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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에 숨겨진 심리 치료의 효과가 있다?

프로필 by 오성윤 2023.12.24
 
시드니 남부의 완다 비치 너머로 해가 떠오른다. 그 아래에서는 블레이크 존스턴이 물살을 가르며 파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그의 얼굴을 때리지만, 크로눌라(호주 시드니 근교의 해안 마을) 사람인 그는 개의치 않는다. 이건 그에게 일종의 치료다. 그가 기억하는 한은 언제나 그랬다. “서핑은 제 일부였습니다. 아버지도 서퍼였거든요. 서핑은 제가 아빠와 함께 노는 방법 중 하나였죠.” 존스턴은 말한다. “제가 속상하거나 우울할 때는 물에 충분히 많이 들어가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바다에 들어올 때면 저는 그 순간에 완전히 몰입합니다.”
금발의 멀릿 스타일 헤어와 긴 수염 덕분에, 존스턴은 이 지역에서 늘 유명 인사였다. 하지만 올해 초부터는 크로눌라에서 꽤 멀리 떨어진 사람들도 그의 이름을 알게 됐다. 그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 한 서핑(World’s Longest Surf)’으로 기네스 세계기록을 경신했기 때문이다. 해변에 잠깐씩 올라왔다가 다시 서핑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존스턴이 파도를 탄 기록은 40시간이다. 그는 첨피 풀린 재단(Chumpy Pullin Foundation)의 청소년 정신 건강 증진 사업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이 기록에 도전했다. 개인적인 의미도 있었다. 그는 10년 전 스스로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 웨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로 존스턴은 정신 건강에 관한 인식을 높이는 캠페인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의 헌신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한 서핑’과 같은 극한의 도전들뿐 아니라, 서핑을 가르치는 그의 교수법에서도 드러난다. 자녀 둘을 둔 아버지인 그는 자신의 소유인 크로눌라 서핑 아카데미(Cronulla Surfing Academy)에서, 서프보드 위에서 일어나는 법 못지않게 서핑의 정신적인 면에도 포커스를 두고 커리큘럼을 진행한다. “서핑은 정말 훌륭한 선생님이에요. 서핑을 할 때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하죠. 실제로 바다 위에서는 나를 산만하게 하는 것도 많지 않고요. 계속해서 내 바로 앞에 놓인 것들을 해결해나가면 되는 거예요. 또 동시에 겸손해야 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내보여야만 하는 일이죠. 그 두 가지는 정말 강력한 도구랍니다. 일상생활에서도 활용할 수 있어요.”
최근에 서핑을 배운 성인으로서 나는 그의 말이 전부 사실임을 보증한다. 물론 방금 말했듯 나는 아마추어 서퍼인 데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상어를 무서워한다. 그런 나에게 파도 위에서 느끼는 기쁨이란 어린아이들의 것처럼 매우 순수하다. 서핑을 하는 동안 분출되는 세로토닌은 바다에서 나오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 나에게 영향을 준다. 그렇게 보면 수세기 동안 여러 다른 문화권에서 서핑을 해왔다는 건 사실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신체 활동이 가진 엄청난 정신적 이점, 그리고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들에게 주는 긍정적 영향에 대해 연구자들이 면밀하게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꽤 최근의 일이다. “서핑 테라피에 대한 관심은 확실히 급물살을 타고 있어요.”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 임상 신경과학자 겸 정신과 교수 필립 워드(Philip Ward)가 말했다. “저희는 현재 서핑의 치료 효과의 근거 기반을 구축하는 중이에요. 치료 효과가 있다는 건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어떤 작용을 거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니까요. 그걸 파헤치는 과정에서 서핑 테라피 프로그램들이 효과를 보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요소들도 알게 될 테고요.”
2009년 호주의 상담사 폴 모건이 진행한 연구는 서핑의 긍정적인 심리 효과에 관한 초기 연구들 중 하나다. 이 연구는 서핑하는 법을 가르치는 ‘선셋 서퍼스(Sunset Surfers)’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선셋 서퍼스는 시드니 중심부인 레드펀과 워털루 지역에 사는 사회적 약자 계층의 어린이들을 위해 개발된 프로그램이다. 2시간짜리 수업 6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호적인 환경에서 자신감과 회복력을 기르는 것이 목표다. 대부분의 어린이가 “기술을 익히고자 하는 높은 수준의 열의와 동기부여”를 보였다고 보고되는 등 프로그램은 꽤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 개중 한 어린이는 프로 선수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하기도 했다. 긍정적인 롤 모델(서핑 강사)의 멘토링이 더해진 이런 프로그램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운영되는 수백 개 서핑 테라피 프로그램들의 청사진을 만들고 있다.
워드 교수는 그런 프로그램들 중 하나인 ‘웨이브스 오브 웰니스(Waves of Wellness, WOW)’의 이사다. 호주의 비영리단체인 WOW는 다양한 정신 건강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연구 결과에 기반한 8주짜리 서핑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2016년 ‘WOW’를 설립한 건 정신 건강 작업 치료사이자 열정적인 서퍼인 조엘 필그림(Joel Pilgrim)이었다. 필그림은 어느 날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한 청년과 서핑을 나갔다가 청년의 변화를 목격하게 됐다. 그리고 서핑이라는 활동에 따르는 육체적·정신적 도전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긍정적 성취감에 독특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필그림은 중립적이고 방해물이 없는 환경에서 신체 건강과 정신적 웰빙을 향상시키는 방법으로 서핑을 소개하기 위해 워드 교수와 함께 WOW를 설립했다.
워드의 설명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서핑 중에 하는 일들만큼이나 해변에서 하는 일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희는 해변에 참여자들이 자신들의 정신 건강 문제와 관련한 경험들을 공유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듭니다. 일반적인 그룹 치료에서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그에 참여하고자 하는 적극성과 의지는 훨씬 더 커요.” 워드는 이 프로그램에서 서핑이 ‘숨은 치료(therapy by stealth)’를 한다고 말한다. 숨은 치료란, 치료 전문가가 내담자를 만날 때 상담실을 벗어나 내담자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장소를 택하는 치료 유형을 말한다. 임상 신경과학자인 그는 이 프로그램이 기존의 전통적인 정신 건강 서비스들이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특히 더 가치 있다고 설명한다. 그 대표적 예는 바로 ‘남성’이다. “아시다시피 남성들은 자신의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합니다. 그런 어려운 대화는 형광등이 켜진 방에서 심리학자와 마주 앉아 하기보다는, 이런 환경에서 하는 게 좀 더 수월한 경우가 많죠.”
 
블레이크 존스턴이 시드니 남부 완다 비치에서 파도를 기다리고 있다.

블레이크 존스턴이 시드니 남부 완다 비치에서 파도를 기다리고 있다.

서핑 테라피가 높은 치료 효과를 보이는 또 다른 군상은 참전 군인들과 응급대원들이다. 내부 문화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 “그들은 대부분 스스로의 감정에 사로잡혀 행동을 망설이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을 받죠. 그래서 정신 건강 문제 앞에서 자기 마음을 닫아버리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자해나 자살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호주보건복지연구소(Australian Institute of Health and Welfare)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호주 방위군을 비자발적 의학적 사유(PTSD 등)로 전역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전역하는 사람들에 비해 자살로 삶을 마감할 확률이 3배 높다고 한다. 내년에 발행될 예정인 왕립 방위군 및 참전 군인 자살 위원회(Royal Commission into Defence and Veteran Suicide)의 수집 데이터 역시 군복무 경험이 있는 남성들이 자살로 삶을 마감할 확률이 호주 남성 일반에 비해 27% 더 높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특수한 상황과 특수한 일을 겪어온 분들이기 때문에 기존의 치료사들을 신뢰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내가 어떤 일들을 헤쳐왔는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치료사들이 어떻게 나를 도울 수 있지?’ 하고 생각하는 거죠.” 워드는 또 이렇게 설명한다. “하지만 그분들을 모아 이렇게 함께하는 활동에 참여하도록 해보자, 평소에 비해 마음을 좀 더 열려고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서핑 테라피의 효능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는 현실 사례를 근거 기반으로 삼았다. 물론 누군가가 ‘이게 나에게 이렇게나 도움이 됐다’ 하고 고백하는 개인적인 증언도 영향력이 크다. 하지만 건강 증진 사업에 투자하려는 이들은 그보다 데이터를 보고 싶어 한다. 워드가 WOW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참가 전후 뇌 활동을 촬영하는 내용의 연구를 계획하고 있는 이유다. “우리가 이런 긍정적인 이점들 속에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그 근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서핑을 한 결과로 실제 우리 뇌의 활동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죠.”
이들이 또 하나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프로그램들을 지리적·민족적·사회경제적 관점에서 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워드는 국제 서핑 치료 기구(International Surf Therapy Organization)의 창립 회원이기도 하다. 그는 이 기구의 가장 최근 콘퍼런스가 평등, 다양성, 포용성에 중점을 뒀다고 설명한다. “서핑은 호주 같은 나라의 환경에서 활용하기에 매우 적합합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원주민 공동체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도 확실히 참여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핑은 외로움이나 슬픔에 빠져 있거나, 삶의 커다란 변화로 힘들어하는 사람 역시 도울 수 있다. 지금보다 더 큰 행복감과 유대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워드와 그의 동료들은 서핑 테라피가 머지않은 미래에 민간보험사에서 보완 치료 항목으로 채택되고 또 언젠가는 공공보험의 급여 항목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충분히 타당하고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서핑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다. ‘웨이브스 오브 웰니스(WOW)’에는 좀 더 가볍게 참여할 수 있는 6주짜리 프로그램도 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자 하거나 자신의 정신 건강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서핑을 배우고 싶어 하는, 더 폭넓은 배경의 남성과 여성에게 열려 있는 프로그램이다. 크로눌라 서핑 아카데미의 수업들도 열려 있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인생에서 어느 연령대를 지나고 있든 서핑을 시작할 수 있고, 초보자와 실력자 그 어느 수준이라도 서핑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존스턴은 자신의 아카데미가 여성 클래스, 유아 클래스도 갖추고 있으며, 70세에 서핑을 배우는 분들도 있다고 설명한다. “서핑이 막연히 어려워 보일 수 있는 스포츠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바다와 그리 친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8피트짜리 보드를 주고는 그걸 옮기는 법부터, 양팔로 노를 저어 나아간 다음 한순간에 올바른 자세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는 건 실제로 쉽지 않은 일이죠. 하지만 서핑에는 그 일련의 동작 외에도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덧붙인다. “예컨대 해변에 나와서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자기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서핑까지 잘 하게 한다면, 그건 덤이죠.”

Credit

  • EDITOR AMY CAMPBELL
  • PHOTOGRAPHER MATT DUNBAR
  • TRANSLATOR 박수진
  • ART DESIGNER 김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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