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일을 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그랬다고 하셨죠. “이제 집안 안 도와줘도 되니까 너 하고 싶은 거 해.” 그래서 다시 연기를 시작하게 됐다고요.
당시에 제가 뭐 집안의 빚을 갚았다거나, 엄청난 희생을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사실 제가 아르바이트해서 뭐 얼마나 벌었겠어요. 그냥 집이 넉넉지 않으니 생활비 좀 보태고 그런 정도였겠죠. 그러다 어머니가 지혜롭게 잘 하셔서 힘든 상황을 극복했고, 그때 저한테 하고 싶은 것 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어머니 딴에는 제가 희생한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 아이가 분명히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걸 뒷받침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컸던 것 같아요. 지금도 가끔 그러시거든요. 네가 무언가를 하겠다고 했을 때 ‘잘됐으면 좋겠다’ ‘잘될 거야’ 말로만 했던 게 너무 미안했다고.
하지만 데뷔 초에 원진아 씨는 연기가 신선하다는 평을 많이 받았잖아요. 정규 연기 교육을 받았다면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는 일이죠.
네. 저는 사실 연기는 현장에서 배우는 게 되게 크다고 생각해요. 정해진 답이라는 게 없고, 방법도 워낙 다양한 분야잖아요. 제가 연기만 바라보고 달려온 게 아니라 그전에 다양한 경험을 해봤다는 게 되게 큰 도움이 됐어요. 그래서 엄마한테도 그랬어요. “엄마. 근데 그때 내가 이 일 저 일 다 해봐서 미련 없이 재미있게 하는 것일 수도 있어. 처음부터 이것만 했으면 힘들거나 재미없어서 그만두고 싶었을 수도 있잖아. 근데 전에 했던 일들보다 나는 확실히 이게 더 재미있어.” 그냥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아요.
따로 연기를 배운 적은 한 번도 없는 거예요?
연기 학원을 다녀본 적은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연기를 가르치는 방식이 저한테는 좀 힘들었던 것 같아요. 연기를 뭔가 답이 있는 숙제처럼 하는 것도 어려웠고, 누군가가 검사를 하고 평가를 하는 일이 되고 보니까 더 이상 재미있지 않고 괴롭더라고요. 그래서 처음 서울 올라왔을 때 잠깐 다니다가 바로 그만뒀어요. 이러다가 흥미를 잃을 것 같아서. 그러고는 운 좋게 독립영화를 하게 됐고요.
곧 개봉할 영화 〈해피 뉴이어〉에서 뮤지컬 배우의 꿈을 잠시 접어두고 호텔 룸메이드로 일하는 인물로 나온다고 들었어요. 옛 경험이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별개의 문제일까요?
예전의 저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죠. 연기를 해야 하는데 현실적인 문제로 일을 계속해야 하는 캐릭터니까. ‘나는 좋은 배우가 될 수 없을 거야’ 하고 자꾸 스스로를 작게 생각하는 마음, 그런 걸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고요. 그런데 사실 그 작품에서 그려야 했던 건 그런 감정들보다 큰 차원의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지금 명확히 말씀드리긴 어렵지만요.
독학으로 연기를 공부했는데 첫 독립영화 〈캐치볼〉부터 큰 주목을 받았고, 시작한 지 2년 만에 공중파 드라마 주연 자리까지 꿰찼잖아요. 120:1의 경쟁률을 뚫고. 천생 배우인가 보다 싶은 커리어인데, ‘난 안 될 거야’ 하는 마음으로 보낸 시간도 있긴 했군요.
사실 꿈만 꿀 때는 제가 진짜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나는 연기가 너무 좋고, 뭐든 시켜만 주면 하나도 안 빼고 다 할 텐데, 시켜주는 사람이 없네?’ 하는 느낌으로.(웃음) 그런데 막상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보니까 현실적인 어려움이 보이게 된 거죠. 참여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이렇게 큰 규모의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잖아요. 책임감이 생기니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나라는 사람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걱정은 지금도 해요. 내가 언제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될 수 있을지. 지금도 계속 고민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다양한 성격의 작품에서 온갖 캐릭터로 캐스팅이 되는 것만 봐도 잘하고 계신 것 아닐까요? 드라마는 물론이고 〈강철비〉의 북한 소녀에서부터 〈돈〉의 팜 파탈 캐릭터까지….
쑥스러워서요. 친구들이 그걸로 아직도 놀리거든요. “술이라면 모를까?”(〈돈〉에서 원진아가 연기했던 박시은의 대사) 막 이렇게 따라 하면서.
하하하. 아니, 그런데 저는 그런 치명적인 느낌도 소화를 잘하셔서 놀랐었는데요.
사실 저도 제 평생 그런 캐릭터를 맡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요. 〈돈〉을 할 때만 해도 제가 완전히 신인이었고 필모라는 것도 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딱히 감독님이 참고할 만한 것도 없었어요. 〈강철비〉가 상업 작품 데뷔작이었고, 그 촬영 막바지에 〈돈〉 촬영이 들어갔으니까요.
심지어 그 두 작품을 비슷한 시기에 촬영한 거였군요.
네. 거의 같은 시기에 촬영했어요. 그러니 〈돈〉의 박누리 감독님도 〈강철비〉에서 제가 그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하셨겠죠.(웃음) 저도 한창 천진난만하게 울고 웃는 연기 하다가 그런 역할을 제안받았으니까 신기했고요. 그래서 촬영하는 내내 감독님께 많이 여쭤봤던 것 같아요. 왜 저를 택하셨는지. 저한테 보고 싶은 모습이 뭔지. 사실 제가 굉장히 운이 좋았던 거죠. 그렇게 두 작품 촬영이 끝난 후에는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를 하게 됐으니까. 저라는 사람은 하나인데 그 안에서 굉장히 여러 가지 모습을 찾아봐주신 거잖아요. 저한테서 어떤 측면을 봐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부터가 행운이죠. 저도 그전까지 오디션을 되게 많이 봤고, 떨어진 게 훨씬 많기 때문에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거든요.
그간 맡았던 역할에서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강단 있는 인물을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속으로 단단한 사람.
내실이 단단할 필요가 있는 캐릭터가 저한테 많이 들어오기도 했고요. 어쩌면 저라는 사람 자체가 그런 부분이 있어서인 것 같기도 해요. 대본을 보면 그런 부분이 더 눈에 들어오거든요. ‘이 사람이 여려 보여도 마냥 여린 건 아니지 않을까?’ 자꾸 그런 면을 좀 더 찾으려고 하고, 감독님과 함께 읽다 보면 제 성격이 묻어나니까 캐릭터의 방향이 점점 더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이제는 마냥 여리기만 한 캐릭터도 궁금해요.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을 거잖아요. 세상 모두가 똑 부러지고 강단이 있는 건 아니니까.
〈지옥〉도 원진아 배우의 커리어에서 굉장히 새로운 성격의 작품인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런데 또 장르나 소재 자체는 굉장히 독특하지만, 그 안에서 하는 얘기는 결국 사람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커다란 위기 속에서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과, 또 그걸 기회로 보는 사람들… 이게 어디에나 늘 있는 일이잖아요. 극한 상황 속에서 그걸 더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표현했을 뿐인 거죠. 물론 지옥의 사자라든가 천사에 대한 표현도 흥미로웠지만, 제가 끌렸던 부분은 다양한 인간성을 다루는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죠.
레더 드레스 포츠1961. 블랙 부츠 오프화이트.
네. 감사하게도 감독님이 먼저 제안하셨어요. 처음에는 어떤 역할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읽어보라고 대본을 보내주셨거든요. 당시에 작업이 된 3부까지. 그런데 흡입력이나 내용,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향, 다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실장님은 아직 역할이 뭐가 될지도 모르고 아예 없을 수도 있다고 하시는데, 제가 그렇게 말한 기억이 나요. 저 다 필요 없고 정말 잠깐 나오는 역할이라도 좋으니 뭐든 하겠다고. 책이 너무 재미있다고. 그런데 또 너무 감사하게도 생각보다 좋은 역할까지 맡겨주신 거고요.
진아 씨가 연기하는 송소현은 〈지옥〉의 키라고 할 만한 캐릭터죠.
그런가요? 송소현이 키라고 하기에는… 중요한 역할이 또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모든 역할이 중요한 구석이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너무 좋은 선배님들과 함께 하니까, 제 캐릭터가 돋보일 거라고는 딱히 생각을 안 한 것 같습니다.
아, 저는 메시지 측면의 이야기였어요. 결국 〈지옥〉이라는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송소현이라는 캐릭터에게 달려 있지 않나 하는….
네? 아,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부담감을 굳이 만들어 드린 것 같네요.(웃음)
갑자기 걱정이 되긴 하네요. 제가… 제가 잘했겠죠? 더 잘했어야 했는데.(웃음) 그런데 사실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었을 거예요. 제가 어떤 작품에서 어떤 배역을 맡건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 연기가 어떻게 특별해야 해’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런 생각 할 여유도 없고요. ‘내가 맡은 이 캐릭터는 어떤 사람이지?’ ‘그럼 내가 이 캐릭터를 위해서 뭘 해야 하지?’ 그냥 그런 고민만 충실히 하기도 바쁘죠. 고민을 잘 해서 주목을 받는다면 그건 물론 좋은 일이지만 결과적인 부분일 것 같고요. 아마 저뿐만 아니라 많은 배우가 그런 마음으로 임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어요.
기대가 되는 말씀이네요. 성실하되 조급하지 않은, 좋은 방향성을 가진 노력처럼 들려서요.
아직 보여드리지 못한 게 많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해온 것보다 해나갈 날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스스로도 그냥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게 있는 것 같고요. 앞으로 또 분명히 다른 작품에서 새로운 걸 해보게 될 거라는 기대감. 그리고 또 어쩌면 그 안에서 저도 몰랐던 무언가를 찾겠지 하는 기대감 같은 거요.
*원진아 인터뷰 풀버전은 에스콰이어 12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지옥〉 원진아의 실제 성격은 한마디로 '에너제틱'이다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