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시계 브랜드의 생애 주기는 어떻게 될까?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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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시계 브랜드의 생애 주기는 어떻게 될까?

오성윤 BY 오성윤 2022.05.03
 
오데마 피게가 파텍 필립을 제치고 스위스 시계 업계 매출 4위로 올라섰다. 아, 자극적인 카피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문구가 〈에스콰이어〉 담당 에디터를 자극해 포켓볼 첫 스트로크를 맞고 흩어진 공들처럼 이리저리 튕겨 내게까지 원고가 왔다. 그리하여 이달 내가 제안받은 원고 주제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의 생애주기’다.
다만 시계 브랜드의 생애주기라는 개념은 조금 모호하다. ‘생애’ 자체를 말하기가 애매하고, 그러니 흥망성쇠를 논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매출이 늘었는데 알고 보니 스펙을 낮추고 가격을 떨어뜨려 가격 저항선을 낮췄다면 경영상으로는 성공이지만 애호가들의 의견은 다를 수도 있다. 매출을 기준으로 삼기에는 시계 업계의 주요 지표가 너무 많이 숨겨져 있다.
‘오데마 피게가 파텍 필립을 제치고 시계 매출 4위로 올라섰다’는 문구가 전 세계 언론에 재생산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팩트’ 자체가 귀하기 때문이다. 이 문구의 출처는 세계 최고 수준의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와 시계 전문 컨설팅 회사 럭스 컨설트의 협업 리포트다. 정확히 말하면 2021년 매출 기준으로는 오데마 피게 매출이 파텍 필립보다 50억 스위스프랑(약 6000억원)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파텍 필립이 오데마 피게에 한풀 꺾였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위스 시계 업계는 정확해야 하는 부분만 빼고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굳이 생애주기라는 개념으로 스위스 시계 브랜드를 본다면 X축과 Y축 그래프를 생각해볼 수 있다. X축은 시간, Y축은 수준이다. ‘수준’ 안에는 매출이나 브랜드 가치, 기계적 사양 등 여러 가지 요소가 들어갈 수 있을 테니, 관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즉 개별 예시들은 재미로 봐주시면 되겠다). 아무튼 이 두 축을 기준으로 시계 브랜드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계속 소소한 브랜드 (2) 소소했다가 높아진 브랜드 (3) 높았다가 소소해진 브랜드 (4) 계속 높은 브랜드. 이렇게 나눠서 따져보면 스위스 시계라는 업계의 특성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노력이나 품질과 별개로 늘 소소한 수준에 머무르는 브랜드가 있다. 어느 업계에나 그런 회사는 있고, 스위스에도 있다. 어떤 브랜드는 자신만의 제조 철학과 미감과 높은 수준의 기계적 완성도를 가졌음에도 브랜드 인지도가 좀체 오르지 않는다. 이유는 소극적 유통 또는 기타 우리가 알 수 없는 요소들 때문이기도 하다. 시계 전문 브랜드의 생산설비까지 인수하며 고급 시계라는 카테고리에 진입하려는 브랜드도 있다. 개중 몇은 가격 대비 사양도 상당히 훌륭하고, 스펙이나 창의력도 좋다. 하지만 이런 경우 대부분은 제품의 완성도와 노력에 비해 늘 낮은 인지도 카테고리에 머무른다.
다음은 매출이나 인지도처럼 경영상 눈에 띄는 지표가 낮았다가 높아진 브랜드다. 이쪽 분야의 대표 사례는 블랑팡이다. 블랑팡은 1755년 창립 후 200여 년을 이어져오다 스위스 시계 업계 최대 불황기였던 1970년대에 문을 닫았다. 그리고 불세출의 시계 마케터 장 클로드 비버가 헐값에 블랑팡을 인수했다. 비버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라진 블랑팡에 새로운 시대적 서사를 입혔다. 대중적인 쿼츠 시계 대신 블랑팡은 고급 기계식 시계만 만든다고. 이후 승승장구한 블랑팡은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시계 브랜드가 되었다. 비버는 블랑팡을 팔고 그 돈으로 또 다른 브랜드인 위블로를 만들어 또 한 번 성공시켰고, LVMH의 시계 부문 총괄이 되기까지 했다. 한 번 사는 인생 비버처럼 살아도 나쁠 것 없다.
기계식 시계의 역사에서 봤을 때 남다를 것 없는 역사성과 기술력을 갖췄음에도 럭셔리 시계 업계에서는 늘 ‘접근 용이한 시계’라는 이미지에 머무는 브랜드도 있다. 대개는 브랜드의 포지셔닝 전략 때문이다. 포지셔닝 때문에 스펙과 가격을 조금씩 낮춘 엔트리 모델을 출시하는 브랜드가 있고, 반대로 포지션을 다시 높이기 위해 엔트리 라인을 단종시키는 브랜드도 있다. 뭐가 됐든 목적은 브랜드의 생애주기를 연장시키기 위함이니 비즈니스의 세계는 심오하다.
마지막으로 계속 높은 포지션을 유지하는 브랜드가 있다. 롤렉스,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오메가, 까르띠에, 그리고 최근 추가된 리차드 밀. 매출만 놓고 봐도 이들의 높은 포지션은 모건스탠리 리포트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해당 보고서에서 매출과 시장점유율을 기준으로 호명된 상위 7개 브랜드는 순서대로 롤렉스, 까르띠에, 오메가, 오데마 피게, 론진, 파텍 필립, 리차드 밀이다. 이들의 입지는 몇 년이 지나도록 쉽게 변하지 않았으니(비록 그들끼리는 엎치락뒤치락한다 해도), 한 번 높은 포지션을 차지한 브랜드는 좀처럼 쉽게 내려오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여기 언급된 7개 회사 중 5개는 19세기에 만들어졌다. 까르띠에, 오메가,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론진은 모두 1800년대부터 시작했다. 말인즉슨 이들이 3세기에 걸친 온갖 풍파를 헤쳤다는 뜻이다. 풍파를 헤친 방법은 모두 다르다. 까르띠에는 기본적으로 보석 회사가 시계를 만든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시계 외에도 강한 주력 비즈니스인 보석업이 있었다. 파텍 필립은 고품질 고급 시계를 고급 고객에게 판매한다는 기조를 지켰다. 오데마 피게는 한 번도 소유 구조가 바뀐 적이 없는 회사라 특유의 고집스러운 운영 방침이 있다. 스위스 시계의 암흑기인 1970년대에 초고가 스포츠 시계인 로얄 오크를 출시한 게 그 예다. 오메가와 론진은 스와치그룹 산하에서 각자의 캐릭터를 구축하며 살아남았다.
20세기의 롤렉스와 21세기의 리차드 밀에는 강력한 원천기술과 콘셉트가 있었다. 롤렉스는 오늘날 사람들의 이미지 속 포지션과 달리 기계 단위로 뜯어보면 철저한 실용 시계다. 롤렉스가 타 시계 회사와 달랐던 건 케이스의 방수 기술이었다. 이는 아직까지도 오이스터 퍼페추얼이나 서브마리너 등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의 빈티지 롤렉스가 시장에 건재한 근본적 이유 중 하나는 그 시계들이 지금껏 멀쩡하기 때문이다. 리차드 밀 역시 시계의 경량화에 집중한다는 원천기술과 광기의 캐릭터 플레이로 21세기의 시계 시장에 안착했다. 결과적으로, 생존한 브랜드들에 공통 공식은 없다. 각자의 정답만이 있을 뿐이다.
사실 21세기 시계 시장의 가장 큰 화두는 스위스 시계가 아니다. 스마트워치다. 애플 워치의 출하량은 이미 모든 스위스 시계의 합산 출하량을 넘어선 지 한참 됐다. 스마트워치의 생애주기는 어떻게 될까, 스마트워치가 기존 손목시계 브랜드의 생애주기에 영향을 미칠까, 이런 걸 생각해보는 일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이미 스마트워치는 손목시계 시장의 거대한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플 워치는 스위스 시계 업계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2021년 현재 스위스의 주요 고급 시계 브랜드는 모두 성장했고, 스위스 시계 수출액은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매출액을 회복했다. 다만 애플 워치는 비슷한 가격대의 시계 브랜드 생애주기에 영향을 끼친다. 애플 워치와 가격대가 겹치는 브랜드의 시계 보고서 속 순위들이 조금씩 내려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스위스가 어떤 나라인가. 집집마다 지하에 핵 벙커를 만들어둘 정도로 생존에 특화된 나라 아닌가. 이들은 분명 어떻게든 답을 찾아낼 것이다.
 
박찬용은 〈에스콰이어 코리아〉의 전 피처 에디터다. 〈요즘 브랜드〉 〈첫 집 연대기〉 등의 책을 썼으며 〈요즘 브랜드2〉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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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오성윤
    WRITER 박찬용
    ILLUSTRATOR VERANDA STUDIO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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