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ceau Le Temps Voyageur ‘여행자의 시간’이라고 이름 붙인 아쏘 르 떵 보야주는 월드타임에 대한 에르메스의 기발한 해석이 돋보이는 시계다. 아쏘 타임 서스펜디드, 아쏘 레흐 드라룬 같은 독창적인 에르메스 컴플리케이션의 계보를 잇는 모델이기도 하다. 크게 보자면 시침과 분침이 놓인 서브다이얼로 로컬 타임을, 12시 방향의 숫자 인디케이터로 홈 타임 시간을 알리는 구조인데, 표준시간대의 도시명을 새긴 링 덕분에 세계 시간까지 직관적으로 읽을 수 있다. 작동법은 무척 간단하다. 케이스 9시 방향의 푸시 버튼을 누르면 서브다이얼이 15도씩 움직이며 시간대가 이동하는 것. 서브다이얼은 지도 위에서 위성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며 동시에 시침은 1시간씩 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홈 타임 설정은 크라운으로 가능하다. 에르메스적인 상상력은 다이얼 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승마 세계의 지도’라 명명한 지도 모티브가 바로 그것이다. 지름 41mm의 플래티넘 버전과 38mm의 스틸 케이스 버전으로 출시한다.
▴ Cape Cod Crepuscule 케이프 코드 컬렉션에 특별한 다이얼이 추가됐다. 바로 스위스 전자 및 마이크로 기술센터(CSEM)와 2018년부터 공동개발에 착수해 완성한 실리콘 웨이퍼 다이얼이다. 실리콘 웨이퍼는 반도체 제작에 사용하는 소재로, 재료의 양에 따라 미묘하고 독특한 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두께 0.5mm 실리콘 플레이트 위에 72나노미터에 불과한 질화 규소 필름을 코팅하고, 이를 다시 블루 라이트에 노출해 패턴을 인쇄하는 포토리소그래피 단계까지 거쳐 완성한다. 다이얼의 모티브가 된 원작은 그래픽 아티스트 탄-퐁 레(Thanh-Phong Le)의 ‘황혼’. 이를 바탕으로 완성된 결과물은 착용자 손목의 움직임에 따라 오묘한 빛을 발한다.
PHILIPPE DELHOTAL 필립 델로탈 에르메스 워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올해 신제품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아쏘 르 떵 보야주다. 이 시계는 일반적인 월드타임 워치와 어떻게 다른가?
월드타임은 하나의 기능일 뿐이다. 이 시계는 오히려 ‘세계의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다이얼 위에 구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행에 대한 에르메스식 해석을 여기에 담고자 했다. 기능면에서 이 시계는 전통적인 GMT와 월드타임 사이의 어떤 지점에 있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은 결코 전통적이지 않다. 서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에르메스적이라는 것. 이 시계가 특별한 이유다.
시간을 알려주는 서브 다이얼이 위성처럼 도시를 부유하도록 만드는 것. 우리는 이 서브 다이얼이 지도 위에서 최대한 부드럽게 움직이기를 원했다. 작은 부품으로 조립하는 과정도 까다로웠고, 컴플리케이션을 안정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설계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 지금은 에르메스가 이 메커니즘에 대한 특허권을 보유하고 있다.
실리콘 웨이퍼 다이얼의 케이프 코드 역시 눈여겨볼 만한 신모델이다. 이런 방식의 다이얼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전에 못 본, 새로운 재질의 다이얼을 시도하고 싶었다. 다양한 방식을 고민했는데, 결과적으론 실리콘 웨이퍼 다이얼을 선택했다. 재질이 매우 얇아 활용도가 높고, 그 위에 골드를 입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첨단 기술 재질과 전통적인 시계 제작 방식을 결합해서 흥미로운 결과물로 완성할 수 있었다. 또 에르메스 시계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비전도 확인했다. 클래식한 방식도 좋지만 때론 기존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필요도 있다.
확실히 이 시계는 새로운 버전의 메티에 다르라는 생각이 든다. 매우 현대적이면서 아름답고 또 에르메스적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기술과 신소재를 사용한다고 해서 메티에 다르의 원칙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다. 최첨단 기술과 미학적인 공예는 얼마든지 결합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예술의 발전은 기술의 발전과 궤를 함께해왔다. 장인의 수공 기술도 물론 훌륭하지만 그것만이 고급 예술의 조건은 아니다. 최상의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식을 찾고 조화롭게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도 다른 시계에도 실리콘 웨이퍼 다이얼을 사용할 의향이 있나?
아마도. 실리콘 웨이퍼 다이얼을 응용한 다이얼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이를 테면 주얼 세팅이나 자개를 추가한 웨이퍼 다이얼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재질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면 더 예술적인 다이얼도 충분히 가능할 거다. 아이디어엔 한계가 없고, 그 무한함은 에르메스적인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남성 워치 H08 얘기를 해보자. 작년 H08을 대대적으로 론칭한 만큼 올해는 다양한 컴플리케이션 모델을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확실히 H08은 큰 성공을 거뒀다. 당연히 이 컬렉션은 더 발전하고 확장할 것이다. 다만 올해는 기존 라인업에 블루 버전만 추가했다. 앞으로 공개할 새로운 모델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H08을 제외하면 남성 시계엔 브레이슬릿 워치가 거의 없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지금까지는 가죽이나 패브릭 스트랩을 좀 더 선호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계의 전체적인 라인을 고려한 결정이기도 했다. H08은 시계가 가진 스포티함이 메탈 브레이슬릿과 잘 어울렸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브레이슬릿 모델을 소개한 것이다.
에르메스다운 시계란 뭘까? 무엇이 에르메스 워치를 에르메스답게 만들까?
시계에 담긴 각각의 스토리다. 케이프 코드나 아쏘가 승마 세계와 이어져 있듯, 우리의 모든 컬렉션은 그 자체로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테마를 바탕으로 각 모델에 맞는 미적 시그너처를 발전시킨다. 때론 서정적으로, 때론 자유분방하게. 그렇게 시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오브제가 된다. 그래서 에르메스의 시계는 딱 보면 안다. 이러한 독특함이 에르메스 워치를 다른 시계와 구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