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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을 담은 영화, <1917>
로저 디킨스는 샘 멘데스로부터 받은 대본의 첫 장을 보고 잠시 눈을 의심했다. “원테이크로 촬영된, 실시간 상황처럼 보이도록 계획된 이야기”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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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이 뛴다
」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을 담은 영화, <1917>
<1917>은 제목 그대로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을 비추는 영화다. 보다 정확하게는 4월 6일부터 7일까지 1박 2일간의 서사를 다루는데 이야기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멀리 떨어진 아군 부대의 작전을 중단시키기 위해 사령관의 명령서를 들고 먼 길을 떠나는 두 군인에 관한 이야기다. 두 사람의 발에 영국군 1600여 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 위장 퇴각 후 후방의 화력까지 끌어모아 영국군을 유인해서 일망타진하겠다는 독일군의 전술에 관한 첩보를 받은 영국군 사령부에서는 아군의 희생을 막기 위해 공격을 중단할 것을 명령한다. 문제는 독일군으로 인해 통신선이 끊어진 탓에 직접 명령 서신을 보내 지시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두 군인은 당장 내일 오전에 이뤄질 공격을 막기 위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을 경계하면서도 민첩하게 아군의 진지를 찾아가야만 한다. 다만 블레이크에게는 개인적으로도 간절한 일이었다. 독일군에게 몰살당할지 모를 1600명 중에 형이 속해 있는 것. 주저할 이유가 없는 블레이크와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스코필드는 그렇게 길을 떠난다.
그렇다. <1917>은 그렇게 길을 떠나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그 이후는 그 길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연속으로 점철돼 있다. 이야기 자체로만 보자면 대단히 특별할 거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를 좀처럼 평범하게 볼 수 없게 만드는 건 그 여정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남다른 영화적 형식성에 있다. 카메라를 눈에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1917>은 단 한 번 눈을 깜빡이는 영화다. 2시간여의 러닝타임이 단 두 신으로 구분된 영화처럼 보인다. 단 한 번, 명확하게 스크린이 암전되는 상황을 제외하면 컷 자체가 없다. 거대한 두 개의 원테이크 신으로 이뤄진 영화라는 말이다. 물론 2시간짜리 영화를 단 두 번의 컷으로 촬영했을 리는 없다. 올해 <1917>로 오스카 촬영상을 수상한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는 65일간의 <1917> 촬영 기간에 가장 길게 촬영한 쇼트가 7분가량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실제로 가장 길게 이어진 촬영 쇼트는 8분 30초에 불과했고, 가장 짧은 쇼트는 39초가량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1917>은 한땀 한땀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마술적인 편집 기술을 통해 완성된 영화인 셈이다. 물론 거대한 원테이크 쇼트 편집을 위한 전제 조건은 동선을 촘촘하게 이어나가는 촬영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을 담은 영화, <1917>
로저 디킨스는 샘 멘데스로부터 받은 대본의 첫 장을 보고 잠시 눈을 의심했다. “원테이크로 촬영된, 실시간 상황처럼 보이도록 계획된 이야기”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로저 디킨스는 샘 멘데스로부터 받은 대본의 첫 장을 보고 잠시 눈을 의심했다. “원테이크로 촬영된, 실시간 상황처럼 보이도록 계획된 이야기”라는 문구가 적힌 대본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화 한 편을 온전히 원테이크 신으로 촬영하겠다는 황당한 계획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일찍이 앨프리드 히치콕의 <로프>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 같은 영화가 제시한 것처럼 정교한 촬영술과 기막힌 편집술로 컷 전환이 없는, 하나의 시퀀스로 구성된 듯한 ‘원 컨티뉴어스 숏(one continuous shot)’ 영화를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납득했다. 샘 멘데스의 <007 스펙터> 오프닝 시퀀스를 원테이크 신으로 완성시킨 경험이 있었던 만큼 불가능한 작업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동시에 그것이 단순히 기술적인 도전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했다. 이러한 방식의 촬영이 결과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드는지 납득했다. 물론 촬영은 만만치 않았다. 단순히 카메라의 무빙에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연극판을 만들고, 정교한 동선을 구성하고, 배우들과 모든 스태프가 일사불란하게 정해진 합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작업이었다. 배우들과 6개월간 리허설을 하고, 전쟁터에 버금가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반경 1.6km가 넘는 참호를 파고, 촬영에 적합한 카메라 장치를 개발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1917>은 영화라는 예술의 연극적인 원형에 접근하는 작업이면서도 가장 진화한 최신의 영상 기술을 극단적으로 동원한, 영화의 과거와 현재가 함께 반영된 작품이란 점에서 흥미로운 결과물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감정적인 선택이었다. 나는 이 남자들과 모든 여정을 함께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이 필요했다. 결국 그 경험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제작 방식이 필요했다.” 샘 멘데스가 단 하나의 쇼트로 연결된 영화를 구상하게 된 건 단순히 기술적 성과를 과시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평온한 휴식을 취하던 두 군인이 전선의 경계를 넘어 언제 대면할지 알 수 없는 적의 존재를 살피며 전장의 한복판을 돌파하는 과정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이끌거나 따라잡는 카메라의 시선은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을 없애고 관객을 영화 속 인물과 동일한 위치로 끌고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객석에 앉아 있는 이상 좋든 싫든 스크린 너머의 전쟁터 한복판을 함께 헤쳐나가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1917>은 1인칭 시점의 게임과도 같은 체험처럼 다가오는 측면도 있지만 그것은 결코 전쟁의 긴장감을 전하는 카타르시스로 휘발되지 않는다. 타나토스의 경계를 뛰어넘는 생의 감각으로 선명해진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을 담은 영화, <1917>
더욱 흥미로운 건 <1917>이 샘 멘데스가 처음 각본가로 이름을 올린 영화이자 그의 사적인 경험과깊게 연관되었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직전에 ‘왕립근위보병대 1대대 앨프리드 H. 멘데스 일병’에게 바치는 헌사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이는 샘 멘데스의 할아버지다. 17세의 나이로 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다는 할아버지는 70대가 되어서야 전쟁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경험은 <1917>을 구상하는 방아쇠가 됐다. 다만 할아버지의 경험을 재현하는 영화를 만들자는 목표를 품게 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영화라는 장르로 간과되는 전쟁이라는 비극 자체를 온전히 환기시키는 체험이 되길 원했다”는 샘 멘데스의 말은 이 작품의 지향점이 상영관을 넘어선 근원적인 경험이자 성찰로 다가가길 원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1917>의 결말은 한층 더 비범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대단원이라 할 수 있는 질주 시퀀스는 가까스로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목적지에 당도한 한 인간이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로 들어서는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뒤바꾸겠다는 의지의 역주이기에 그것을 본다는 것 자체로 영혼의 울림이 전해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끝에서 결국 살아남은 이가 할 수 있는 건 또 다른 산 자를 위로하는 것임을 깨닫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결국 전쟁이란 누군가에게 형제를 잃어버리는 일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품에 안고 있던 가족의 사진을 꺼내 보게 만드는 일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전쟁이란 총알처럼 날아드는 죽음과 상실을 견디고 살아남아 서로를 위로하는 인간의 역사였다는 것을 끝내 체감하게 만든다.
들판에서 시작해서 들판에서 끝나는 <1917>의 여정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오디세우스는 힘겨운 고난과 싸우고 역경을 이겨낸 끝에 고향에 도착한다. 오래된 서사시와 최신의 영화가 지닌 정서가 남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건 결국 수많은 세월이 지나고 수없이 변화가 찾아와도 감동의 원형은 결국 뿌리 깊은 나무처럼 그곳에 서 있는 것임을 깨닫게 만든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근본적인 노스탤지어, 그러니까 우정, 사랑, 가족, 희생, 헌신 같은 단어 앞에서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이야기는 언제나 위대하다. <1917>은 그런 근본적인 감정들을 감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실로 비범하다.
Credit
- EDITOR 김은희
- WRITER 민용준
- WEB DESIGNER 이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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