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10인의 여행 애호가가 꼽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여행의 기억' part.1

해외여행의 경험이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흐릿해진 시대. 다만 그 부연 안개 속에서도 불쑥불쑥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10명의 여행 애호가에게 여행의 기억에 대한 질문 10개를 던졌다.

프로필 by 오성윤 2022.04.10
 
 
QUESTIONS
1- 가장 그리운 여행지는?
2- 가장 기억에 남는 경로는?
3- 가장 그리운 음식은?
4- 가장 기억에 남는 술은?
5- 가장 그리운 숙소는?
6-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나 액티비티는?
7- 가장 좋았던 관람 공간은?
8- 가장 좋았던 풍경은?
9- 가장 큰 마음의 평화를 얻었던 장소는?
10- 가장 보고 싶은 사람들은?
 
 
김진영 (이라선 대표)
1- 한여름의 남프랑스 도시 아를. 로마 시대 콜로세움이 남아 있을 정도로 오래된 역사를 가진 도시인데, 매년 여름 아를에서는 ‘Les Rencontres d’Arles’라는 이름의 사진 축제가 열리고 동시대 작가의 최신 작업을 도시 곳곳에서 전시한다. 오프닝 주간에 가면 거리에서 샴페인을 나눠줄 정도로 떠들썩해진다. 2- 뉴욕 맨해튼에서 디아 비콘 뮤지엄 가는 길. 그랜드센트럴역에서 허드슨 라인 기차를 타고 북쪽에 위치한 도시 비콘으로 가는 길이다. 왼쪽 창가 자리에 앉으면 고요하고 아름다운 강 풍경을 볼 수 있다. 선로와 강이 매우 가까워 기차가 강 위를 가로지르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이 마치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었다. 4- 스페인 톨레도의 음식점에서 마셨던 로컬 비어. 관광 책자에 소개된 음식점 말고 로컬 맛집을 찾고 싶어 친절한 지역 주민이 적어준 곳에 갔다. 톨레도식 메추리 요리와 함께 로컬 비어를 마셨는데 맛도 좋았고 모든 것이 로컬이라며 만족스러워했던 기억이다. 로컬에 집착했던 것치고는 아이러니하게 레스토랑 이름도, 맥주의 이름도 모두 까먹고 말았지만. 6- 뉴욕 할렘 아폴로 극장에서 본 스티비 원더 공연. 유서 깊은 아폴로 극장에서 스티비 원더의 대표곡을 라이브로 듣는다는 사실만큼이나 큰 인상을 남긴 건 관객이었다. 관객 대부분이 흑인이었는데, 신이 나면 일어나서 춤을 추고 호응하는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음악을 즐긴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7- 10년에 한 번 개최되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열렸던 독일 뮌스터 도시 전체.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예술가들이 뮌스터에서 특정 장소를 선택해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는 행사이다. 넘버와 작품명이 쓰인 지도를 들고 다니며 관객은 작품을 ‘발견’해야 한다. 도시에 본래 있던 것을 작품으로 착각하거나, 반대로 작품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을 경험하는 가운데 예술에 대한 주관적 투사의 힘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8- 그리스 파로스섬의 언덕 풍경. 크지 않은 섬이라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마음 가는 대로 향하다 경사진 언덕이 있어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해 질 무렵 그리스의 또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얀 집들과 풍차, 바위들, 마른 풀들. 바위가 많은 지형 탓에 자전거를 끌고 이동해야 했지만 수고로움조차 좋았던 기억이다. 9- 미국 조지아주의 서배너. 조지아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데 다운타운의 모든 건물이 고즈넉하고 마치 오래된 미국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바닷가 근처에는 느리고 평화로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과 낚시광들이 있었다.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의 바닷가 인근 풍경. ⓒ김진영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의 바닷가 인근 풍경. ⓒ김진영

 

 
신현호 (직장인)
1- 종종 여행은 낯선 곳에서 일상의 삶을 살고자 하는 모순된 환상을 좇는 일이기도 하다. 교토는 하도 여러 번 오래 여행한 곳이라 그 꿈을 조금은 이룰 수 있다. 다카시야마 백화점 식품관에 들러서 한적한 주택가를 걷다가 작은 공방에서 그릇을 사고,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가모가와 강변을 산책하고 싶다. 2- 달리는 탈것 안에서 갑자기 창밖으로 바다가 펼쳐지는 장면은 언제나 마법 같은 순간이다. 개중에서도 삿포로에서 오타루로 가는 짧은 기차 여행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에키벤에 맥주를 마시며 바다를 보다가 작은 역에 도착했다. 그 모든 과정이 팬데믹 시대에는 불가능한 일이라서 더 그립다. 3- 방콕 방람푸 시장 안의 노점에서 먹은 똠양꿍. 내가 좋아하는 식당은 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큼직한 새우, 갈랑갈, 프릭키누를 듬뿍 넣고 똠양꿍을 끓여주는 곳인데, 야외 테이블에서 맵고 시고 뜨거운 국물을 먹고 있으면 땀이 줄줄 흐른다. 그리고 얼음을 넣은 싱하 맥주로 그 열기를 식히면 ‘내가 지금 방콕에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4- 포틀랜드 그레이트 노션 브루잉의 맥주는 마실 때마다 ‘좋은 맥주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페일 라거가 목 넘김으로 상징되는 음용성에 집중하고, 그 반대편에 독특한 홉이나 배럴 숙성으로 극단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크래프트 맥주가 있다고 할 때, 이 브루어리의 맥주인 주스 주니어는 “둘 다 하면 안 돼?”라고 말하는 듯하다. IBU는 높지만 입속에서 망고,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의 맛이 폭발하고 솜사탕처럼 넘어간다. 5- 파리 근교의 오래된 성 샤토 드 메히 슈흐 와스에서 숙박해본 적이 있다. 가을 아침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하는 감각으로 일어나서 새소리가 들리는 성 주변 숲을 산책했다. 8- 이탈리아 피에몬테 바롤로의 카누비 포도밭을 내려다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있다. 다이닝룸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탁 트였다. 리스트에 있는 어떤 와인에 대해서 질문하자 “저기 보이는 밭에서 나온 포도로 만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불과 몇 년 전의 일인데 음식이 어땠는지, 와인이 어땠는지는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마 어떤 음식이 나왔어도 별 상관 없었을 것이다. 10- 미국 뉴올리언스의 버번 스트리트를 걷다 보면 골목을 돌 때마다 새로운 밴드의 재즈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술에 적당히 취한 사람들은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나는 차마 춤까지 추지는 못하지만 옆에서 술잔을 들고 (뉴올리언스는 길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 그 흥을 나눈다. 일상이 무료해지면 늘 축제처럼 사는 그곳 사람들이 생각난다.

교토 가모가와 강변. ⓒ신현호

교토 가모가와 강변. ⓒ신현호

 

 
이정빈 (크림 MD)
1- 스톡홀름. 1년 중 대부분이 어둡고 춥고 대체로 얼어 있는 곳이지만, 5월부터 8월까지 약 3~4개월간은 지중해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맑고 따뜻한 날이 펼쳐진다. 얼어 있던 시간을 보상받겠다는 듯 농축된 생명력이 가득한 도시에선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오래된 가구점을 들러도, 박물관이 모인 작은 섬을 돌아도 그 감흥은 열 배가 된다. 2- 구글 맵 서비스가 존재하기도 전, 수십 번 자르고 접어 원래 모양을 알 수 없는 유럽 전도를 쥐고 프라하 중앙역에서 밀라노까지 야간 기차를 탔었다. ‘가방을 통째로 가져간다’던 여행 괴담이 유난스럽던 시절, 송아지만 한 백팩을 작은 체인으로 묶어놓은 채 옆에 기대어 MP3 플레이어 저장곡을 통째 다섯 번쯤 반복해 듣다 잠이 들었다. 3- 비엔나 한인 민박에서 만나 매일 같은 시간 아침을 먹었던 형은 나의 다음 행선지가 바르셀로나라는 말에 ‘파에야’라는 단어를 5분에 세 번쯤 말했다. “바르셀로나에선 꼭 파에야를 먹어야 해. 스페인 클럽에서 먹은 거랑 완전히 다를 거란 말이지.” 과연,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서울의 스페인 음식점에 가도 늘 그때 그 맛이 그립다. 4- 밀라노의 수많은 바 중 내가 가장 아끼는 곳은 바 바소다. 칵테일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바소에선 늘 칵테일을 마셨다. 뭘 시켜도 기대 이상의 것이 나오고, 다른 무엇보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빠지지 않고 거론될 만큼 매력적인 인테리어 때문에라도 추천할 만하다. 5- 에어비앤비로 머물렀던 샌디에이고 리틀 이탈리아의 젊은 건축가의 집. 평범한 캘리포니아 주택이겠거니 했던 예측과 달리, 작은 파티션과 계단으로 나뉜 공간 구성이 감각적으로 굉장히 새롭게 느껴졌다. 예민한 감각이 일상에 스며들면 이런 모습이 되는구나 하고 감탄했던 경험. 7-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타델 미술관. 괴테가 ‘값을 매길 수 없다’고 칭송했을 만큼 서양 미술사를 압축한 듯한 아름다운 컬렉션이 가득하다. 마인 강변을 따라 펼쳐진 ‘박물관 섬’ 지역에 위치해 대여섯 개의 박물관을 함께 포식할 수 있는 곳이다. 8- 비셰흐라드에서 바라보는 프라하. ‘고지대의 성’이라는 뜻과 같이 비셰흐라드에 올라가면 카를교를 비롯한 프라하1지구의 모습이 훤하게 보인다. 머무르는 내내 여러 번 들렀는데, 돌과 유리로 만들어진 성에서 바라보는 중세 도시 광경은 어두워질 무렵에 가장 아름다웠다. 9- 코펜하겐 루이지애나 미술관. 도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그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란 명성은 화려해서가 아니라 고요해서 얻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정적이고 아름다운 공간이었으며, ‘반드시 다시 와야지’ 하는 마음이 들게 했던 드문 장소 중 하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타델 미술관. ⓒ이정빈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타델 미술관. ⓒ이정빈

 

 
김경태 (사진작가)
1- 한 달 조금 넘게 스위스 곳곳을 차로 이동하며 댐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했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대신 환상적인 장면도 많이 만났다. 아마 다시는 하기 힘들 여정이라는 걸 당시에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3- 이탈리아 파비냐나의 골목에 위치한 스찰라에의 문어 샐러드, 그리고 지역 통조림 가게에서 구입한 플로리오 참치 캔. 파비냐나는 참치잡이와 가공으로 유명한 지역으로, 특히 올리브유에 절여진 캔 참치를 아보카도 위에 올려 먹으면 기가 막히게 맛있다. 그때 사온 게 두 캔 남았다. 4- 스위스 플림스의 카우마호수에서 마셨던 카디날 블론드 병맥주. 스위스의 여러 맥주 중에서도 살짝 느껴지는 향미의 깔끔한 맛으로 가장 좋아했던 브랜드다. 청록색의 호수를 바라보며 즐길 때 가장 행복했다. 5- 스위스 로잔에서 거주할 집을 구하기 전에 일주일 정도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백패커의 1인실. 창밖으로 공원과 레만호수가 내려다보였고, 설렘과 초조함이 뒤섞인 시간을 보내면서 언젠가 이곳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6- 2005년 오스트리아 빈의 오페라하우스에서 본 <호두까기 인형> 발레 공연. 비록 입석이었지만 처음 관람한 발레 공연이었고,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 1년 남짓 발레를 배우게 된 계기가 됐다. 7-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탈루냐 음악당. 건물 외관으로부터 이어지는 듯 설계된 공연장 내부의 조각과 스테인드글라스가 굉장히 조밀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천장의 구조와 장식들에 눈을 뗄 수 없어 연주자를 보지 못하고 음악은 듣기만 했을 정도였다. 8-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운 좋게 야간 항공편의 창가 자리에서 북극권의 오로라를 맞닥뜨린 적이 있다. 수평선에 늘어서서 천천히 요동치는 모습은 지금까지 본 풍경 중 가장 황홀한 광경이었다. 9- 스페인 테네리페의 화산 테이데 주변. 광활한 평지에 몰아치는 강풍으로 숨 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오후 내내 머무는 동안 인기척도 없어 마치 화성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10- 스위스 시골에서 반겨주고 집까지 초대해준 사람들. 특히 몽트뢰의 겨울 산을 촬영하고 혼자 내려오다 큰 위기를 겪고 밤늦게 겨우 차도까지 내려와서 걷고 있던 나를 역까지 태워준 부부가 생각난다. 바지에 온통 얼어붙은 눈을 매달고 있었는데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스페인 테네리페의 화산 테이데 주변 풍경. ⓒ김경태

스페인 테네리페의 화산 테이데 주변 풍경. ⓒ김경태

 



최창수 (JTBC PD)
1- 예멘 사나 올드시티. 5년째 세계 여행 중이던 어느 여행자의 추천에 꽂혀 터키를 포기하고 예멘에 방문했더랬다. 개중에서도 올드 사나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그 ‘시간이 멈춘 땅’이 무척 그립다. 2- 중국 상하이에서 티베트 라싸로 향하는 4박 5일 5500km의 여정. 비자 유효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네팔로 넘어가야 했고, 결국 서쪽으로 가는 아무 버스를 붙잡아 타며 무식한 여정이 시작됐다. 17시간의 버스, 25시간의 기차, 또 20시간의 기차, 마지막으로 18시간의 버스를 견뎌낸 나는 5일 만에 라싸에 도착했다. 지금껏 모든 여행을 통틀어 가장 고통스러운 이동이었다. 3- 인도 파나지에 있는 세인트조지 레스토랑의 소고기 스테이크. 인도를 여행하며 소고기를 먹어보지 못한 여행자들은 기독교 문화가 아직 남아 있는 이곳에서 눈치를 보지 않고 스테이크를 썰 수 있다. 일주일 내내 하루 세 번 똑같은 스테이크를 킹피셔 맥주와 함께 질리도록 먹었다. 5- 이란 마술레 민박집.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아랫집의 지붕이 곧 윗집의 마당이 되는 동화 같은 마을이다. 나는 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예쁜 집을 빌려 아무 걱정 없이 내내 뒹굴거리기만 했다. 그 노란 집이 가끔 그립다. 6- 아르헨티나 이구아수폭포 보트 투어. 우비를 뒤집어쓰고 말 그대로 폭포 아래에서 샤워를 하는 이 투어는 아무리 기대치를 높인 상태에서 보트를 타도 그 이상의 만족을 선사할 것이다. 7-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이곳에서는 5000년 중국 역사를 한눈에 엿보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 한 바퀴 돌고 나면 그 순간만큼은 어떤 국제 관계 문제를 떠나 중국에 대한, 아니 인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리라. 8- 쿠바 플라야히론의 칼레타부에나. 바다로 흘러내린 용암이 마치 수영장 모양을 형성하고 그 안으로 에메랄드빛 파도가 부서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세상이 고속 프레임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9- 아르헨티나 페리토모레노 빙하. 끝도 없이 펼쳐진 새하얀 빙하가 두 눈에 꽉 차고, 빙하 위를 타고 태평양에서 넘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허파까지 들이찬다. 그 순간만큼은 몸과 마음이 대자연의 필터로 맑게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10- 중국 호도협 산골에서 민박을 운영하는 우씨 아주머니. 두 딸을 키우는 해맑은 웃음의 우씨 아주머니는 나를 마치 큰아들처럼 대했고,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을 한 가족처럼 보냈다. 떠나는 날 아침 아주머니 앞에서 펑펑 울게 되었을 만큼. 우씨 아주머니, 많이 보고 싶습니다.

중국 호도협. ⓒ최창수

중국 호도협. ⓒ최창수

Credit

  • EDITOR 오성윤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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