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좋아하게 되면서 여행이 목적성을 갖기 시작했다. 아사쿠사의 갓파바시에서 그릇들을 찾고, 베네치아의 무라노섬에서 유리공예품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물건들이 책갈피가 되어 언제고 오랜 과거의 시간을 정확하게 눈앞에 펼쳐 보일 것이 분명하므로. 식상한 비유지만 정말 그런 걸 어쩌나. 사물에 대한 온갖 기억들로 가득 찬 은희경의 산문집 <또 못 버린 물건들>은 그런 책갈피들의 모음집이다. 책을 읽으며 등장한 물건들로 가득 찬 그녀의 공간을 상상한다. 시애틀의 개라지 세일에서 3달러 정도에 산 스코틀랜드산 구둣주걱, 이토야에서 산 지우개가 달린 원형 연필, 공항 면세점에서 시간에 쫓기다 만년필인 줄 알고 산 거액의 몽블랑 형광펜들로 이루어진 그녀의 공간은 그야말로 기억의 갤러리가 아닐까? ‘술이 잔을 거치지 않고 허공에서 입안으로 곧바로 전달되는 듯한’ 우스하리 잔에 맥주를 마시는 작가의 취향에 가슴 깊이 공감하며 그녀의 소설 주인공이 한 말을 재인용해본다. “가볍게 살고 싶다. 아무렇게라는 건 아니다.” \ 박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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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시대 단절의 구간
박세진 / 마티
최근 몇 년 동안 패션은 급변했다. 패션의 변덕이 하루 이틀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새로운 유행을 ‘학파’에 비유한다면 최근 패션계에 일어난 변화는 가히 새로운 ‘사조’라 할 만하다. 아예 가치 체계가 뒤집혀 버렸으니까. 구찌가 등용한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짝퉁 럭셔리’의 미감을 전유하고, 발렌시아가가 등용한 뎀나 바잘리아가 체형과 성별을 무시한 옷들을 내놓으며, 루이 비통이 등용한 버질 아블로가 세상 모든 것을 샘플링한 듯한 패션을 선보인 이래로 ‘좋은 옷이란 장인들이 좋은 소재로 잘 만든 옷’이라는 공식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하이패션과 스트리트 패션의 경계는 극도로 옅어졌고, 옷의 범주를 넘어 모든 것이 패션의 영역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패션계는 성평등, 다양성, 지속가능성 같은 온갖 정치적 이슈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패션 칼럼니스트 박세진은 이 흐름을 하나의 총체적 움직임으로 제시하면서도 개별적 양상의 의미를 파헤친다. 그리고 동시에, 이 비범한 시대가 막바지에 다다랐음을 감지하고 이후의 패션을 조망한다. 오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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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더, 경성을 누비다
김기철 / 시공사
라이더와 경성이라니, 제목만 보면 대체역사소설이거나 타임워프 판타지 소설 같지만 전혀 아니다. 2023년의 서울과 흡사하게, 100년 전 경성은 배달 음식을 싣고 달리는 라이더가 가득한 도시였다. 물론 오토바이가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배달 중 교통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고, 주로 배달하던 음식이 설렁탕과 냉면이었으며, 배달비를 둘러싸고 라이더와 업주 사이 갈등이 잦았다는 부분은 현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책은 100년 전의 신문과 잡지를 통해 그 시대를 살던 평범한 이들의 모습을 포착해 보여준다. 주식 투자에 실패해 전 재산을 잃고 음독 자살을 시도한 20대 남성,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어디선가 등장하는 마스크족들, 입시 시험에 늦지 않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10대 학생, 가족끼리 한 끼 외식하기 만만한 장소였던 백화점, ‘마뽀(마르크스 보이)’ ‘엥꺼(엥겔스 걸)’ 등 별걸 다 줄인 줄임말까지. 생각보다 ‘모던’한 그 시대의 여러 삶을 훑다 보면, 사람 사는 풍경이 세대와 관계없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김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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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과 한국
김봉현 / 한겨례출판
힙합은 몇 살일까? 힙합의 본고장 미국에선 1973년을 힙합의 원년으로 본다. 그러니까 올해가 힙합 50주년인 셈이다. 올해 초 그래미 어워즈가 힙합을 존중한다는 메시지를 선보였고 미국 전역에서 관련 행사가 열렸다. 그럼 한국 힙합은 어떨까? 힙합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총 19권의 책을 쓴 저자 김봉현은 1989년 홍서범이 발표한 ‘김삿갓’을 그 시작으로 본다. 그는 책의 전반부에 홍서범과 서태지로 시작해 드렁큰 타이거, 다이나믹 듀오를 거쳐 쇼미더까지 이어지는 한국 힙합신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훑어 내린다. 그 후엔 힙합에 대해 잘못 알려진 인식을 해소하는 데에 집중했는데, 예를 들면, ‘총 쏘고 마약 팔아보지도 않았으면서 힙합을 논하는 건 어불성설이다’와 같은 힐난에 맞서는 식이다. 또한 2013년 발발한 디스전 ‘컨트롤 대란’과 2017년 방영된 <고등래퍼> 당시 기성 언론이 힙합을 얼마나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봤는지 뉴스 패널로 참석했던 경험을 빗대어 꼬집는다. 빈지노, 딥플로우 등 여러 힙합 뮤지션과 나눈 대화를 곁들여 재미를 더했다. 박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