명체처럼 보인다. 3만3000장의 티타늄 패널로 뒤덮여 있는 몸체는 햇살이 내리쬐는 각도에 따라, 또는 비가 오는 날이나 안개가 끼는 날이면 더욱 신비롭게 다채로운 색으로 빛난다. 스테인리스 등의 광채를 띤 은빛이 아니라 무광의 놋그릇처럼 빛나는 그 오묘한 색감은 눈으로 봐야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외관만큼 대단한 것은 그 안에 있는 구조들이다. 뮤지엄 안에서 가장 큰 공간인 프랭크 게리 아트리움에 들어서면 마치 고래의 갈비뼈 속이나 거대한 성당의 내부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진다. 흰색 골격을 이루는 뼈대들이 뻥 뚫린 아트리움의 공동을 휘돌아 천장에 닿아 있고, 유리와 석재, 티타늄의 곡선이 50m 높이까지 치솟으며 방문객을 건물의 심장부로 끌어당긴다. 건물이 지어질 때부터 이 장소를 위해 제작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대표작 ‘더 매터 오브 타임’(The Matter of Time)이 놓인 아르셀로르 갤러리에는 처음엔 단 하나의 작품뿐이었으나, 이제는 여덟 점의 거대한 강철 조각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처음에 이 갤러리에 상설 전시되던 작품은 지금 우리가 ‘스네이크’라고 부르는 작품이에요. 자세히 보면 저 작품만 바닥에 고정되어 있지요.” 내가 미술관을 찾은 날 가이드해 준 로라 디에즈 가르시아가 말했다. “나머지 작품들은 그 거대한 무게를 지닌 자체로 균형을 맞추고 있어요. 대단하지요.”
다만 이 ‘빌바오 효과’의 진실은 흔히 말하는 것보다는 복잡하다. 전문가들이 거듭 강조하듯, 구겐하임은 당시 빌바오를 재생하려던 행정 당국과 시민들의 노력, 교통·공공 공간·인프라를 아우르는 수십 년에 걸친 종합 계획의 한 톱니바퀴였을 뿐이다. 구겐하임 미술관 건립 이후 빌바오는 쇠퇴한 공장·조선소 부지를 정비해 주거·상업·문화 공간으로 전환하고, 네르비온강의 수질을 개선하고 수변을 정비했다. 또한 지하철, 트램, 공항 등 교통 인프라를 확충하고, 세계적 건축가들이 참여한 공공건축 프로젝트를 유치해 도시 이미지를 혁신했다. 게리 자신은 오히려 이 신화를 경계했다. 그는 ‘빌바오 효과’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건물은 게리를 세계적 명사로 만들었으나, 쇠퇴하는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여러 도시들이 너도 나도 기념비적인 건물을 모방하는 게으른 트렌드를 낳았다. 이 수많은 도시들이 아이코닉한 건축에만 집착하다 실패한 것은, 빌바오의 성공이 건물 하나가 아니라 완결된 도시계획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눈뜨고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 그리고 엘치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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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하게 일렁이는 부드러운 곡선들이 리오하의 뜨거운 태양 아래 보석처럼 빛난다. © Adolfo Rancaño
대부분 실패로 끝난 수많은 빌바오의 변주 중에 가장 성공적이고 흥미로운 모델은 ‘리오하’의 작은 마을 엘치에고에 지어진 ‘마르케스 데 리스칼 호텔’이다. 건축 이전의 엘치에고는 리오하에 있는 인구 1000명 안팎의 흔한 와인 마을이었다. 차를 몰고 다니다 보면 아로(Haro, 인구 1만5000만)나 로그로뇨(Logroño, 인구 15만)처럼 인구가 많은 소형 도시들 사이로 인구가 2000명 미만인 라과르디아(Laguardia), 브리오네스(Briones) 등의 중형 마을, 그리고 인구가 1000명 이하인 정말 작은 마을들이 있다. 재밌는 건 이 마을들이 대부분 비슷한 형태를 갖는다는 것. 가장 높은 곳에 보통 교회가 있고 교회 근처에 광장이 있으며 이 광장을 중심으로 수많은 바가 자리 잡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인 ‘엘치에고’(Elciego)는 인구가 1000명이 간신히 넘는 중형 마을이다.
돌로 지은 중세 가옥들(내가 본 바로는 신식 가옥은 단 한 채도 없었다)과 16세기에 건립된 산 안드레아스 교회의 종탑이 정적을 지키는 이 작은 농업 공동체의 자랑은 1858년 설립된 리오하 알라베사의 유서 깊은 와이너리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었다.
이 마르케스 데 리스칼 와이너리가 지은 마르케스 데 리스칼 호텔은 단순한 와이너리의 확장 프로젝트가 아니라, 1990년대 후반 스페인 와인산업이 경험한 구조적 전환의 결과물이다. 1858년 설립된 전통 와이너리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1990년대 후반부터 ‘와인을 생산하는 공장’이 아닌 ‘와인을 경험하는 공간’으로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치우다드 델 비노’(Ciudad del Vino, 와인 도시) 구상이다. 생산시설을 넘어 호텔과 미식, 관광, 문화가 결합된 복합 브랜드 공간으로 확장하겠다는 야망이었다. 전환의 핵심은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리스칼 측은 1998년 전후부터 외부 건축가를 물색했고, 당시 이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프랭크 게리(Frank Gehry)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구겐하임의 티타늄들이 무광으로 은밀하게 네르비온 강물에 비친 햇살을 반사하는 것과 달리, 티타늄과 스테인리스가 혼합된 마르케스 데 리스칼의 외피는 리오하의 강렬한 빛을 직접적으로 반사해 거대한 포도밭과 중세 도시를 배경으로 마치 하나의 보석처럼 홀로 빛난다. 리오하 와인의 붉은빛을 닮은 분홍 티타늄, 코르크를 감싸는 포일을 떠올리게 하는 은색 스테인리스강, 마르케스 데 리스칼 병을 장식하는 황금빛 그물이 연상되는 금색 채광판이 리오하의 변화하는 빛에 반응한다. 호텔에서는 산 안드레아스 교회의 종탑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데, 반대로 산 안드레아스 교회에 서면 마르케스 데 리스칼 호텔이 신이 사는 궁전처럼 빛난다.
이 호텔은 약 10만㎡에 이르는 ‘와인 도시’라는 거대한 와인 복합단지의 중심으로, 저마다 형태가 다른 객실들과 미셰린 레스토랑, 포도를 이용한 ‘와인 테라피’ 스파, 와인 라이브러리와 와인숍을 품고 있다. ‘와인의 대성당’으로도 불리는 이 건물은 매일 수백 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며 1858년 이래 거의 변하지 않았던 와이너리와 주변 지역을 되살렸다. “엘치에고의 인구는 1000명이에요. 그런데 이 작은 마을에 바가 8개나 있지요.” 8개의 바 중 하나인 비노테카 베리에서 만난 바텐더가 말했다. 호텔 개장 직전인 2005년까지 와이너리 방문객은 연간 5000명 수준에 불과했으나, 호텔 개장 이후 이 수는 급속도로 늘어 2017년에는 연간 방문객 10만 명을 넘어섰다. “마을 사람들을 빼면 대부분이 마르케스 데 리스칼을 방문한 뒤에 찾아오는 사람들이에요.” 바텐더의 말이다.
아를 그리고 아를 루마(LU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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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도시 아를의 랜드스케이프 위로 우뚝 솟은 아를 루마 타워의 모습. © Adrian Deweerdt
루마가 세워지기 전, 아를은 화가 한 사람 덕에 살아가는 도시였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 파리를 떠나 이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에 1년 남짓 머물렀다. 이 1년, 남프랑스의 햇살을 관찰하던 시기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폭발적인 창작기가 될 줄이야. 그는 아를에서 ‘해바라기’ ‘밤의 카페 테라스’ ‘노란 집’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같은 대표작을 포함해 200점이 넘는 유화와 100점이 넘는 드로잉·수채화를 쏟아냈다. 역설적이게도 정작 아를에는 그의 진품이 한 점도 없다. 2024년 여름 오르세 미술관에서 잠시 대여한 작품이 전시된 정도가 전부다. 그럼에도 도시 곳곳에는 그가 그림을 그렸다는 자리마다 청동 이젤과 복제화가 놓여 있고, 관광객들은 화가의 시선을 좇는 재미를 따라 도시를 순례한다.
그러나 엽서 같은 풍경 뒤에는 경제적 고민이 있었다. 인구는 코뮌 기준 약 5만2000명, 광역권으로 묶어도 5만4000명 안팎에서 10여 년째 정체되어 있었으며, 고용권역의 실업률은 2010년대 전반 내내 상승세를 그리더니 2015년 6월 무렵에는 11%대 중반까지 치솟았다. 주민 1인당 평균 소득(약 2만60유로)은 전국 평균(약 2만590유로)보다 살짝 낮았지만, 주민의 약 20.9%는 빈곤선 아래에 머물렀고, 이는 전국 평균(약 14%, 7명 중 1명)을 크게 웃돌았다. 관광이 도시 경제의 큰 축이지만 여름 성수기에 치우쳐 있어, 한 해의 절반은 활기가 가라앉는 계절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루마(LUMA)가 들어선 자리는 도시의 또 다른 얼굴, 버려진 산업 부지였다. 파리-리옹-지중해를 잇는 철도회사(후의 SNCF)가 증기기관차를 제작·수리하던 약 11헥타르의 파르크 데 자틀리에는 이 회사가 떠난 뒤인 1986년부터 방치되어 있었다. 변화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컬렉터이자 후원자인 마야 호프만이었다. 그는 프랭크 게리의 다학제적 접근, 새로운 건축과 도시의 기존 조직을 통합하는 능력에 매료되어 2007년 부지 재생과 타워의 설계를 맡겼다. 호프만에게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미술관이 아니라, 예술·생태·연구가 교차하는 학제 간 창작 캠퍼스를 만드는 일이었다.
타워는 부지의 다른 건물들과 유기적으로 발전하며 완성되었다. 철도회사가 버리고 떠난, 19세기에 세워진 거대한 산업 건물 일곱 채 가운데 네 채를 복원했으며, 미스트랄 바람(프랑스 남부에 부는 서늘하고 매서운 바람)을 완화하고 여름 기온을 낮추는 미기후 정원을 조성했다. 그 중심에 1만1000개의 스테인리스강 벽돌로 프로방스의 빛을 반사하는 56m 높이의 게리 타워가 솟았다. 폐허로 남았던 옛 기관차 수리 부지는 연중 개방되는 창작의 캠퍼스로 다시 태어났다.
2021년 루마가 개장한 이후, 도시의 시간표는 바뀌기 시작했다. 여름에 열리는 사진 축제에 몰렸다가 썰물처럼 빠지던 관광객들이 남긴 허전함은 한 해 내내 루마를 찾는 방문객들 덕에 채워질 수 있었다. 약 150명의 고용을 창출한 루마는 인구 5만 명, 전국 평균을 웃도는 실업률에 시달려온 도시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물론 논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로마 시대의 원형경기장이 있는 고대 도시의 외곽에 마치 로켓처럼 솟은 금속 타워를 두고 비판은 여전하다. 그러나 한 세기 넘게 과거를 팔아 살아온 도시는 지금도 동시대 예술의 현장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
Credit
- PHOTO 구겐하임 빌바오 뮤지엄
- 아를 루마(LUMA)
- 마르케스 데 리스칼 호텔 제공
- ART DESIGNER 최지훈
MONTHLY CEL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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