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흥의 시대
」
영화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피닉스가 실제로 겪은 이야기다.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브레이크 오작동이었으나 언론은 피닉스가 급제동을 걸었을 때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했다고 말한다.
사고로부터 5일 후인 2006년 1월 31일, 피닉스는 영화 <앙코르>에서 맡은 전설적 가수 조니 캐시 역할로 오스카 후보에 올랐다. 평생 컨트리음악을 부르긴커녕 들어본 적도 없던 그는 영화에서 직접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유명 영화평론가이자 조니 캐시의 열성 팬인 로저 에버트는 영화 속 배우의 목소리와 실제 음악가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없었다는 후기를 남겼다. 피닉스는 가수의 억양뿐 아니라 그의 사소한 버릇까지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서른 살의 배우가, 거친 목소리와 낡은 기타를 가진 늙은이로 기억되는 한 음악가의 숨겨진 운명을 파악해 그 젊은 날을 재현한 것이다. 영화감독 제임스 맨골드는 이렇게 표현했다. “호아킨은 조니 캐시를 연기한 게 아니었어요. 그는 조니 캐시 그 자체였죠.”
공연한 미사여구가 아니다. 피닉스는 정말로 스스로를 조니 캐시라 인식했고, 이상하게도 그것이 제 옷을 입은 듯 꼭 맞게 느껴졌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후에는 역할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문제는 이 과정이 고통스러운 금단증상을 수반했다는 것이다. 피닉스는 캐시가 그랬듯 쉴 새 없이 술을 마셨고 결국 2005년 4월 처음으로 재활 클리닉에 갔다. 역시나 조니 캐시처럼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그 후 몇 달간 그는 익명의 알코올중독자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이 경험에 대해 피닉스는 ‘내 생애 일어난 일 중 가장 좋았던 일’이라 말한다. 동료들의 시각은 좀 달랐다. 재활 이후로 피닉스는 더 심한 은둔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서른 무렵에 그는 영화를 많이 찍지 않으면서도 사소한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노련한 아티스트가 되었다. “저는 연기를 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경험에서 뭔가를 끌어낼 필요가 없죠.” 피닉스가 말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삶을 산 사람이 경험에서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호아킨 피닉스는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에서 조커 역할을 맡았다. ⓒ Niko Tavernise / ⓒ 2019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
클럽을 벗어난 얼마 뒤(아마도 경비들이 내쫓았을 것이다) 리버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그는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 경련을 일으켰다. 리프와 레인이 그에게 달려갔다. 리버의 동공이 파래졌다. 리프는 911에 전화를 걸어 최대한 빨리 와달라고 울부짖었다. 레인은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마침 클럽에서 밴드 P는 ‘마이클 스타이프(Michael Stipe)’라는 곡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리버 피닉스는 내일 여정을 떠날 것이다”라는 가사가 쓰인 노래였다. 응급차가 도착했을 때 리버는 이미 숨을 쉬지 않는 상태였고 어떤 소생술도 무의미했다. 오전 1시 51분. 시더스-사이나이(Cedars-Sinai) 병원 의료진은 리버의 사망을 확인했다. 더 바이퍼 룸은 그 후 며칠 동안 문을 닫았다. 그리고 2004년 매각되기 전까지 11년을 운영하는 동안 매해 10월 31일에는 영업을 쉬었다. 리버 피닉스의 사망일을 추모한 것이다.
리프 피닉스는 영화계를 떠났다가 1년 후에야 돌아왔다. ‘호아킨’이라는 본명으로. 그가 형의 죽음 앞에서 911에 걸었던 전화는 대중에 널리 퍼졌다. “전화 녹음본이 온갖 라디오와 텔레비전 채널에 보내졌어요.” 후일 호아킨은 회상했다. “사람들은 리버가 관 속에 있는 모습까지 사진을 찍더군요. 히스테리에 휩싸인 소녀 팬들은 거의 무덤 속으로 넘어질 뻔했고요. 구역질이 났죠. 제가 그 충격에서 빠져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의 목소리 녹음본은 유튜브에 올라 오늘날까지도 떠돌고 있다.
나이 19세에 호아킨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과 연예계의 몰인정한 민낯을 동시에 마주했다. “가까운 사람을 잃으면, 당신은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붙잡으려 노력하게 될 겁니다. 정말 힘들었고 지금까지도 제 마음속의 상처로 남은 건, 그들이 제게서 리버와 관련한 기억을 빼앗고 자기들 것처럼 전용했다는 거예요. 기억을 오롯이 혼자 간직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던 거죠.” 한 인터뷰에서 호아킨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장례식장에서 그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 제가 알았다면, 아마 지금쯤 저는 그 인간의 모든 걸 털어버린 죄로 감옥에 앉아 있을 겁니다.”

1989년 1월 28일 제46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 등장한 리버 피닉스.
부모의 선택에 대해 호아킨 피닉스는 한층 유한 태도를 취한다. “부모님은 정말로 자신이 속할 사람들을 찾았다고 믿었어요.” 청년이 된 후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들을 찾았다. 15살 때 중앙아메리카 여행을 가서 그 모든 곳을 돌아다닌 것이다. 리버와 호아킨의 부모는 결국 ‘신의 아이들’에 실망하고 1978년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플로리다로 향하는 장난감 운송 선박을 타고 도망쳤다. 고국에서 그들은 가족의 새 시작을 강조하며 서류상의 성씨를 바꿨다. ‘피닉스’로. 또한 그들은 비건이 되기로 결심했으며 호아킨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기를 먹지 않는다.
호아킨은 침대가 하나뿐인 비좁은 단칸방에 온 가족이 함께 살던 시절을 기억한다.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집주인이 찾아올 때마다 세탁기 뒤로 숨어야 했다. 가끔씩은 거기서 몇 시간을 버티기도 했다. 돈 몇 푼을 벌고자 아이들은 거리에서 노래도 불렀다. 다행히 그들의 삶은 조금씩 나아졌다. 엄마는 NBC 방송국에 비서로 취직했고 아버지의 수입에도 변화가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전직 무용수이자 할리우드 아역 배우 전문 에이전트로 일하는 아이리스 버튼을 알게 되었다. 호아킨의 어머니는 계약 조건을 제시했다. 무조건 다섯 아이 모두와 계약할 것. 아이리스 버튼은 놀랍게도 선선히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녀는 숨겨진 두 번째 조건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들 모두 비건이었고 이는 제안 받는 광고의 절반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후에 호아킨은 계약이 몰염치했다고 회상했다. “우리가 그 계약 내용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죠. 아무튼 우리는 육류와 관련된 광고는 모두 제외하기로 했어요. 거만하거나 바보거나, 둘 중 하나였죠.” 당연히 맥도날드 광고도 찍을 수 없었다. 패스트푸드 브랜드의 TV 광고를 찍는 것은 당시 아역 연기자가 커리어를 쌓는 데에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난관들은 버튼의 흥미를 돋울 뿐이었다. 그녀는 피닉스 가족의 관점을 받아들였고, 첫째인 리버 피닉스를 슈퍼마켓 광고에 등장시켰다. 곧 그는 다양한 TV 프로그램으로 진출했다. 리버 피닉스는 동생들뿐 아니라 온 가족을 이끌었다. 그는 위계질서가 있던 사이비 종교 밖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가장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리버와 호아킨은 아버지를 또 다른 형처럼 여겼다. 호아킨이 의존한 건 리버였다. “저는 형이 얼마나 유명한지 상상하지 못했어요. 저희 집 텔레비전은 PBS(공영방송 서비스, 엔터테인먼트와 가장 거리가 먼 채널) 단 한 개의 채널만 나왔고 형은 유명인처럼 구는 법이 없었으니까요. 저는 영화 프리미어 행사에도 가지 않았으니 제게 형은 평행 세계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던 셈이죠.”

어머니 알린, 형 리버와 함께 거리에 나선 14살의 호아킨.
형제들이 조금씩 자라면서 리버는 확신했다. 가족 중 진정한 연기자는 호아킨 하나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조만간 할리우드도 그 사실을 알아차릴 거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그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후일 가족들이 이야기하기로, 피닉스 형제는 서로를 질투하는 법이 없었다. “형과 저는 우리가 늙어서 50세가 되면 어떨지, 그때가 되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뤘을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아직 어렸는데도 그런 공상은 정말 기분이 좋았죠. 함께 노년을 맞는다는 공상 말이에요.”
1986년 호아킨 피닉스는 모험적인 어린이 영화 <스페이스 캠프>를 찍었다. 그가 로봇과 친구가 되고 별들로 향하는 줄거리의 영화였다. 작품은 흥행에 실패했다. 그리고 아마 이 작품이 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비판한 유일한 호아킨 피닉스의 영화일 것이다. 로저 에버트는 호아킨 피닉스를 현대의 가장 주요한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꼽은 바 있지만 그건 한참 후의 일이다.
같은 해 리버 피닉스의 영화 <스탠 바이 미>가 개봉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남자아이들이 실종된 친구의 시체를 찾아 떠나는 청소년 드라마였다. 작품은 평론가들의 호평과 박스오피스 히트를 동시에 거머쥐었고 리버 피닉스는 단숨에 스타가 됐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브랜드로 발전시키고자 했으며 염원대로 피닉스 가족은 할리우드의 새로운 명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채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막을 내렸지만 말이다.
할리우드는 한 가족을 사랑하기도 파괴하기도 한다. 무수한 아티스트 가문이 그곳에서 태어나고 사라졌다. 폰다(Fonda), 배리모어(Barrymore), 신(Sheen)…. 할리우드가 친족들을 싸우게 만들고 나면 그들은 성씨를 바꾸거나(니컬러스 케이지가 본래의 성 ‘코폴라’를 버린 것처럼), 연을 끊고(마이클 더글러스와 그의 아버지 커크 더글러스가 더 이상 대화하지 않는 것처럼), 간혹 영화계를 떠나기도 한다(브리짓 폰다처럼). 매컬리 컬킨의 부모는 다른 자식인 로리와 키런도 배우로 키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이혼을 결정하자 거대한 소송이 뒤따랐다. 부모 모두 직업이 자식들의 매니저였기 때문에 법정에서 아이들을 꼼꼼히 나누고 싶어 했던 것이다.
호아킨 피닉스 가족은 약 30년을 함께했지만 할리우드는 그들 역시 손쉽게 처리했다. 리버티는 1986년에 연기를 그만뒀다. 레인은 계속 영화계를 기웃거렸으나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는 데에 실패했다. 리버는 1993년에 사망했다. 아들의 사망 이후 알린은 그의 죽음을 체르노빌 사고에 비유하며 리버 피닉스 평화 구축 센터를 설립했다. 그리고 1997년에 남편과 이혼했다.

ⓒ CHRIS PIZZELLO
피닉스는 역할에 녹아들곤 했다. 그가 조니 캐시 연기로 얻은 고충은 단순한 알코올중독이 아니었다. 더 광범위한 문제, 작품을 마친 그가 실제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저는 연기할 때 제 인생을 던져두죠.” 그의 지인은 피닉스가 스스로를 지루하게 여기고, 그래서 캐릭터 자체가 되는 것을 선호한다고 증언했다. 그걸 ‘편해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어떤 역할도 피닉스에게는 불안감으로 시작되었다. “저는 연기할 때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의상 겨드랑이 쪽에 안감을 덧대야만 하죠. 제겐 불안감을 빼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저는 그 불안감을 사랑하죠.”
호아킨 피닉스는 지금껏 세 번 영화계를 떠났다. 1980년대 말, 형의 죽음 이후, 그리고 2000년대 말 래퍼로 전직하기 위해 연기를 은퇴한다고 밝혔을 때. 사실 마지막 은퇴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당시 그는 토크쇼인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출연했다. 무성한 턱수염에 선글라스를 낀 채로. 긴장한 듯 껌을 씹으며 연신 뭔가를 중얼거렸고, 단 한 개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랩과 그를 둘러싼 모든 게 거짓으로 밝혀진 건 1년이나 지나서였다. 모큐멘터리 <아임 스틸 히어>를 찍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그 영화를 찍은 감독은 케이시 애플렉이다. 2000년대 중반 애플렉은 마치 호아킨의 동생이 된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가족이 되긴 했다. 호아킨의 여동생 서머 피닉스가 애플렉과 결혼했으니까. 호아킨 피닉스와 케이시 애플렉은 파티에서 늘 함께였고 뉴욕에 둘만이 지낼 복층 아파트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들의 관계가 위태로워진 건 미투 운동이 시작된 후였다. 애플렉의 성추행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고 몇 건의 고소도 뒤따랐다. 심지어 그중 몇몇 사건에 호아킨 피닉스가 연루되어 있다는 증거도 나왔다. 호아킨 피닉스와 케이시 애플렉은 함께 섹스 파티를 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머 피닉스는 케이시 애플렉을 떠났고, 호아킨 피닉스 역시 가까이 지내봐야 좋을 게 없다고 여겼던지 그와 연을 끊었다.
호아킨 피닉스의 복귀작은 세계대전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며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남자를 그린 영화 <마스터>였다. 이 영화로 그는 2013년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결국 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긴 건 2017년 칸 영화제였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 선보인, 또 다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진 참전 용사 연기로. 작년에는 <돈 워리>가 개봉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 그를 긴 휴식에서 끄집어내준 구스 반 산트와 다시 힘을 합친 작품이었다.
당대의 빼어난 배우 중에서도 호아킨 피닉스는 조커라는 캐릭터를 맡기에 최적의 배우다. 일찍이 트라우마를 얻고, 가난을 겪고, 부를 거머쥐기도 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가 하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스크린에 등장하는 남자. 호아킨 피닉스는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
호아킨의 생명을 구한 거장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조크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기 안의 악마들을 처리하는 게 좋을 것이다.” 글쎄. 그의 말이 틀린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