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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 워치 42년. 10년 후, 20년 후가 더 기대되는 이유

에르메스 시계엔 고유한 언어가 있다.

BYESQUIRE2020.10.06
 

ORIGINALITY 

 
에르메스는 42년 전부터 시계를 만들었다. 역사로만 따지면 당연히 브레게나 블랑팡 같은 브랜드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에르메스는 시계에 대한 독특한 철학과 방향성을 보여준다. 애초 에르메스가 패션과 컬트 오브제 사이에 있는 기발한 제품으로 유명한 브랜드였음을 떠올린다면 그리 놀라운 얘기는 아니다. “우리에겐 시간 역시 오브제입니다.” 라 몽트르 에르메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필리프 델로탈이 말한다. “우리는 시간을 쪼개고 통제하기보단 조금 다른 종류의 시간을 탐구하고자 합니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짬과 같은 시간 말입니다.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난 시계야말로 에르메스가 추구하는 바입니다.”
 
에르메스 워치는 확실히 다른 브랜드의 시계와 다르다. 오트 올로제리의 세계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때론 유머러스하거나 위트가 넘치는 지점이 분명 에르메스엔 있다. 시계 광고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현대적 건축물 사이를 떠다니고, 또 다른 사람은 그림자 속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나타난다. 독특한 개성은 시계 디자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시계 H 아워는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H 형태 케이스 안에 네모난 다이얼이 있고, 표면은 거울 같은 반사광을 내뿜는다. 반대로 까레 아쉬는 정사각형 케이스 안에 동그란 다이얼을 얹어 나침반과 추를 떠올리게 한다. 또 케이프 코드 그랑 아워는 불규칙적인 인덱스 배치로 특정한 시간대가 빠르게 혹은 느리게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에르메스는 이런 독창적인 시계로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를 네 번이나 수상했다. 진지한 자세로 워치메이킹에 도전한 결과다. 에르메스의 또 다른 차별점은 스트랩에 있다. 가죽 제품으로 워낙 이름 높은 브랜드이다 보니 품질이나 만듦새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 보통 질 좋은 송아지 가죽이나 선명한 색감의 악어가죽을 쓰며 스트랩 하나를 완성하는 데 4시간 넘게 걸리기도 한다.
 
 
“기존에 없는 시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데서 이미 보여준 것을 흉내 내거나 다시 만들기 위해 워치메이킹을 시작한 게 아니니까요.” 시계 아틀리에에서 만난 라 몽트르 에르메스의 CEO 로랑 도르데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로 이 일을 즐기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시계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과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본 적 없는 새로운 형태, 아주 차별화된 디자인을 만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땐 동종 업계 사람을 채용하기 마련이다. 시계 비즈니스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에르메스는 상식을 깨며 타이를 디자인하던 앙리 도리니와 가구를 디자인하던 마르크 베르티에를 워치메이킹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CEO인 도르데 본인도 시계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는 것. 그는 이전까지 에르메스의 가방 파트를 이끌었다. 리스크가 큰 결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전략은 성공이었다.
 
“가방 시장과 비교해보면 시계는 참 어려운 분야였습니다. 가방 쪽에서는 우리가 리더여도 시계 분야에선 신출내기 도전자니까요. 세일즈도 마케팅도 결코 쉽지 않았죠.” 도르데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어찌 보면 에르메스가 42년 전부터 시계 시장에 발을 들였다는 말은 틀린 얘기일 수도 있다. 사실 1900년대부터 시계를 판매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예거 르쿨트르나 파텍 필립이 만든 시계에 에르메스 로고를 찍어 팔았다. 1978년 장루이 뒤마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브랜드의 수장을 맡으면서 라 몽트르 에르메스를 설립하고 브랜드의 전략 역시 달라졌다. 초창기 매뉴팩처에서는 여성용 쿼츠 시계를 만들었다. 디자인은 파리에서, 생산은 스위스 비엘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럭셔리 기계식 시계의 부활이 절정에 달하자 에르메스는 더 좋은 시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2006년 무브먼트 제조사 보셰 매뉴팩처에 2000만 파운드를 투자하고, 다이얼과 케이스 등 각종 부품 공급 회사를 계속 사들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리고 현재는 에르메스와 다른 회사들 간의 완벽한 수직적 통합이 이뤄졌다. “제대로 시계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투자할 것이 엄청 많았습니다. 일단 시계 관련 기업들을 사들이고 그다음엔 설비를 현대화해야 했어요.”
 
 
프랑스 국경을 넘어 스위스에 있는 스트랩 공방을 찾았다. 해당 부서를 이끄는 이사벨 리비에르는 수십 종의 가죽이 보관된 방을 먼저 소개했다. 적당한 온도가 유지되는 방에서 그녀는 어떻게 가죽의 품질을 유지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에르메스의 기준에 맞춰 스트랩을 제작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했다. 워크숍에서는 13명의 장인이 가죽을 자르고 연마하고 꿰고 염색하며, 손수 더블 스티칭 작업을 진행한 스트랩에 H 도장을 찍고 가죽 표면에 광을 낸다. 에르메스의 마구를 만드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워치 스트랩을 제작하는 것이다.
 
2015년 시계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신제품이 등장했다. 바로 애플 워치다. 이 시계는 에르메스의 까레 아쉬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이는 애플의 최고 디자인 책임자였던 조너선 아이브도 지적한 사실이다. 애플 워치의 디자인도 물론 훌륭하지만 시계 전문가들은 까레 아쉬의 완성도가 좀 더 높다고 입을 모은다. 그 차이는 손목에 맞게 완만하게 휘어진 케이스 같은 디테일에서 확연히 드러난다(물론 애플 워치는 스마트 센서를 작동시키기 위해 뒷면을 평평하게 처리한 것이지만). 결국 에르메스와 애플은 몇 해 전 함께 손잡고 에르메스 애플 워치를 만들었다. “우리의 협업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진행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윈-윈 제품이었다고 할 수 있죠.”
  
에르메스에서 시계는 아직 작은 사업 부문이다. 규모로 따지자면 전체의 3%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은 조바심 내지 않는다. 가족 기업의 장점을 살려 원하는 제품을 만들고 장기전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에르메스 시계를 알지는 못해도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에르메스 시계를 알고 있다. 세세한 것까지 트집 잡는 시계 저널리스트, 시상식 심사위원 같은 업계 사람들 역시 에르메스가 뭔가 다른 것, ‘에르메스다운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반응도 매우 긍정적이다. 마케팅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거다. 전문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면 대중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수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시계 브랜드와 비교하면 분명 라 몽트르 에르메스의 역사는 짧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이뤘다. 에르메스 시계의 10년 후, 20년 후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유명한 저널리스트 데이나 토마스는 자신의 책 〈럭셔리: 그 유혹과 사치의 비밀〉에서 하이엔드 패션 하우스를 면밀히 해부했다. 이 책에 따르면 18세기 또는 19세기에 세워진 거대 기업들은 프랑스 궁정에서 쓸 고급 제품 생산에 집중했고, 그 이후엔 유럽 귀족을 고객으로 삼았다. 하지만 당시 장인이 손수 만든 공예품은 대량생산에 밀려났고, 이제 쇼핑센터에선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박힌 티셔츠를 판다. 그런데 이 책에서 비판하지 않은 브랜드가 하나 있다. 바로 에르메스다. “에르메스의 메시지는 가짜가 아니니까요.” 도르데는 또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의 가치 역시 가짜가 아닙니다. 여기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믿음을 가지고 있거든요.” 시즌이 바뀔 때마다 브랜드 CEO들이 서로 자리를 바꾸는 럭셔리업계에서 평생을 보낸 도르데가 25년 동안 에르메스에 몸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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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윤웅희
  • WRITER JOHNNY DAVIS
  • PHOTOGRAPHER VIRGINIE KHATEEB
  • TRANSLATOR 이원열
  • DIGITAL DESIGNER 이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