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irector’s Cut
」
펜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와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이런 낭만적인 경험 덕분일까. 실비아는 영화라는 매체에 큰 매력을 느꼈다. 물론 패션 플랫폼으로서의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 그녀의 조부모 에도아르도 펜디와 아델 펜디도 영화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1925년에 펜디를 설립했고, 1965년에는 당시 유망한 디자이너였던 칼 라거펠트를 잽싸게 채용해서 로마제국의 큰 패션 하우스로 변화를 시도했다. 펜디는 더 이상 모피와 가죽 제품만 만드는 회사가 아니었다. 곧 펜디 부부는 영화계의 중요한 작품에 의상을 협찬하며 페데리코 펠리니와 루키노 비스콘티 같은 영화계 거장들과 친분을 쌓았다. 펜디와 영화계의 긴밀한 관계가 시작된 시점이다.
실비아는 영화감독 역시 디자이너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취향과 비전이 있고 까다로운 디테일을 고집하는 부분에서 말이다. “어머니가 비스콘티의 〈폭력과 열정〉(버트 랭카스터가 출연한 1974년 작) 작업을 도울 때였어요. 침실 신이 있었는데, 장면 내내 벽장 문이 닫혀 있는데도 비스콘티는 벽장 안에 리넨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 우겼다고 했어요. 왜냐고요? 그 장면에서 배우가 꼭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죠. 그렇지 않다면 배우가 상황과 캐릭터에 온전히 빠져들지 못하고 잘못된 영향을 받을 거라는 우려와 강박과 예민한 디테일이랄까요.”
그로부터 40년 이상 훌쩍 지난 지금, 실비아는 패션계의 큰 세력자다. 2000년부터 펜디의 남성복을 책임지고 있는 그녀는 2020 S/S 컬렉션에서 이탈리아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와 협업했다. 루카는 2017년 발표한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작품상을 포함한 아카데미 4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티모시 샬라메와 아미 해머의 연기는 게이와 스트레이트 할 거 없이 감동을 줬다.
루카와 실비아는 오래전부터 돈독한 관계다. 2005년 펜디는 루카에게 짧은 프로모션 필름 〈퍼스트 선〉의 제작을 의뢰했고, 실비아는 이 작품을 몹시 좋아했다. 패션쇼 캣워크 대신 루카의 영화를 상영할 정도로 말이다. 이를 계기로 다른 프로젝트들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틸다 스윈튼이 밀라노에 사는 부유한 중산층 부인을 연기한 〈아이 엠 러브〉(2011),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1977년 호러 고전 리메이크작, 다코타 존슨 주연의 〈서스페리아〉(2018)에 참여한 것이다. 펜디 가문의 방식대로 실비아는 루카의 영화에 의상을 협찬했다. 심지어 어머니의 보석까지 동원했다. 루카가 특정 시대의 보석이 꼭 필요하다고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비스콘티처럼 광적인 면이 있어요. 모든 게 정확하고 확실해야 한다니까요.” 실비아의 말이다.

재킷 1690달러, 셔츠 1290달러, 팬츠 990달러, 로퍼 890달러, 스트로 해트 650달러, 양말 190달러 모두 펜디.

셔츠 790달러, 팬츠 790달러, 스니커즈 790달러, 벨트 420달러, 네크리스 690달러 모두 펜디.
컬렉션은 베이지, 그린, 브라운 컬러로 가득하다. 데님, 면, 가죽 등 농장에 있을 것 같은 소재가 있는가 하면 실크, 스웨이드, 캐시미어 등 호화로운 소재도 있다. 흙바닥에 들어갈 때, 콩을 수확할 때, 나비를 잡을 때 입을 법한 작업복용 소재도 있다. 하지만 온전히 시골풍, 목가적인 가치만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도시에 갈 때 입을 근사한 옷도 있다. 가벼운 슈트, 악어가죽 프린트 로퍼, 아프리카풍 패턴 실크 셔츠(루카가 직접 디자인했다)도 있고 나무 손잡이가 달린 우산도 있다. 교양 있는 신사 농부라면 가드닝 부츠를 신고 사교 행사에 가진 않을 테니까.
실비아와 루카가 함께 있는 모습은 묘한 광경이었다. 키가 180cm를 훌쩍 넘는 루카와, 작은 키와 희끗한 머리의 실비아가 서 있으면 거의 황후와 라스푸틴 같았다. 하지만 로마 시내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펜디 본사에서 에스프레소를 함께 마셨을 때는 불현듯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상대가 할 말을 대신 해줄 정도였다.
“저는 루카가 미학과 비전 사이의 균형을 잘 잡는다는 게 무척 좋아요. 그리고 쉽게 싫증 내고 변덕이 심한 저와는 다르게 루카는 꾸준하죠.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는 몇 년이고 기다리며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이에요.” 실비아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영화 대본을 집필하는 것과 비슷해요. 제가 의뢰를 받아 집이나 가게, 이런 켈렉션을 구상할 때면 클라이언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를 알아야 해요. 그리고 그걸 공간이나 옷으로 표현하는 거죠. 직관적일 수도 있지만 제겐 이 방식 말고는 없어요.” 루카의 말이다.
어쩌면 이번 협업의 대본은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떠올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무더운 이탈리아의 여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는 과수원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널찍한 집, 그런 장면들이 나왔다.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넷플릭스 시리즈와 마블 프랜차이즈 시대에 꽤 드문 관능과 대담함이 담긴 영화였다고 루카에게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루카가 반박했다. “제 의견이 모든 분석과 반대 입장일 수 있지만 영화는 언제나 놀랍다고 믿어요. 예를 들어 〈조커〉를 보세요. 그건 캐릭터, 제작자의 스토리텔링, 그가 고른 배우의 연기의 공간 안에 존재하는 영화예요. 디지털 이펙트도 없죠. 전혀 없죠. 하지만 10억 달러를 벌어들인걸요. 제가 어렸을 때도 사람들은 ‘영화는 죽었다’고 습관처럼 말했죠. 그럼에도 우린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 즐기고 있잖아요. 모든 영화는 위대해요. 패션도 비슷하고요.”
미국인들이 빅데이터 분석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있을 때, 이 두 이탈리아인은 작은 트라토리아에서 키안티 와인을 마시며 보석과 담배, 대리석 계단을 두고 한참을 떠들었다. 낭만적인 로마의 어느 날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