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통해 만났던 더 넓은 세상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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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통해 만났던 더 넓은 세상

김현유 BY 김현유 2023.05.14
 
아이들은 많은 것을 참 빠르게 배운다. 주변에 슬슬 아이를 갖고 육아를 하는 친구들이 생기는 나이가 된 만큼, 친구와 그들의 어린 자녀를 만나게 되면 나의 몸가짐 하나하나를 조심하려 애쓴다.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된 언행을 보고 배우지 않을까 싶어서. 어린 시절의 작은 경험이 어쩌면 아이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런 마음으로, 어른들은 아이가 볼 작품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신중함을 보인다. 그래서일까? 요즘 유아용 애니메이션이나 방송 프로그램은 어른인 나조차 놀라게 할 때가 많다.
한번은 〈자이언트 펭TV〉의 주인공, 펭수가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모습을 보고 일곱 살 된 조카에게 물었다. “펭수는 남자야?” 내 딴에는 남자 성우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드레스를 입고 있으니, ‘남자인데 왜 여자 옷을 입고 있지?’라는 생각에 던진 질문이었다. 조카는 해맑게 답했다. “삼촌, 펭수는 그냥 펭수야.” 우문현답이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그 답에 흐뭇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나의 조카 세대 아이들은 ‘여자애(혹은 남자애)는 이래야지!’라는 강박이 조금은 덜한 세상에서 자라겠다 싶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참 많은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나와 내 친구들, 이제는 30대가 된 우리의 유년기는 어땠을까. 우리의 어린 시절 역시 누군가의 긍정적인 영향력에 둘러싸여, 더 자유롭고 넓은 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배려받지 않았을까?
내 유년 시절의 기억이 시작되던 1990년대 말, 당시의 어린이 만화라면 대부분이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특히 온갖 종류의 ‘마법 소녀’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케이블이나 종편이 없던 시절, 지상파 채널에서는 유치원이나 학교가 끝나던 오후 4시 무렵부터 여러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는데 나는 이웃 누나들과 함께 이를 챙겨 보곤 했다. 특히 함께 좋아했던 작품이라면 〈달의 요정 세일러 문(이하 세일러 문)〉이나 〈카드캡터 체리〉 〈꼬마마법사 레미〉 등이 있었다. 한 분기가 바뀔 때마다 누나들의 손에는 새로운 마법봉이 들려 있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의 취향도 애니메이션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했는데, 체리가 롤러스케이트를 능숙하게 타는 모습을 보고 부모님께 롤러스케이트를 사달라고 조르다가도 레미가 마법당(〈꼬마마법사 레미〉 속 마녀들이 운영하는 베이커리)에서 과자를 굽는 모습에 혹해 쿠키 굽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해 부모님을 곤란하게 했다. 그러니 우리들의 세계는 분명 만화 속 주인공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넓어졌을 것이다.
크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이지만, 당시 애니메이션의 많은 부분은 어른들의 사정에 따라 정해진 선을 넘지 못했다. 아이들의 정서에 해로울 것이라는 판단 아래 다소 잔인한 장면을 삭제한다거나, 일본 문화에 대한 반감이 높은 시기였던 만큼 일본식 지명과 인명을 한국식으로 바꾸는 등 많은 부분이 수정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보다 보수적이던 심의기관마저 잡아내지 못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세일러 문〉 속 등장인물에 붙은 몇몇 디테일한 설정이다.
〈세일러 문〉의 원작까지 탐독한 팬들에겐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세일러 문〉 시리즈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바로 TV 애니메이션판과 원작 만화는 분위기부터 스토리까지 많은 내용이 다르다는 것. 이는 애니메이션의 연재 속도가 원작보다 빨라 벌어진 차이로, 만화에 나오던 잔인한 장면은 축약되고 애니메이션 감독 재량껏 원작에 없는 설정과 이야기가 더해지곤 했다.
우리 세대에게 익숙한, 1990년대 말에 한국에 방영된 〈세일러 문〉의 감성을 다듬은 이는 애니메이션 2기부터 감독을 맡은 이쿠하라 구니히코다. 그는 〈세일러 문〉의 감독을 맡으며 자신만의 설정을 몇 가지 더했는데, 주로 젠더 및 성소수자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는 다소 평이한 악당 캐릭터들에 여자같이 행동하는 남자, 혹은 남자같이 행동하는 여자와 같은 모습을 더했다. 또 본래 남성이지만 마법을 써서 변신하면 성별이 바뀌는 인물이나 남성의 구애에 목매지 않는 소녀 전사 등 젠더를 넘나드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외행성 전사인 세일러 우라누스와 세일러 넵튠의 관계일 것이다. 원작 만화에서는 이들이 연인 관계라는 사실이 강하게 묘사되지 않은 반면, 이쿠하라 구니히코의 연출에서 두 여성 캐릭터는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완벽한 커플로 재탄생했다. 2023년인 오늘날에도 파격적인 설정인데, 1990년대의 ‘여아용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LGBT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하지만 사실 크게 별일은 없었다. 어쩌면 너무나 보수적이었던 당시 심의기관이 오히려 젠더를 넘나드는 설정 자체를 캐치하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덕분에 아이들은 성역할에 대한 편견이 없을 나이에 〈세일러 문〉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쿠하라 구니히코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세일러 문〉을 보고 자란 2030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21년 실시한 한국리서치의 ‘성소수자 인식 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성소수자를 포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유독 튀는 응답을 하는 모집단이 존재한다. 전체 모집단에서는 해당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이 41%에 불과한데, 2030 여성은 60% 이상이 긍정 응답을 내놓은 것이다. 어떤 세대보다도 전향적인 태도였다.
그 배경에는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어린 시절 즐겨 본 만화에서 보고 배운 점이 있지 않을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되돌아보면 〈세일러 문〉에 등장한 성소수자 캐릭터처럼,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에는 비슷한 이들이 종종 존재했다. 이를테면 〈카드캡터 체리〉 속, 단순한 친구 관계로 보이지 않던 ‘도진’과 ‘청명’의 관계라든지. 이런 캐릭터들은 ‘인간관계가 꼭 남녀 사이로 치환될 필요는 없다’ 또는 ‘누구나 성별을 뛰어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일종의 믿음을 주지 않았을까.
지금은 콘텐츠를 제작하며 성소수자나 다양한 인종을 포용하는 것이 이슈가 되지도 않을 정도로 흔한 일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콘텐츠 산업을 운영하는 디즈니의 경우 남자만이 술탄이 될 수 있다는 관습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며 ‘Speechless’를 부르는 자스민 공주 및 흑인인 캡틴 아메리카를 내놓으며 젠더와 인종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고무할 만한 소식은 또 있다. 〈세일러 문〉과 같이 변신하는 마법 소녀들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 〈프리큐어 시리즈〉는 최근 방영 20주년을 맞이해 ‘남성’ 프리큐어를 만들었다. 〈프리큐어 시리즈〉는 “여자아이들도 뛰어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모토로, 괴력과 초인적 능력을 지닌 마법 소녀들이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이야기를 담는다. 그간에는 ‘여자아이들의 자립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남성 프리큐어는 등장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남성 캐릭터는 무조건 공주를 구하는 왕자, 그리고 여성은 언제나 도움을 받는 공주로 비치지 않을 정도로 시대가 달라졌다. 남성 프리큐어의 출현은 이런 시대를 반영한 변화일 것이다.
젠더리스한 펭수 및 남성 프리큐어의 등장은 지금의 어린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지나봐야 알 일이지만, 그 모습을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은 충분할 것이다. 살다 보면 당연히 성소수자보다는 이성애자를 많이 보게 되고, 젠더리스 패션을 즐기는 이들보다는 젠더 티피컬한 모습을 한 사람을 더 많이 접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소수자인 그들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 색안경을 끼지 않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다면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세일러 문〉을 보고 자란 우리가 편견 너머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성장했듯 말이다.
 
김도균은 카피라이터이자 기획자다. 〈나의 빈틈을 채워주는 교양 콘서트〉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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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김현유
    WRITER 김도균
    ILLUSTRATOR MYCDAYS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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