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남성 영화평론가가 민희진의 걸그룹 뉴진스에 열광하게 된 이유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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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남성 영화평론가가 민희진의 걸그룹 뉴진스에 열광하게 된 이유

오성윤 BY 오성윤 2022.09.04
가방이 왔다. 예약 구매로 산 뉴진스 CD 앨범 패키지다. 블랙, 화이트, 버건디 색상의 옵션이 있었는데 블랙은 이미 품절되고 화이트는 때가 많이 탈 것 같아 버건디로 구입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블랙을 미리 구매했어야 하는데 하루 망설이는 차에 뺏…. 잠깐. 나는 지금 왜 〈에스콰이어〉에 뉴진스 머천다이즈 이야기를 이토록 자세히 하고 있는 건가. 누가 궁금해한다고.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게 아니다. 이건 내 인생 첫 번째 아이돌 음반 패키지 상품이다. (CJ 다니던 친구가 아이즈원 비치 타월을 선물해준 적은 있지만, 그건 ‘내돈내산’은 아니었으니 예외로 두고.) 나는 과체중의 마흔여섯 아저씨다. 아이돌 산업에 대해서는 열광하면서도 대체적으로 좀 거리를 두던 사람이다. 그런데 뉴진스 가방을 구입했다. 어디 메고 다닐 수도 없는 가방을.
고백하자면 나는 지난 일주일 동안 뉴진스의 EP만 반복해 들었다. 역시 첫 싱글인 ‘Attention’이 좋긴 하지만 ‘Hype Boy’를 더 자주 듣게 된다. 추후에는 ‘Cookie’를 이들 최고의 싱글로 꼽게 되지 않을까 싶다. 발라드인 ‘Hurt’도 자주 듣는다. 목소리만 듣고도 멤버를 구분하기 위한 연습용으로도 딱이지만 일단 노래가 꽤 아름답다. 아, 나는 또 대부분 뉴진스가 누군지 관심도 없을 독자들 앞에서 이들의 음악을 쓸데없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시라. 우리는 아이돌 앨범을 비평하면서 딱히 그들의 노래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대다수 아이돌의 노래는 퍼포먼스와 한 세트라, 눈으로 보지 않으면 감흥이 확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곡은 한두 개의 ‘미는 싱글’을 음원 차트에서 성공시키고 나면 생명을 잃는다. 하지만 뉴진스의 앨범은 그렇지 않다. 한 곡 한 곡 공들여 만든 티가 역력하다.
그래서 뉴진스의 성공이 음악의 성공이냐고? 나는 지금 이 글에서 뉴진스의 상업적 성공 전략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그런 글은 이 잡지가 서점 가판대에 오르는 시점에 이미 온라인상에 수백 가지가 나왔을 것이다. 모두가 민희진의 5억 연봉에 대해 먼저 떠들기 시작할 것이다. 됐고. 나는 그저 뉴진스라는 그룹이 어떻게 나이 든 영화평론가로 하여금 패키지 상품을 예약 구매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은 당연히 이 모든 것을 창조한 예술가가 되어야 마땅하다. 민희진이라는 존재다. 민희진은 익히 알려지다시피 SM엔터테인먼트에서 f(x), 샤이니, 레드벨벳, NCT 등의 아이돌을 담당한 비주얼 디렉터였다. 지난 2018년부터 그는 하이브(전 빅히트)에서 자신의 레이블 어도어(ADOR)를 통해 새로운 걸그룹 론칭을 준비해왔다. 나는 성공할 가능성이 반반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내가 감독의 역량만을 지나치게 믿는 영화평론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는 결코 감독을 믿지 않는다. 제임스 카메론이나 크리스토퍼 놀런 급의 감독이 아니라면 당신은 결코 영화 전체를 통제할 수 없다. 최종 편집권도 가져갈 수 없다. 영화라는 산업은 철저하게 분리된 공동 작업이다. 가끔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전작을 성공시킨 감독을 믿고 ‘네 멋대로 한번 해보라’며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할리우드 역사상 흥행에 있어 대재앙으로 기록된 많은 영화가 이런 호기에서 탄생했다.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 테리 길리엄의 〈바론의 대모험〉, 케빈 코스트너의 〈포스트맨〉, 워쇼스키 남매의 〈스피드 레이서〉…. 리스트는 끝이 없다. 물론 할리우드의 호기가 아주 가끔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팀 버튼이 연출한 1989년작 〈배트맨〉이다.
전작 〈비틀쥬스〉로 의외의 성공을 이뤄낸 팀 버튼은 당시 디즈니 애니메이터 출신의, 좀 기괴한 소규모 영화를 만드는 신인 감독이었다. 워너브라더스는 당대 최고로 많은 제작비가 투여된 영화 중 하나인 〈배트맨〉의 첫 시사를 열고 패닉에 빠졌다. 지나치게 어두웠다. 지나치게 뒤틀렸다. 지나치게, 그러니까 지나치게 ‘인디’스러웠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거대한 제작사 중 하나가 가장 많은 제작비를 투여해서 만든,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슈퍼히어로 만화의 첫 번째 블록버스터가 인디스러워서는 곤란했을 것이다. 투자한 만큼 돈을 벌어들이는 것 역시 감독의 역량이다. 〈배트맨〉은 어딜 봐도 그럴 수가 없게 만들어졌다. 개봉 직전 팀 버튼 감독은 잠적했다. 워너브라더스 간부들은 사표를 준비했다. 재앙이다. 재앙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배트맨〉은 개봉하자마자 미국 내 흥행 신기록을 갱신했다. 북미에서만 2억5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처음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상해했다. 원작 팬들은 지나치게 어둡다고 불평했다. 비평가들도 스타일만 좋은 영화라고 평가절하했다. 당대 최고의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보다는 디자인의 승리. 본질보다는 스타일의 승리. 신경 쓸 가치도 없는 플롯을 가진 보기 좋은 영화”. 하지만 막상 개봉하자 새로운 관객들은 열광했다. 같은 시기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세 번째 〈인디아나 존스〉 영화는 이미 그들에게는 지나치게 낡고 전통적인 것이었다. 〈배트맨〉은 달랐다. 이건 영화라기보다는 거의 팝아트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팀 버튼이라는 괴짜 예술가에게 모든 것을 맡긴 워너브라더스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영화의 트렌드가 바뀌기 시작했다. 더 인디적이고 더 어두워도 괜찮은 블록버스터의 시대는 사실상 〈배트맨〉이 막을 올렸다.
나는 민희진의 뉴진스를 보며 팀 버튼의 〈배트맨〉을 떠올린다. 나는 민희진이 SM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을 좋아했다. 그의 이름을 처음 대중에게 알린 f(x)의 핑크색 비디오테이프가 레트로 유행을 앞서 내다본 기막힌 홍보 방식이라며 감탄했다. 지금 가장 상업적인 아이돌의 화보 사진을 상업 사진 분야에서도 가장 인디스러운 감수성을 지닌 하시시 박과 진행한 것도 재미있었다. SM 뮤직비디오들이 본격적으로 촌티를 살짝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민희진의 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건 민희진이 디렉팅을 담당한 NCT의 첫 싱글 ‘일곱 번째 감각’이다. 처음 봤을 때는 약간 당황하기까지 했다. 노래도 뮤직비디오도 지나칠 정도로 세련됐던 탓이다. 이걸 첫 싱글로? SM이 EXO 이후 내놓는 가장 큰 프로젝트에?
물론 우리 모두는 ‘일곱 번째 감각’이 생각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시 나는 민희진과 SM이 어딘가 좀 부딪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SM은 자사 아이돌을 기획하고 성장시켜온 오랜 전략이 있다. 이수만과 유영진은 굳건하다. 민희진의 새로운 전략은 거기에 신선함을 더했다. 그럼에도 100% 온전히 민희진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예술적으로 완벽하게 자유를 찾고 싶다면 이전 스테이지는 끝내야만 한다. 그가 방시혁의 완벽한 지지를 얻으며 하이브로 둥지를 옮겨 자신만의 레이블을 만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뉴진스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민희진이 완벽하게 창조한 걸그룹이다. 사람들은  1세대 아이돌을 연상케 하는 청순함이 ‘유사 걸크러시’로 도배된 걸그룹 세계에 질린 사람들을 끌어들였다고 말한다. 나도 걸크러시에는 좀 질렸다. 모두가 블랙핑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만 한 국제적 성공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의 여자친구입니다’ 콘셉트의 걸그룹은 동아시아의 경계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잠깐. 정말 뉴진스가 빠른 성공을 거둔 게 걸크러시에 대한 역작용 때문인가? 그럴 리가. 곧 블랙핑크의 새 앨범이 등장하면 모두가 뉴진스를 살짝 잊어버리고 YG가 잠깐 걸그룹의 신이 내렸을 때 창조했던, 지구 최고의 걸그룹에 찬사를 바칠 것이다. ‘이런 게 바로 걸그룹이지’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변덕스러운 사람들이다.
이쯤에서 결론을 내리자. 이건 어쩌면 ‘아이돌 작가주의’가 개막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나는 뉴진스가 지금 한국 메이저 음악계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인디적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트렌드를 가장 따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2020년대에 등장한 모든 걸그룹 트렌드를 완벽하게 배반한 결과물이 여기에 있다. 당신이 민희진에 대해 주워 들었던 몇몇 키워드들, 인디, 레트로, 청춘, 힙스터, 여름, 첫사랑의 성적인 긴장, 모든 것이 뉴진스에 들어 있다. 민희진이라는 예술가가 내놓은 강박적으로 온전한 첫 예술품이다(동시에 하이브의 도박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팀 버튼이 〈배트맨〉 이후 그걸 뛰어넘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더 자기 마음대로 만들었던 〈배트맨 2〉는 흥행 측면에서 미지근한 반응을 얻었다. 워너브라더스는 다음 배트맨 영화의 감독 자리를 팀 버튼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뉴진스를 한참 파고 있는 지금도, 뉴진스 다음으로 나올 민희진의 걸그룹이 궁금하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 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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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오성윤
    WRITER 김도훈
    ILLUSTRATOR VERANDA STUDIO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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