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트 톱, 셔츠, 레더 팬츠, 로퍼 모두 페라가모.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대학을 한 학기만 다니고 자퇴한 후에 그냥 전국을 유랑하다가 어느 순간 ‘연기가 찾아왔다’고 했어요. 그 대목이 잘 이해가 안 되던데, 어떤 이야기일까요?
(웃음) 정말 디테일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무작정 동해로 갔어요. 학교를 그만두면서 돌려받은 등록금을 들고, 기차 타고 동해에 내린 다음 거기서 시작해서 남해 쪽으로, 또 다시 서해 쪽으로 돌며 여행한 거죠. 돈이 떨어지면 공사장 같은 데에서 일을 하면서요. 버스나 기차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아무튼 한 번에 많은 거리를 이동하지는 않았어요.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 아예 없었으니까요.
네. 뭔가를 찾을 때까지는. 날이 좋을 때는 그냥 길에서도 자고 벤치에서도 자고 그러면서 한 3, 4개월 정도 여행을 했어요. 그러다가 강화도에서 마니산을 올라가보기로 했죠. 학교 다닐 때 한 번 간 기억이 있는데 다시 한번 올라보고 싶더라고요. 제가 지금은 탄산음료를 절대 안 먹는데 그때는 마실 때라 1.5L짜리 콜라 한 병, 두부 한 모, 과자 두 봉지, 생으로 부숴 먹을 라면 하나 이렇게 사서 올라갔죠.
(웃음) 그때 두부가 너무 먹고 싶더라고요. 간장 찍어서 먹는 두부의 맛이 자꾸 아른거려서, 식당에 들어가서 하나 샀죠. 아무튼 그렇게 싸 가지고 마니산에 올라가서 밤새 앉아 있었어요. 두부도 먹고, 과자도 먹고, 콜라도 마시고. 그런데 아침 해가 떠오르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극을 하면 사람을 좀 이해할 수 있나?’ ‘그래, 연극을 해보자.’ 그래서 바로 집으로 돌아가서 연극하러 찾아간 거예요. 연극이란 걸 한 번도 본 적 없는 채로. 그렇게 지금까지 오게 된 거죠.
약간 옛날 유럽의 귀족 자녀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전 여행을 떠나는 ‘그랜드 투어’ 같은 느낌을 생각했는데, 듣다 보니 거의 ‘출가’나 ‘고행’ 느낌인데요.
아니에요.(웃음) 그게 듣기에는 고생으로 들릴 수 있지만 저한테는 굉장히 유쾌한 여행이었어요. 어둡고, 삶의 의미를 찾고, 이런 게 아니라 아주 신나는 모험이었죠.
지금도 자연을 참 좋아하시죠. 캠핑 애호가로 유명하시기도 하고, 영월에 은둔지가 있다고 듣기도 했어요. 거기는 어떤 때에 주로 가세요?
그냥 시간 날 때 가요. 굳이 의미를 두고 가지는 않고요. 가다 보면 뭔가 생각이 나겠지 하고 가기도 하고, 갔는데 별생각이 안 들고 외로우면 바로 돌아오기도 하죠. ‘좋네, 가자’ ‘힘들다, 가자’ 뭐 그러기도 하고…. 대단한 뭔가를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저도 대단한 뭔가를 생각하고 그 공간을 구한 거긴 한데, 사실 아무것도 없거든요. 예전에는 그 앞에 텐트를 치고 자기라도 했는데 요즘은 텐트도 안 치고 그냥 오두막 안에 들어가 있어요.
가시적인 변화를 불러오거나 남들에게 말하기에는 대단치 않더라도 개인에게는 의미가 클 수도 있죠. ‘자신만의 공간’이라는 존재 자체로요.
맞아요. 사실 저는 꼭 예술을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공간, 소굴, 방, 우주, 요사채(스님들의 생활 공간), 뭐든요. 만약 그런 실제적인 공간이 없다고 해도 우리가 시를 읽거나 책을 읽을 때 순간 멍해지면 그 순간만큼은 자기만의 공간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렇게 보면 저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카무플라주 패턴 재킷 꼼데가르송 옴므 플러스. 슬리브리스 톱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아까 말씀하셨던 ‘삶의 부조리’ 얘기가 자꾸 마음에 남네요. 제가 한동안 ‘배우’라는 직업에는 왜 경건한 뉘앙스가 감돌까 생각한 적이 있는데요. 아마 그렇게 인간과 삶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을 하고 최선을 다해 타인의 입장이 되어본 사람이라는 측면 때문이겠구나 싶어서요.
그런가요? 저는 음악 하는 사람, 미술 하는 사람을 볼 때 더 경건해지는 것 같은데요. 아, 오해는 마세요. 저는 제 일을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연기를 폄하하는 게 아니라, 음악이라는 건, 미술이라는 건 정말로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짧은 10초로도 제 모든 걸 지배하기도 하는 예술이니까요. ‘도대체 저런 걸 어떻게 만들어낸 걸까’ 아름답다 못해 위대하게 느껴질 정도죠. 예를 들어 최근에 제가 판소리하는 어느 젊은 명창의 연습실에 간 적이 있거든요. 그분이 저한테 엄청난 팬심을 고백하시면서 어쩔 줄 몰라 하시더라고요. 저도 덩달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앉아 있는데, 그분이 소리를 시작하는 순간 감탄이 저절로 나왔어요. “말도 안 돼.” 그때 느낀 게, 제가 해온 건 그 사람이 쏟아낸 것의 빙산의 일각도 안 되는 일인 거예요. 어떻게 사람에게서 이런 소리가 나오는지 알 수도 없는 그런 경지니까. 배우들은 대중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직업이라 도드라져 보일 뿐이지, 제가 보기에는 그런 분들이 참 대단한 거예요.
누군가는 박지환 씨가 <우리들의 블루스> 같은 작품에서 보여준 연기를 보며 그런 걸 느꼈을 수도 있죠. 페이소스를 느끼고, 그 감정에 동화되는 놀라운 경험을 다시 하고 싶어서 자꾸 그 장면을 찾아보고.
그건 제가 누누이 말하지만 노희경 작가님의 글이 가진 힘입니다.
사실 분명 그렇게 답하실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이긴 했어요.(웃음)
(웃음) 아뇨. 근데 정말 그래요. 제가 노 작가님의 글에 대한 감탄을 하도 하니까 후배 하나가 자기도 <우리들의 블루스> 대본을 한번 읽어보고 싶대요. 그래서 한번 보여줬더니 그 후배도 그러더라고요. 이런 대본은 살면서 처음 봤다고.
저 사실 얼마 전에 <SNL>에 나온 지환 씨를 보면서도 약간 놀랐거든요.
그래요? 어떤 부분에서요?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는데, 오프닝 무대에서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 장이수의 명대사인 “내 아임다”를 하셨을 때요. <SNL>이 실제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한 걸 편집해서 방송에 내보내는 거잖아요. 현장에서의 발성이나 에너지 같은 게 같이 전해지니까, 와 이게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그때 사실 제가 오랜만에 무대에 나가니까 갑자기 생기가 확 돌았던 것도 같아요. 무대에 섰던 사람이니까. 제 고향이 바로 무대고, 연극이니까요.
영화 <범죄도시4>에서 다시 한번 장이수 역할을 맡았어요. 너무 큰 사랑을 받은 캐릭터라 부담되는 측면은 없었을까요?
마음속으로는 정말 불안했죠. 하지만 결과가 어떨까 하는 측면으로 불안했던 건 아니고요. 내가 이 역할에서 또 새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어요. 제가 새로움을 느껴야 관객도 좋아할 수 있지, 어떤 결과를 염두에 두고 연기를 해버리면 껍데기밖에 없게 되잖아요.
그럼 그런 불안에도 또다시 해보기로 마음먹게 한 건 뭐였을까요?
제 팀에 기대는 거죠. 범죄도시 팀이 쌓아온 구력.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준비를 더 잘 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믿는 거고요.
하긴 인터뷰 같은 것들 찾아보니까 장이수에게서 나온 많은 명장면과 명대사가 박지환 배우와 마동석 배우가 현장에서 빚어낸 케미스트리더라고요.
그건 정말 선배님이 만들어주시는 힘이죠. 마동석 선배님이 대본 구성할 때는 정말 치열하게 하세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 현장에서는 현장의 모든 요소를 끌어안고 있죠. 그 자리에서 바로 “내가 뭘 할 거야” 하고 툭 던지고 의외성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제가 다른 인터뷰에서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요. 장이수와 초롱이라는 캐릭터는 사실 박지환과 고규필이 아니더라도 재미있고 잘됐을 거예요. 앞일은 모르는 거지만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에 들어와도 다들 그 배우에게 열광하고, 즐거워하고, 최고라고 할 거고요. <범죄도시>는 그런 현장이고, 마동석 선배는 그런 역할을 그렇게 만들어주실 줄 아는 선배거든요.
정말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다른 곳으로 돌리시네요. 배우들이 대부분 스스로의 연기에 겸양의 제스처를 보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지환 씨의 겸양은 어딘가 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해요. 초연한 느낌이 있달까요.
저는 그냥 그게 제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거예요. 저는 좋아하는 일을 즐기고, 탐구하고, 막 빠져들 뿐인 거죠. 제가 다른 인터뷰에서 여러 번 얘기했듯이 저한테 연기를 한다는 건 늘 ‘여름방학 마지막 술래잡기를 하듯이 나서는’ 일이거든요. 매일 밤,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오늘이 마지막이야. 난 내가 걸릴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즐겁게 놀아야지.’ 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말로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게 좋은 배우고 어떤 게 나쁜 배우인지, 연기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그런 부분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어요. 제 지론은 늘 같거든요. 일단 저부터 즐길 수 있는 일을 해야 남들도 즐길 수 있다는 거. 물론 그것과 별개로 제 연기를 잘한다 못한다 판단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요? 저는 관객들과 시청자들이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뭔가를 가져갈 거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저는 제 자신에게 집중하고, 제 것들을 보여주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