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에스콰이어와 헤밍웨이와 그의 요트 필라호와 청새치에 얽힌 90년 묵은 썰
<에스콰이어>의 창간 90주년을 맞아 작가 데이비드 코긴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한 원고를 썼다. 그 대문호와 <에스콰이어>의 인연에 대해서, 그리고 그로 인해 <에스콰이어> 편집팀에 지금껏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대해서. 그가 이 원고의 첫머리에 내민 문장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영웅을 만나지 말 것. 이미 죽은 사람이라면 특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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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자신의 낚싯배 필라(Pilar)호에 탄 모습. 그가 이 배를 사는 데에는 <에스콰이어>가 큰 역할을 했다. ⓒ BETTMAN/GETTY IMAGES

헤밍웨이가 아바나에서 즐겨 찾던 술집 플로리디타에는 헤밍웨이의 황금상이 세워져 있다. 이 술집은 이제 술을 마시는 곳이라기보다 관광 스폿에 가까운 곳이 되었다. ⓒ ADALBERTO ROQUE/GETTY IMAGES
헤밍웨이는 플로리디타의 단골손님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술집에서 보낸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이 너무나 사랑한 배 필라호를 타고 물 위에서 보냈다. 그는 거의 반평생에 가까운 기간 동안 필라호를 소유했다. 그가 이 배에서 한 건 물론 낚시였다. 그의 자녀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아내들, 전설적인 낚시꾼들, 스타 영화배우들, 출판업자들, 짝을 찾는 남자들, 아첨꾼들 그리고 훗날 헤밍웨이와 척을 지게 된 많은 이도 이 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헤밍웨이가 필라호를 인수한 과정은 <에스콰이어>의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헤밍웨이는 <에스콰이어>와 함께 20세기 남자들의 라이프스타일 일부를 정의했다. 필라호가 어디에서 와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를 훑어보면 그 배 주인이 우리에게 남긴 복잡한 유산이 드러난다. 유명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 과장되어 전해진다. 헤밍웨이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들 가운데서도 이 이야기는 사실이라는 이점이 있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는 어려우려나. 아무튼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에스콰이어>의 탄생과 이후 15년의 세월을 함께한 초대 편집장 아널드 깅리치가 창간호를 구상할 때 원한 것은 뚜렷했다. 모험과 레저로 점철된 삶을 상징하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의 글을 싣는 것이었다.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글을. 그는 헤밍웨이에게 “우리 잡지는 남성 패션을 다루면서도 한편으로 풍만한 가슴 털은 물론 불알 두 쪽 같은 배짱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를 설득했다. 해당 모토는 잡지의 마스터헤드에는 쓰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헤밍웨이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그 대가로 그가 원하는 것도 확실했다. 3000달러였다. 그가 가진 예금 3500달러에 그 돈을 더하면 38피트 크기에 선실 두 개짜리 크루즈선을 살 수 있었다. 3000달러라는 단위를 가늠하기 좀 어려울 수도 있겠는데, 당시 <에스콰이어>가 헤밍웨이에게 지불한 해당 원고료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7만 달러다. 그 원고료는 장차 헤밍웨이가 멕시코만류에서 낚시를 하고, 스페인에서 투우를 보고,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을 떠나는 데에 사용될 것이었다.
헤밍웨이의 희망사항은 더 있었다. 그는 에스콰이어에서 가장 많은 원고료를 받는 필자여야 했다. 또 그의 글에 어떠한 수정도 가해서는 안 됐다. 그 외에는 조건이 없다고 했다. 그에게는 정말로 그 외의 무엇도 필요 없었다. 깅리치는 그 조건들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때는 작가들이 정말로 유명 인사인 시대였다. 작가들은 게리 쿠퍼와 함께 여행을 다녔고, <라이프>지에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오늘날의 작가들은 원고료로 보트를 사지 못한다. 보트를 타는 비용이 경비 처리라도 된다면 그것에 만족한다.
헤밍웨이는 브루클린에 있는 휠러 조선소에 가서 배를 한 대 주문했다. 다이키리를 주문할 때처럼 배도 맞춤형으로 제작했다. 혹시 배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배를 주문한다는 건 스케일이 엄청나게 차이가 날 뿐, 어쩌면 슈트를 맞추는 것과 비슷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맞춤 정장은 완성되는 데에 대체로 4주에서 6주 정도가 걸린다. 휠러 조선소는 2주 만에 배를 만들었다. 그들은 배를 코니 아일랜드 크릭에 띄운 다음, 배의 주인이 뿌듯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플로리다의 한 선착장까지 배달했다.

필라호는 현재 아바나에 있는 헤밍웨이의 자택 바깥, 쌓인 벽돌 위에 놓여 있다. ⓒ DAVID COGGINS
헤밍웨이는 직접 필라호를 몰고 키웨스트에서 쿠바로 이사했다. 운항 도중 엔진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하자 그는 트롤링 모터(작은 선외 간이 모터)를 썼다. 마지막 2마일을 이동하는 데 3시간이 걸렸다. 날이 어두워지고 마침내 배가 육지에 다다르자 쿠바 당국은 배를 세웠다. 늦은 밤 천천히 접근하는 배라면 밀수업자가 타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헤밍웨이는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지인 덕분에 쿠바에서의 첫날 밤을 감옥에서 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부분만 빼면, 멋진 여행이었다.
필라호는 청새치들이 오는 시기에는 거의 멕시코만류로 나가 있었다. 헤밍웨이는 지금도 영국 앤윅에서 생산되는 하디(Hardy)사의 릴과 7피트짜리 낚싯대들을 가지고 바하마까지 가서 낚시를 했다. 그 시절 낚시꾼들은 전에는 잡아본 적 없는 종류의 커다란 물고기들을 무수히 낚아 올렸다. 그전까지 청새치, 황새치, 참다랑어, 돛새치는 낚싯줄이 가닿지 않을 만큼 깊은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이었다. 다만 요즘도 그런 물고기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마시라.
헤밍웨이는 생활 습관도 세심하게 바꾸었다. 하얀 햇빛 가리개를 묶음으로 사서 쓰고 다녔고, 물고기와 싸울 때는 공복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아침 식사로는 빵 한 쪽 그리고 가끔은 필라호를 정박해 둔 코히마르로 가는 길에 딴 아보카도 하나 정도만을 먹었다. 다만 바다에 나가서도 좋아하는 술을 마실 수 있도록 그 재료는 끊기지 않게 준비되어야 했다. 고든스 진, 코코넛워터, 라임즙, 비터스 그리고 잔을 차갑게 유지하기 위한 많은 양의 얼음을 종이 타월로 감싸 챙겼다. (당시에는 예티 텀블러가 없었다.)
필라호 역시 드라마틱한 헤밍웨이의 삶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다. 바로 옆 선실에서 여성의 남편이 코를 골며 자는 동안 헤밍웨이가 다른 선실에서 간통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헤밍웨이는 정중할 때도 있었지만 (그는 혼자 있기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걸 좋아했다) 동시에 거만했으며, 성질이 불같았고, 극렬한 경쟁심마저 갖고 있었다. 물고기가 기척을 보이지 않는 시기를 그는 굉장히 지루해했다. 가끔은 바다새를 총으로 쏘아 손님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한번은 자기의 두 다리를 쏘았다. 온갖 종류의 총, 술 그리고 배. 역사적으로 봐도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조합은 아니다.
어떤 신화들은 방대하며 그 안에 수많은 모순이 존재한다. 헤밍웨이에 관한 신화들은 확실히 그렇다. 이런 경우에는 실제 장소에서 찾을 수 있는 사실들을 살펴보는 게 좋다. 혹은 그곳에 남아 있는 사실들을 말이다. 플로리디타가 모든 것이 퇴색되어가는 공간의 인상을 준다면, 헤밍웨이 생가는 시간이 지나도 옛 위상이 그대로인 듯한 느낌을 준다. 내가 그곳을 방문한 건 지난 8월이었다. 허리케인이 다가오는 시기여서 공기가 축축했다. 핀카 비히아는 소박한 시골집이 아니었다. 수영과 테니스를 즐기고, 에바 가드너 같은 미녀 영화배우를 초대할 수 있는 호화 시설이었다.
나는 흔치 않은 기회로 집 안 투어를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방문객은 열린 창을 통해 들여다보기만 할 수 있다.) 벽에는 자연사박물관을 열 수 있을 만큼 많은 동물 머리가 걸려 있었다. 거실 의자들은 놀랍게도 꽃무늬 커버로 덮여 있었다. 아마도 남성적인 실내 장식을 상쇄하고자 한 네 번째 아내 메리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의 집 화장실에는 손 닿을 거리에 책장이 있었다. 체중계 옆에 있는 벽에는 그가 연필로 날짜와 자기 몸무게를 써놓은 메모가 있었다. 가끔 무게가 늘었을 때에는 “점심을 많이 먹었다”는 해명이 붙어 있기도 했다. 숫자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하는 것 같으면, 그는 수영을 더 하고 술을 덜 마시겠다고 다짐했다. 스키니 다이키리도 그만 자제해야 했을 터다. 그의 집 벽장에 화이트 벅스(하얀 여름 구두의 일종) 한 켤레가 있는 걸 발견했을 때 화이트 벅스 애호가인 나는 잠깐 흥분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비록 그가 더 좋아했던 건 갈색 가죽 샌들과 닳아 빠진 로퍼이긴 했지만 말이다.
집 밖으로는 헤밍웨이가 동네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쳤던 듬성듬성한 잔디 마당이 펼쳐져 있다. 바깥을 바라보며 그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 들판 바로 옆에서 헤밍웨이는 자신이 무척 좋아하며 많은 돈을 걸기도 했던 도박인 닭싸움에 내보낼 수탉들을 훈련시켰다. 그 생각을 하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리조트에나 있을 법한 커다란 수영장은 오래도록 빈 채로 남겨져 이제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에바(에바 가드너)가 나체로 수영하던 풀은 그런 모습으로 전락했다. 테니스 코트가 있던 자리에는 콘크리트를 부어두었다. 그리고 여기, 골이 진 금속 지붕 아래에 필라호가 놓여 있다. 감동적이고, 심지어 고귀하기까지 하다. 잠깐 망명 중인 나이 든 왕족 같다. 하지만 실제로 이 배가 있어야 할 곳은 저 아래 코히마르다. 육지에 올라와 있는 배는 물을 벗어난 물고기다. 탈 수 있는 계절이 지났거나, 수리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필라호의 경우처럼 낡아가는 유물이다.
필라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들 중에서 가라앉지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배들 중 하나다. 날렵하다기보다는 탄탄한 모습으로 실용적이기보다는 우아한 느낌을 풍긴다. 38피트짜리 선체는 헤밍웨이가 선택한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어 더욱 위용이 넘친다. 선실은 약간 큰 편이어서 8명이 잘 수 있다. 헤밍웨이의 침상은 그의 덩치를 수용할 수 있도록 넓혔다. 선미는 1피트가량 부서져 있었다. 선미의 가로대 전체에 걸쳐, 잡힌 물고기들을 더 쉽게 갑판에 들어 올릴 수 있는 롤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높은 위치에서 좀 더 유리하게 배를 몰 수 있도록 선실 위를 가로지르는 플라잉 브리지를 추가했다. 한번은 그가 플라잉 브리지에서 떨어져 아래 갑판으로 추락하는 일도 있었다. 헤밍웨이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날 하루 종일 마신 술과는 아무 관계 없는 일이었다.

헤밍웨이가 갖고 있던 에스콰이어 잡지들 중 한 부. 곳곳에서 그가 수기로 쓴 수정 사항 메모를 볼 수 있다. ⓒ DAVID COGGINS
필자와 편집자는 계속해서 쉽게 연락을 주고받았다. 깅리치는 광고주들로부터 큰 옷을 받으면 그 옷들을 헤밍웨이에게 보냈다. (칼라 사이즈는 17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그는 <에스콰이어>에 작은 인쇄 실수나 편집 오류라도 있으면 격분했다. (문제는, 잡지 매체에는 언제나 이런 실수가 있다는 점이다.) 헤밍웨이의 집에서 나는 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옛 시절 <에스콰이어> 잡지들을 볼 수 있었다. 잡지의 여백에는 그가 수기로 쓴 편집에 대한 불만과 교정 메모들이 적혀 있었다. 어떤 글이든 고쳐야 할 부분이 있었다.
깅리치도 헤밍웨이의 배에 낚시를 하러 온 적이 있었다. 뱃멀미를 했지만, 자신이 가진 최대의 친절을 보여주는 헤밍웨이의 매력에 이끌려 계속 함께했다. 깅리치는 기질상 심해어를 잡는 어부라기보다는 송어 낚시꾼에 가까웠다. (송어 애호가로서 그대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바다, 형제여!) 하지만 헤밍웨이는 미시간 강을 넘어갔다. 그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며 투지 넘치는 물고기를 잡고 싶어 했다. 인근 갯벌에서 여을멸(bonefish, 정어리와 비슷하게 생긴 생선의 일종) 따위나 잡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쿠바와 바하마 주변에서 여을멸을 잡아본 적이 있다. 플라이 낚싯대로 5파운드짜리 여을멸을 잡는 건 꽤 할 만한 일이다. 8파운드짜리라면 자랑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여을멸을 ‘할머니용’ 물고기라고 불렀다. 솔직히 마음이 상한다, 어니스트 씨.
누군가를 잘 알고 싶다면 같이 낚시를 가보라는 말이 있다. 때로는 ‘함께 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필라호에서 낚시를 하는 경험을 하고 싶어 했고, 결국 소원을 이뤄 배를 타고 나간 사람들은 그 이상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헤밍웨이가 소리를 지르며 명령을 내리고 물고기를 놓친 이들을 비난하기 시작하면, 청새치와의 싸움에 대한 손님들 마음속 부담감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러다 누군가 자기보다 더 큰 물고기를 잡으면 그는 또 분노했다. 한번은 마이크 스트레이터가 역대급 크기의 청새치를 잡아 올린 적이 있었다. 헤밍웨이는 그 청새치를 공격하는 상어들에게 총을 쏘려고 했다. 물에는 더 많은 피가 퍼졌고, 더 많은 상어가 몰려오더니 거대한 물고기의 등 전체를 뜯어버렸다. 재능과 자부심을 가진 낚시꾼이었던 스트레이터는 헤밍웨이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헤밍웨이 역시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떤 사람들, 아마도 헤밍웨이를 너무 많이 읽는 남자들은 청새치와 어떻게 싸우느냐가 자신의 삶을 정의한다고 생각한다. 중압감을 견디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가? 믿든 말든 당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소중한 물고기를 놓친다는 건 안타깝게도 평생 마음에 남는 일이다. 많은 물고기를 놓쳐본 입장에서, 그중 몇 번은 내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지만 잊어버릴 수 없었다. 미네소타 바이킹스의 엄청난 플레이오프 패배가 나를 비롯한 무수한 팬들의 마음속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된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헤밍웨이가 직접 말했듯 그의 인간관계는 대개 서서히 멀어지다가 한순간에 끝났다. 깅리치와 마지막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불화가 있었다고 한다. 헤밍웨이가 사망한 후 깅리치는 그를 ‘고기 낚시꾼’이라고 불렀다. 송어 낚시의 정제된 기술을 중시하는 낚시꾼으로서 헤밍웨이를 비방한 것이다. 두 사람이 사이가 좋았던 시절, 그러니까 <에스콰이어> 기고를 결정했던 무렵 헤밍웨이는 장난스럽게 “우리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내게 전해주기를” 하고 끝맺음하는 편지를 깅리치에게 보냈다. 헤밍웨이가 실제로 자신이 염원했던 삶을 살게 되었을 무렵, 모든 것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부유했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사라져버린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낚시와 글쓰기 두 분야 모두에서 헤밍웨이는 높은 악명과 엄청난 성공을 동시에 얻었다. 그리고 그는 욕망의 포로가 되었다. 남은 건 그의 책과 글, 편지와 사진, 신화와 백래시, 놀라운 재기와 기이한 행동 등이다. 그중 무엇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간편한 답은 없다. 그는 친구들과 나누는 우정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또한 많은 친구를 글로 무너뜨렸다. 결혼생활은 매번 좋지 않은 결말을 냈다. 그는 자연의 세계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피를 보는 스포츠를 즐겼다. 그의 책들은 좋았다. 이제 우리는 그의 스타일에 거의 면역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책들이 나온 시대에는 얼마나 더 좋은 책이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다 그의 책들은 나빠졌다. <강 건너 숲 속으로(Across the River and into the Trees)>보다 나쁜 책은 없다. 나는 그가 쓴 소설들 다수를 아주 좋아한다. 그가 살았던 곳들, 그가 두려움 없이 자기 삶을 만들어간 방식을 아주 좋아한다. 나 역시 낚시를 한다. 하지만 나는 물고기를 잡은 다음 놓아주는 쪽이다. 그의 삶에 비하면 내 삶의 스케일은 아주 작다. (아마 우리 모두가 그럴 것이다.) 남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견해에 내가 부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삶을 낭만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든다. 이탈리아 전선에 섰던 10대, 문학의 파리, 키웨스트, 케냐, 베니스, 케첨. 여러분도 잘 아는 이름들일 것이다. 우리는 헤밍웨이가 살았던 그 세계를 그리워한다. 발견되기 전의 그 세계, 전설적인 편집자들에게 전보를 보내고, 브라스리 리프에서 맥주를 마시고, 베니스 대운하가 내려다보이는 그리티 팰리스 호텔에 머무는 그 세계를 그리워한다. 베니스에서 열린 디너 파티에 그는 10파운드짜리 캐비아 통조림을 가져가기까지 했다. 그가 인생에서 거쳐간 장소들은 지금도 하나하나 따라가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도 그때와 같을 수는 없다.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위해, 자기 앞에 놓인 마티니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끝없이 사진을 찍는 누군가를 먼저 만나게 될 테니 말이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삶을 낭만적으로 인식했다. 적어도 인생의 전반부는 그렇게 보았다. 쿠바에 있으면 헤밍웨이가 뭔가가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을 무렵, 인생 말년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한때 필라호는 헤밍웨이가 살면서 원한 모든 것을 대표했다. 이제 그 배는 예전 그 자리가 아니라 우아하게, 어쩌면 조금은 슬프게, 그늘진 시멘트 블록 위에 놓여 있다. 헤밍웨이는 은유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상황은 어쩐지 적절해 보인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 배를 좋아했고, 핀카 비히아 역시 감동적이었기에 그곳을 떠날 때는 나 스스로 놀랄 정도로 슬픈 기분이 들었다. 결점을 가진 인물들을 포함해, 영웅적인 인물들은 늘 우리에게 묘한 감흥을 안긴다. 그들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지는데, 물론 이미 죽어 무덤 속에 있는 그들에게 인정을 받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Credit
- EDITOR DAVID COGGINS
- ART DESIGNER 박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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