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여행지의 한 집에서 몇 주, 몇 달을 머물렀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pt.1
여행지의 한 집에서 몇 주, 몇 달을 머물러 보았다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도시와 여행과 삶이 어떤 형태로 엉켰을까? 집 안의 빛과 소리와 냄새는 그 도시의 인상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여섯 명의 여행 애호가에게서 한동안 머물렀던 이국의 집에 대한 원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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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Galloway, Scotland
스코틀랜드 시골 저택에 스미던 한기와 이후의 삶
최정묵(마이크로 커피 로스터)

첫눈이 오던 날 침실의 풍경.
이 집에 처음 당도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랬다. “이런 집에서 생활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당시 자전거로 영국을 횡단하던 우리 부부가 거의 매일같이 좁은 텐트에서 잠을 청한 탓도 있었겠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아마 누구라도 자연히 그렇게 생각하게 될 터였다. 스코틀랜드 서남쪽의 작은 시골 마을 뉴갈러웨이에 자리한 이 고졸한 저택에 들어선다면 말이다. 오래됐지만 낡았다기보다는 외려 시간을 견디며 단단해진 느낌이 감도는 벽돌 건물, 넓은 복도에 층층이 깔린 빨간 카펫, 아이보리 톤의 벽지, 아마도 대를 이어 물려졌을 고풍스러운 가구들, 하얀색 나무 창틀, 그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너른 밭과 숲…, 3층 규모의 거대한 저택은 우리가 가진 ‘집’에 대한 인식과 다른 종류의 포근함으로 그득했고, 120년의 역사는 그간 여러 번 바뀌었을 거주자의 손길을 견디며 집 안 곳곳에 고유의 역사를 쌓아두고 있었다. 웜샤워즈(자전거 여행객의 공동체 정신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무료 환대 서비스)의 호스트로 우리를 맞아준 앨리슨과 리처드가 이 집을 선택한 이유도 아마 우리가 짧은 밤과 낮 동안 느낀 감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늦여름, 응접실 소파에서 손뜨개질하는 아내.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우리에게는 그로부터 한 달 후 이 호기심을 충족할 만한 우연찮은 기회가 생겼다. 발단은 작은 비극이었다. 아내가 여행 중에 생긴 염증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고, 의사에 말에 따르면 수술 후 적어도 한 달은 자전거를 탈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까지 돌아본 후 다시 또 다른 나라로 향하고 있던 우리는 그렇게 별수 없이 여행을 조기 마감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때 SNS로 사연을 접한 앨리슨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가 머물렀던 스코틀랜드의 저택으로 돌아와 몸을 추스르지 않겠느냐고. 앨리슨과 리처드는 재혼 후 노후를 보내기 위해 그 저택을 구매했고, 그때는 주말에만 머무르던 터라 가능한 제안이었다.

지붕 공사를 마무리 중인 뉴갈러웨이의 저택.
대신 그들은 우리에게 다양한 집 보수 작업을 부탁했다. 우리의 심적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던진 너스레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우리는 그들이 집을 비우는 주중 동안 부탁받은 작업들을 열심히 완수했다. 건물 외벽의 아이비와 숲에 자꾸만 번지는 가시덤불을 제거하고, 겨울이 오기 전에 필요한 장작을 잘라 쌓아두며, 일주일에 한두 번은 집 전체를 청소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호스트가 장을 봐놓은 일주일치 식량을 바탕으로 레시피를 검색해 저녁을 뚝딱 만들어 먹었다. 넓은 집에 둘만 있었기에 밤에는 그 커다란 집이 더욱 조용하게 느껴졌다. 9월의 스코틀랜드는 해가 지고 나면 퍽 쌀쌀했다. 부엌이 제일 따뜻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함께 부엌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난방과 요리를 동시에 도와주는 커다란 레인지 쿠커 스토브를 쉴 새 없이 켜놓은 채로. 상단의 동그란 철판을 제거하면 냄비나 프라이팬을 얹어 데울 수 있고, 아래쪽에는 오븐으로 쓸 수 있는 두 칸의 공간이 있는 그 등유 스토브를, 아내는 한국에 돌아가면 꼭 하나 갖고 싶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호스트가 저택을 찾은 주말에도 일을 했다. 넷이서 함께. 우리는 잔디 정원에서 빵과 베이컨, 달걀 프라이, 통조림 콩으로 구성된 영국 스타일의 아침을 먹고, 곧장 집수리를 시작해 오후 늦게까지 정원을 손질하거나 고목을 자르거나 무언가를 고쳤다. 그리고 저녁에는 두 호스트가 만들어준 근사한 저녁을 먹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늘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펍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펍의 TV에서는 주말 저녁마다 방영되는 듯 보이는 퀴즈쇼가 한창이었고, 우리는 젠가 같은 보드게임을 하거나 우리의 호스트들이 동네 주민들과 섞여 수다 떠는 것을 반의 반쯤 알아들으며 맥주를 홀짝였다.

집 앞 늪지대의 산책 풍경.
시간이 지나 우리에게는 다시 한번, 이 집에서 생활해볼 기회가 있었다. 두 사람이 크리스마스 연휴를 함께 보내자고 제안해온 덕분이었다. 당시 우리는 영국과 독일을 거쳐 프랑스를 여행 중이었고, 추위를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 그들이 건네준 배려를 덥석 잡았다. 겨울의 스코틀랜드는 해가 너무도 짧았다. 오전 10시쯤 날이 밝고, 오후 3시 반쯤이면 벌써 사위가 어두웠다. 그마저도 비가 내리기 일쑤여서 집 안 분위기는 늘 어둡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 영국인들에게는 다른 불빛이 필요하기에 벽난로가 발명된 게 아니었을까? 거의 매일 밤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서너 시간 장작에 불을 붙였다. 아내는 당시 취미였던 손뜨개질을 했고 나는 텐트에서 그간 손도 대지 못했던 여행 사진을 정리하거나 길에서 본 것들을 작은 공책에 그림으로 그렸다. 너무 조용해서 라디오를 자주 켜두었다. BBC 라디오나 클래식FM 같은 채널들을. 집에만 있으면 좀이 쑤셔서, 장화를 신고 집 주변을 자주 산책했다. 온통 비포장에 진흙길이라 장화만큼 좋은 산책용 신발은 없었다. 눈이 온 날에도 산책을 했다. 그런 날이면 하루 만에 새하얗게 바뀐 풍경에 황홀해했다. 꽁꽁 언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서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벽난로의 장작에 불을 붙이면 저절로 불만 멍하게 바라보게 되곤 했다. 뉴갈러웨이에서의 생활은 슴슴했다. 도시의 알싸함은 찾기 어려웠다. 그 슴슴한 맛의 생활이 좋았던 것일까. 여행이 끝난 후 우리는 그때의 스코틀랜드 풍경과 비슷한 한국의 늪지대 앞 시골 마을에 정착해 여태 살고 있다. 물론 먼 곳에서 온 자전거 여행객들에게 따뜻한 샤워와 쉴 곳을 제공하면서.
Rio de Janeiro, Brazil
보사노바와 미지근한 맥주의 나날들
고현(프리랜스 에디터)

한여름 뜨겁게 작열하는 이파네마 해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 포르투갈어로 ‘히우지자네이루’라 발음해야 하지만 국립국어원 표기법에 따르기로 한다. 줄여서 ‘리우’라 표기)에 한 달 가까이 머문 적이 있다. 발단은 여행 중 우연히 연을 맺게 된 K의 메일이었다. “혹시라도 리우에 오거든 연락 줘. 마침 렌트한 집에 방이 하나 남으니까.” 당시 나는 남미 종단 여행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또 마침 남미 여행의 동행인 친구가 사정이 생겨 여행이 한 달 뒤로 미뤄진 상황이었고, 결국 그렇게 뜬 시간을 리우에서 보내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렴 리우라면 아무 계획 없이 떠나도 무슨 일이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도착해서야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그 집이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불과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재회한 K는 곧장 사실을 실토했으니, 그가 말한 ‘남는 방’이란 지하 창고였던 것이다. 온갖 잡동사니와 먼지로 가득 뒤덮인 방이라 애초에 침실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때는 1월이었고 카니발을 목전에 앞둔 여름 극성수기였다.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일단 거실에 매트리스를 하나 깔고 지내보기로 했다. 창고에 있던 캐비닛과 책상을 거실로 옮겨놓으니 나름 방의 구색이 갖춰진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한국인 K와 영국인 J가 사는 집 거실에 기생하듯 보냈던 한 달살이가 시작되었다.

리우 코파카바나에서 머물렀던 렌트 하우스의 거실(겸 내 방)
한여름의 리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뜨겁고 습했다. 자전거로 이파네마 해변을 달리거나 해변에 누워 망중한을 즐기는 것도 일주일쯤,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욕망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에어컨이 없는 집이었지만 그늘이 길게 드리운 거실에서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그래서 리우에서의 일상은 자연스레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의 방이기도 한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늘었다. 일단 한 달 뒤 오기로 한 친구와의 여행 계획부터 세웠다. 한국에서 챙겨 간 영문 가이드북을 거의 달달 외우다시피 하며 동선을 수없이 바꾼 끝에 나름 완성도 높은 남미 종단 여행 루트를 완성했다.
혈기 왕성한 남자 셋이 리우 해변가 집에 모여 살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왁자지껄한 느낌을 상상하지만, 실제로 집 안은 언제나 고요했다. 영국인 J는 영어 강사로 일하며 틈날 때마다 헬스장과 클럽을 전전해 통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었다. K는 보사노바 음악을 제대로 배우고자 본고장인 리우에 정착한 이였다. 그는 주기적으로 현지 뮤지션에게 기타 레슨을 받았고, 틈틈이 방 안에서 기타 연습에 몰두했다. 나는 해가 질 무렵이면 그와 함께 코파카바나 해변으로 나갔다. 해변 앞 노점에서 미지근한 스콜(Skol) 맥주를 한 병 시켜 나눠 마시거나, 열대야가 극성스러운 밤에는 집 앞 스낵 바에 들러 브라질의 국민 디저트인 아사이(acai)를 먹기도 했다. 딱히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각자 바다 어딘가를 응시하며 저녁을 보냈다.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 떠올렸던 것들과는 달리,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무료한 시간으로 기억되는 한 달이었다. 숙소에 좀도둑이 들었다거나(도둑은 내 물건 중에 손목시계 정도를 제외하고는 가치 있는 게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몸이 간지러워 병원 응급실에 갔더니 침대 벼룩 판정을 받았다거나(청소를 하지 않는 거실에서 매트리스만 깔고 지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는 정도의 소동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리우 경험자들이 입을 모아 경고했던 강도와의 아찔한 만남 같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아쉽다는 뜻은 아니다.)
여행자도 생활자도 아닌 묘한 신분으로 리우에서 보낸 그 무료한 한 달이 내게는 이상하리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방문 너머로 K가 연주하던 보사노바 기타 선율과 코파카바나의 파도 포말을 바라보며 마시던 미지근한 맥주처럼, 전혀 극적이지 않은 순간들 말이다. 그 따분하고 무용했던 한 달을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 삶의 한 챕터가 정리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후 나는 계획대로 남미 종단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마친 뒤에는 당시 애지중지하던 영문 가이드북의 한국판 매거진 팀에 합류해 에디터로 일을 하게 됐고, 지금껏 여전히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을 반복하는 중이다. 아무렴, 그렇게 생각해보면 리우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어폐가 있는 표현 아닐까 싶다.

리우 해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비치발리볼 시합.
Sevilla, Spain
좁고 길쭉한 모양의 일장춘몽
최민석(소설가)

숙소가 위치했던 세비야 구도심 거리.
지난가을 가족과 세계 일주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스페인 세비야의 숙소를 고르고 있던 아내는 문득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협소 주택에서 지내보는 게 어때?” 아내의 요지는 이랬다. 서울에 살면서 주택을 꿈꾼다면, 비싼 땅값 때문에 일반적인 주택을 짓는 건 불가능하다고. 서울에서 그 꿈을 실현하는 방법은 협소 주택뿐이라고. 그러니 이참에 20일가량 지내보며 모의고사를 치러보자는 것이었다. 세비야로 떠나는 건 그곳에서 내가 2주 남짓 스페인 어학원을 다닐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오전에는 세계 시민의식으로 무장한 젊은이들과 뒤섞여 회화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세비야의 협소 주택에서 와인을 홀짝거리며 쉴 거라고 생각하니 흥분이 돼, 드라마 <무빙>의 히어로 봉석이처럼 몸이 떠오를 것만 같았(지만 사실 과체중에 나잇살까지 먹은 내 몸은 중력에 철저히 굴복당했)다.
세비야에서 빌린 협소 주택은 하나의 작은 갤러리 같았다. 내부는 온통 하얗게 칠해져 있었으며, 그 흰 벽마다 미술 작품이 걸려 있었다. 집은 작은 4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안에 걸린 큰 그림만 꼽아도 족히 10점은 됐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예술적 기운이 달려들어 나를 와락 감싸는 듯했다. 그리고 며칠을 지내보니, 그 이유를 알 만했다. 일단은 집이 좁으니 실내를 넓게 보이기 위해 희게 칠한 것이었고, 그 흰 벽을 멋지게 활용하기 위해 미술 작품을 걸어둔 것이다. 의도는 꽤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예술적 정취가 집 안에 감도는 통에 집이 좁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으니까. 실제로는 각 층이 12m2(3.5평) 남짓한 크기였는데도 말이다.

협소 주택 내부의 가파른 계단과 엘리베이터.
당시 머물렀던 세비야 구도심의 풍경도 집과 너무나 잘 어우러졌다. 동네가 집 바깥이 아니라 ‘확장된 집’처럼 다가오는 구석이 있었다. 실제로 1층의 문을 열면 바로 거리가 나왔기에 집과 거리 사이에는 특별한 경계가 없었다. 거리마다 심어진 오렌지나무는 집 안의 작은 화분들과 연장선상에 있는 듯했고, 골목마다 위치한 추로스 카페와 아이리시 펍은 마치 협소한 우리 부엌을 보완해주기 위해 주민들이 마련해준 공간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사람들도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눈웃음을 건넸다. 오래 이웃하며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그리고 아아, 타파스 바! 사랑해 마지않을 수 없는 이 간이 주점들에서 간단한 안주 몇 점을 집으며 맥주를 홀짝거리던 밤은 가히 세비야 생활의 백미였다. 요컨대 모든 게 완벽했다. 단 하나만 빼고.
그건 바로 내 눈치 없는 무릎이 이 멋진 주택의 경사진 계단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협소 주택에서 지내기 위해서는 외출하기 전에 몇 번이나 위아래층을 오가야 한다. 예컨대, 샤워는 3층, 가방을 챙기는 건 4층, 외출복을 입는 건 1층, 물 한 잔 마시는 건 2층에서 하는 식이다. 그렇기에 눈을 뜨자마자 수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집이 좁다는 건 계단 사이가 높다는 뜻이고, 이는 보통 계단보다 훨씬 무릎에 무리를 준다는 뜻이다. 물론 세비야의 주택에는 (비록 느려터졌지만)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다만 여러 층을 오가야 하는 무릎을 보호하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필요했고, 그 엘리베이터 때문에 집은 더 좁아졌으며, 그만큼 계단은 더 가팔라졌고 가파른 계단은 무릎에 무리를 줬다. 협소 주택과 엘리베이터라는 구조적 딜레마가 집 안의 회전계단을 타고 이어졌다. 더군다나 알아보니 엘리베이터 설치 비용은 3000만~5000만원 정도가 들었다.
그리하여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해당 집을 빌렸던 숙소 공유 플랫폼의 슬로건을 온전히 체험한 후 우리 부부는 협소 주택에 대한 꿈을 고스란히 접었다. 일장춘몽 같은 시간을 보내며 현실에 눈을 뜬 것이다. (무릎 문제는 40대인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30대인 아내도 힘겨워했다.) 세비야의 집에서 ‘살아보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지금도 협소 주택에서 글을 쓰는 장밋빛 환상을 품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
Credit
- EDITOR 오성윤
- ART DESIGNER 김동희
JEWE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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