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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소설> (1) '유령새가 날아다니는 호텔 복도에서' - 강보라

네 명의 소설가에게 시간과 시계에 관한 아주 짧은 이야기를 보내달라 부탁했다.

프로필 by 박세회 2023.10.08
 
시작은 팬티였다. 운동을 마치고 객실로 돌아온 남자는 아까 샤워 중에 깜빡한 양치질을 하며 무심코 침대를 바라보다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침대 위에 던져둔 팬티 한 장이 사라지고 없었다. 짙은 회색에 그보다 더 진한 회색 밴드를 두른, 별 특징 없는 드로즈였다. 양치질을 멈춘 남자는 칫솔을 입에 문 채 다시 한번 꼼꼼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갑, 차 키, 노트북, 셔츠, 양말, 손목시계…. 모든 것이 나갈 때 그대로였다. 청소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새 제품인가요?”
분실 신고를 받은 프런트 직원이 명랑한 어조로 물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중성적이면서도 맑고 풍부한 공기의 질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아니요. 침대 위에 벗어두고 갔다니까요. 남자의 말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는 한쪽 어깨로 받치고 있던 수화기를 반대쪽으로 바꾸며 덧붙였다. 회색이에요, 다크 그레이. 톰 포드 제품이고요.
“아하. 그러니까 수영장에 다녀왔더니 침대 위에 벗어뒀던 남성용 회색 팬티 한 장이 없어졌다는 말씀이시죠?”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묘하게 활기를 띠었다.
“그렇죠. 엄밀히 말하면 수영장이 아니라 피트니스센터지만요. 수영장이 예정보다 일찍 문을 닫는 바람에 러닝머신만 뛰고 돌아왔거든요.”
남자가 비난조로 말했다. 수영장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시계 때문이었다. 10년 전 아내와 결혼할 때 장인에게 물려받은 롤렉스 데이-데이트. 클래식 슈트를 즐겨 입는 이들이 대개 그렇듯, 남자 역시 가볍고 효율적인 스마트워치보다 묵직하고 우아한 오토매틱 시계를 더 선호했다. 그러나 오늘만은 예외였다. 캐리어에 속옷을 넣을 때도 라벨이 정중앙을 향하게 접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가 오늘따라 팬티를 아무 데나 벗어둔 것도 그놈의 롤렉스가 시간을 앞뒤로 마구 돌려버린 탓이었다. 화상회의를 끝내고 시계를 확인했을 때 그것의 바늘은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영장 마감 시간은 7시였고,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기 위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과 피트니스센터가 있는 5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마주친 건 '수영장 운영 종료' 팻말이었고, 리셉션 뒤편의 벽시계가 7시 15분인 걸 보고 깜짝 놀란 남자가 다시 시계를 확인했을 때 그의 롤렉스는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침대 밑이나 소파 틈으음 같은 곳도오오 찾아아보셨을까요오오오….”
직원의 목소리가 늘어진 테이프마냥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여보세요? 남자는 수화기를 붙들고 카펫 위에 서서 자신의 오른쪽 발을 내려다보았다. 호텔 로고가 찍힌 슬리퍼 위에 작고 탐스러운 우윳빛 깃털이 달라붙어 있었다. 뭐지. 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부스스 일어난 깃털이 남자를 조롱하듯 슬렁슬렁 앞뒤로 몸을 흔들었다. 여보세요, 제 말 들려요? 남자가 소리쳤다. 깃털이 그에 반응하듯 천천히 가로로 눕더니 슬리퍼 위로 5cm가량 둥실 떠올랐다. 뭐야, 씨발. 남자가 슬리퍼를 벗어 던지며 흠칫 물러났다. 그의 손을 벗어난 수화기가 바닥에 누워 지지직거리는 잡음을 흘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깃털은 사라지고 없었다.
좀 쉬어야겠어. 남자는 목욕 가운 차림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이불을 들추면서 보니 방금 본 것과 똑같은 깃털이 시트 여기저기에 듬성듬성 흩어져 있었다. 이불 속이 터진 거였군. 남자는 안심한 얼굴로 그것들을 손으로 쓸어냈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던 남자의 손이 뉴스에서 멈췄다. 그는 볼륨을 적당히 줄인 뒤 이불 속 깊이 몸을 묻었다. 흥분한 앵커의 목소리가 희미한 백색 소음이 되어 방 안을 떠다녔다. 거대한 산불이 먼 나라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검은 옷을 입은 교사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죄 없는 시민을 칼로 찌른 전과자가 심신미약을 이유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졸음이 밀려들었다. 남자는 집보다 호텔이 편했다. 바깥의 소란이 차단된 호텔은 새 둥지처럼 아늑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익명의 누군가가 시트를 갈고 휴지통을 비우는 생활의 편의 또한 마음에 들었다. 아내와 별거하면서부터는 실제로 집보다 호텔에 더 자주 머물렀다. 벌이가 나쁘지 않고 대부분의 업무를 재택으로 해결할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대체 누가 훔쳐갔을까. 남자는 비몽사몽간에 티브이를 보며 생각했다. 어느 틈에 화면이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태국과 버마 국경 어딘가에 서식한다고 알려진 희귀 새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유령새는 흡혈새입니다.
순간 티브이가 저절로 볼륨을 키우며 남자를 깨웠다. 동남아 국적으로 보이는 두 사내가 횃불을 들고 컴컴한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 새는 동물의 피를 빨아먹는 것은 물론, 때에 따라 사람도 공격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내레이터가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유령새를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자는 손으로 이불 속을 더듬었다. 리모컨이 보이지 않았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청이 터질 지경이었다. 상의를 벗은 사내들이 서로의 등과 뺨에 피처럼 보이는 붉은 액체를 발라주었다. 새를 잡으러 가는 건지 새에게 잡히러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티브이 앞으로 걸어간 남자가 모니터와 연결된 코드를 확 잡아당겼다. 객실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남자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 보니 프런트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젊은 여자의 팬티가 사라졌어도 이렇게 안이하게 대처했으려나. 남자는 투덜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이불 아래 고여 있던 찬 공기가 그의 사타구니 사이를 기분 좋게 파고들었다. 남자는 목욕 가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단숨에 자위를 끝낸 뒤 씻지도 않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Do Not Disturb’ 푯말을 문고리에 내건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늦은 저녁에 하우스키퍼가 객실 청소를 할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누가 아나. 이번에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수영 팬츠가 제 발로 유유히 사라질지.
지하 1층에 내린 남자는 육중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바의 구석에 앉아 있던 친구가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친구는 소설가였는데 남자는 그의 소설을 한 번도 끝까지 읽은 적이 없었다. 친구와는 죽이 잘 맞았지만 그가 쓴 이야기는 뭐랄까, 너무 폼을 잡는달까, 아무튼 남자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라벨만 예쁜 외국 생수처럼 싱겁고 텁텁했다.
“별일이다. 네가 늦을 때도 다 있고.”
친구가 남자를 보며 픽 웃었다. 남자가 체념한 얼굴로 팔을 뻗어 시간을 확인했다.
“일찍 나온다고 나왔는데 역시….”
“역시 뭐? 오는 길에 예쁜 여자라도 만났어?”
남자가 대답 대신 팔에 찬 롤렉스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이제 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롤렉스가 금빛 분침을 맥없이 아래로 떨어뜨렸다. 친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가 아니야. 남자가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바텐더가 두 사람 앞에 위스키 한 병과 얼음이 든 유리잔 두 개를 내려놓았다.
“…어쩌면 상관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팬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친구가 입을 뗐다. 또 시작이로군. 남자는 생각했다. 상관없는 이야기인 척하면서 아주 상관 없지만은 않은 이야기로 은근히 변죽을 울리는 것. A에서 Z로 기세 좋게 건너뛰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A로 뒷걸음질 치는 것. 친구, 아니 소설가의 특기다.
“나 작년에 자료 조사한다고 방콕 갔던 거 기억하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때 묵은 호텔에서 휴대폰을 하나 주웠거든. 객실 복도에 떨어져 있었는데 케이스가 ‘헬로키티’라 쉽게 눈에 띄었지. 왜 있잖아, 애들 쓰는 알록달록하고 입체적인 케이스. 근데 보니까 설정이 한국어로 돼 있더라고. 배경화면도 한국 남자 아이돌이고.”
“이 자식, 설마.”
“맞아. 처음에는 통화 목록만 적당히 훑어볼 생각이었어. 제일 최근에 통화한 사람한테 전화하면 주인이랑 금세 연락이 닿을 테니까.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진첩이며 그 안에 있는 동영상까지 모두 훔쳐본 후였지.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어. 딱히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애초에 키티가 폰을 잠가두지 않은 탓도 있으니까.”
소설가가 휴대폰 주인에게 멋대로 별명을 붙이며 입에 든 얼음을 아작거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특별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관광차 방콕에 온 평범한 한국 여자일 뿐이었지. 그래도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더라고.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만나서 전해주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상한 논리지만 말이야.”
“그래서, 키티 양은 만났어?”
“응. 전날 술 마시고 필름이 끊겼는지 다음 날 아침에야 연락이 오더라고. 삼십대 초반, 아니 이십대 후반쯤 됐으려나? 보자마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묻더군. 그냥 프런트에 맡기지 그랬냐면서. 망설이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했지. 휴대폰을 훔쳐본 게 미안해서 사과하고 싶었다고. 실은 선물로 주려고 책도 한 권 챙겼거든.”
“책? 무슨 책?”
남자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갈라졌다.
“내 책은 아니니까 걱정 마.”
소설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 키티가 울기 시작했거든. 화내지도 않고 로비에 서서 계속 울기만 했어. 내가 준 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그렇게 오 분쯤 서 있다가 책을 돌려주고 조용히 돌아갔지. 젠장, 내가 뭔가 단단히 잘못한 것 같더라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게 내 팬티 이야기랑 무슨 상관이지?
“상관없지. 아직은.”
소설가가 대답했다. 바텐더가 두 남자 앞에서 말없이 잔을 닦았다. 프로페셔널한 침묵이었다.
“그렇지만 인생의 변화는 뭔가를 잃어버리면서 시작되는 법이니까.“
소설가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매사 이런 식이니 그런 소설밖에 쓸 수 없는 것이다. 손에 잡힐 만하면 미끄러지는, 알듯 모를 듯한 이야기들.
늦은 밤, 소설가와 헤어진 남자는 비틀거리며 객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와 함께 남자를 복도에 토해냈다. 복도의 조명이 모두 꺼져 있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플래시를 손목에 비추자 롤렉스의 초침이 고장 난 나침반처럼 제자리에서 엷게 떨렸다. 남자는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소설가가 복도 끝에서 자신의 팬티를 들고 나타나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미안해. 범인은 나였어. 남자는 만일 그런 상황이 온다면 자신 또한 키티처럼 울음을 터트릴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건 겪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령새에 대한 장면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뱀파이어>에서 빌려왔다.
 
 
 
 
Who’s the writer?
강보라는 단편소설 ‘티니안에서’로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강보라
  • ILLUSTRATOR KASI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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