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TECH

피렐리가 평범한 타이어 회사가 아닌 이유

피렐리는 타이어를 넘어 스포츠, 문화예술 그리고 지속가능성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프로필 by 박호준 2024.10.17
[ MOTORSPORTS ]
열광의 도가니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티포시(스쿠데리아 페라리 팬 네임)들이 성난 파도처럼 트랙 위로 몰려들었다. 서킷에 진입하기 위해 펜스를 넘는 사람, 벽 사이로 몸을 비집어 넣는 사람이 속출했다.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응원가를 목 놓아 부르는 모습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했을 때와 겹쳐 보였다. 우승을 차지한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샤를 르클레르가 트로피를 받기 위해 포디엄에 나타나자 환호는 극에 달했고 수만 명이 내지르는 함성에 귀가 먹먹했다. 이에 보답하듯 샤를 르클레르는 퇴장 후 두 번이나 다시 팬들 앞에 나타나 손을 불끈 치켜 올리며 승리를 만끽했다.
스쿠데리아 페라리가 5년 만에 홈그라운드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려 생긴 광경이다. 올해 포뮬러1(이하 F1)은 24번의 그랑프리를 진행한다. 작년에는 22번, 재작년에도 22번이었다. 2월부터 12월까지 전 세계를 순회하며 경기가 열리지만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몬차 그랑프리는 특별하다. 1922년 만들어져 F1이 열리는 서킷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F1 기준 평균속도가 시속 250km, 최고 속도가 시속 357km를 기록하는 고속 서킷이기 때문이다. ‘속도의 성지(Temple of speed)’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그래서다. 페라리의 본고장 마라넬로와 가까워 페라리의 홈구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승부는 타이어 교체 전략에서 갈렸다. F1은 매 경기 최소 1회 이상 피트 스톱을 해야 한다. 피트 스톱이란 레이스카가 경기 중 타이어 교체를 위해 피트로 잠시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이때 얼마나 빠르게 타이어를 교체하는지 구경하는 게 F1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다. 참고로 가장 빠른 피트 스톱 기록은 지난해 맥라렌이 세운 1.8초다. 이날 상위권 드라이버 대부분이 53랩을 도는 동안 두 번의 피트 스톱을 한 것에 반해 1위를 차지한 르클레르는 열세 번째 바퀴에 단 한 번만 피트에 들어왔다. 다시 말해, 르클레르는 피트 스톱에 소모되는 시간을 아끼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경기 후반 맥라렌의 피아스트리가 맹렬한 기세로 르클레르를 추격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새 타이어를 낀 덕이다. 모터스포츠는 ‘타이어 놀음’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페라리 드라이버 르클레르가 우승을 확정하자마자 수만 명의 티포시가 트랙 위로 뛰쳐나왔다. 경기가 끝나고 1시간이 지나도록 열광은 끊길 기미가 없었다.

페라리 드라이버 르클레르가 우승을 확정하자마자 수만 명의 티포시가 트랙 위로 뛰쳐나왔다. 경기가 끝나고 1시간이 지나도록 열광은 끊길 기미가 없었다.


[ TYRE GAME ]
피렐리는 2011년부터 2027년까지 F1의 메인 스폰서로서 타이어 공급을 담당한다. 10개 팀이 매 그랑프리 연습 주행과 예선, 결선 주행에 사용하는 타이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시즌마다 달라지는 대회 규정에 맞춰 타이어를 개발하는 일까지 도맡는다. 이를 위해 1만 시간 이상 실내 테스트, 5000시간 이상의 시뮬레이션, 2만km 이상의 실제 주행 테스트를 거친다.
2024 시즌 F1 공식 타이어 종류는 총 7종이 사용되고 있다. 맑은 날 사용하는 슬릭 타이어가 C1부터 C5까지 5개, 비 오는 날 사용하는 웨트 타이어가 2개다. 슬릭 타이어가 다섯 종류나 되는 건 각 타이어마다 컴파운드 비율이 달라서 그렇다. 컴파운드를 뜻하는 알파벳 ‘C’ 뒤에 붙은 숫자가 높을수록 접지력이 좋지만 내구성이 낮다. 즉 랩타임을 최대한 끌어 올리고 싶을 땐 C5를 사용하고 피트 스톱 없이 오래 달리고 싶을 땐 C1을 사용하는 게 적절하다는 의미다. 웨트 타이어는 인터미디에이트 타이어와 풀 웨트 타이어로 나뉜다. 약한 비가 내릴 땐 전자, 강한 비가 내릴 땐 후자를 사용하는 식이다.
F1 중계를 들을 때 등장하는 소프트, 미디엄, 하드 타이어는 전부 슬릭 타이어에 속한다. 피렐리는 매 그랑프리가 열리기 전 날씨와 트랙의 성향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경기에 사용할 타이어 3개를 선정한다. 몬차 그랑프리의 경우 C3가 하드, C4가 미디엄, C5가 소프트 타이어였다. 반면 바레인 그랑프리에서는 C1이 하드, C2가 미디엄, C3가 소프트 타이어였다. 몬차 서킷은 불과 3개월 전에 아스팔트를 새로 깔았고 평균 주행속도가 빠르며 날씨가 무더워 노면 온도까지 높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접지력이 높은 C3~C5 슬릭 타이어가 선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시즌 피렐리가 F1에 제공하는 타이어는 국제산림관리협의회(FSC) 인증을 받은 천연고무를 사용한 것으로 지속가능성에 대한 노력이 담겨있다. FSC는 엄격한 환경 및 사회적 기준을 준수한 제품에만 인증을 부여한다. 원자재를 얻는 것부터 분할, 제조, 가공 등 완제품이 생산되기까지 모든 과정을 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피렐리는 재생에너지를 통해 얻은 전력으로 타이어 제조 공정을 운영하고 항공 운송보다 해상 운송을 장려하는 물류 시스템 도입으로 탄소 배출 절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피렐리 본사 내 위치한 쿨링 타워. 공장을 허물고 사무공간으로 바뀌었지만, 쿨링 타워 하나는 그대로 남겼다. 피렐리의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피렐리 본사 내 위치한 쿨링 타워. 공장을 허물고 사무공간으로 바뀌었지만, 쿨링 타워 하나는 그대로 남겼다. 피렐리의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몬차 그랑프리를 위해 피렐리가 특별 제작한 우승 트로피 'VROOOM'이다. 크롬 알루미늄으로 만든 트로피는 밀라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안드레아 살라가 디자인했다.

몬차 그랑프리를 위해 피렐리가 특별 제작한 우승 트로피 'VROOOM'이다. 크롬 알루미늄으로 만든 트로피는 밀라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안드레아 살라가 디자인했다.

[ PIRELLI HERITAGE ]
“아니, 에디터님. 여기 타이어 회사 맞아요? 미술관 아니에요? 소장품 하나하나가 다 너무 예뻐요. 이건 작품이야 작품!” 몬차 그랑프리 관전에 앞서 밀라노 피렐리 본사 내 ‘피렐리 파운데이션’을 함께 방문한 노홍철의 말이다. 1872년 설립된 피렐리는 150년이 넘는 역사 동안 자신들의 행보를 착실히 기록해왔다. 만약 피렐리 파운데이션이 보관하고 있는 아카이브를 전부 꺼내 늘어놓는다면 그 길이가 4km에 달할것이다. 특히 20세기 초 수작업으로 그려낸 피렐리 캠페인 포스터와 잡지 삽화는 당장 어제 만들었다고 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감각적이다. 소장품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는 “티셔츠에 이런 피렐리 옛 포스터를 프린팅해 넣어 팔기만 해도 인기 많을 것 같은데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1964년부터 매년 발행되어 온 ‘피렐리 캘린더’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매년 2만부만 찍어 돈 주고도 사기 어렵다는 피렐리 캘린더는 매년 다른 주제로 애니 리버비츠, 테리 리처든슨과 같은 세계적인 포토그래퍼가 촬영한다. 모델 역시 예사롭지 않아서 나오미 캠벨, 지지 하디드, 니콜 키드먼, 세레나 윌리엄스 등 내로라하는 모델, 배우, 운동선수가 대거 참여했다.
보는 이에게 미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말고도 피렐리 파운데이션의 가치는 하나 더 있다. 과학기술 박물관에 소장된 방대한 양의 문헌자료다. 현재는 타이어에 집중하고 있지만 과거 피렐리는 고무로 만드는 거의 모든 제품을 다뤘다. 덕분에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문헌이 다수 보관되어 있는데,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무 산업 관련 잡지(1888년)나 밀라노 국제 박람회 안내서(1906년)가 대표적인 예다. 피렐리는 이러한 자료를 웹사이트에 전부 공개할 뿐만 아니라 대학과 연계해 여러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
내친김에 피렐리 R&D 센터로 향했다. 정밀한 타이어 제작과 테스트를 위해 고가의 장비가 즐비한 와중에 눈길을 잡아 끈 대목은 타이어를 한 땀 한 땀 손으로 조각하고 있는 백발의 기술자였다. 피렐리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타이어에 레이저 프린트로 스케치를 한 후 기술자가 직접 칼로 트레드를 파내어 프로토타입 타이어를 만든다. 이렇게 얻은 프로토타입 타이어들 중 가장 우수한 타이어가 양산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여담이지만, F1의 예선 주행에서 가장 빠른 랩타임을 기록해 폴 포지션을 차지한 드라이버에게 해당 그랑프리 이름을 새겨 선물하는 작은 타이어 형태의 트로피 ‘폴 포지션 어워드’도 이곳에서 제작한다.
피렐리 R&D 센터에는 ‘에너코익 룸’(Anechoic room)이라는 학교 교실만 한 방이 하나 있다. 우리말로는 무향실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흡음재로 사방을 채워 외부 소음을 차단하고 음의 반사를 막는 공간이다. 무향실 가운데에는 주행 중 타이어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측정하기 위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장치 주변에는 4개의 소음 측정기와 6개의 바람 분사기가 타이어를 바라보고 다양한 각도에 세워져 있어 타이어 외부에서 들이치는 소리가 달리는 타이어와 부딪쳤을 때 어떤 방식으로 소리가 증폭 또는 감쇠하는지 알아볼 수 있다. “이곳에서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피렐리 노이즈 캔슬링 시스템(PNCS) 타이어 제작에 힘쓰고 있습니다. 전기차 시대가 되면서 타이어의 소음을 줄이는 게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데 피렐리는 이미 15년 전에 PNCS 기술을 선보였죠.” R&D 센터 안내를 맡은 피렐리 직원의 말이다. 타이어 내부에 흡음재를 넣은 PNCS 타이어는 일반 타이어보다 약 50% 이상 소음이 적다.

 20세기 초반 피렐리의 포스터와 잡지 표지. 피렐리 파운데이션 아카이브에 보관 중이며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20세기 초반 피렐리의 포스터와 잡지 표지. 피렐리 파운데이션 아카이브에 보관 중이며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 INNOVATION ]
“우리가 피렐리 타이어만 사용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타이어를 만들어주기 때문이죠. 내 발에 꼭 맞는 맞춤 신발을 신는 것처럼요.” 크리스토퍼 파가니의 말이다. 그는 파가니의 설립자 호라시오 파가니의 아들이자 파가니 마케팅 총괄을 맡고 있다. 파가니는 페라리, 람보르기니와 같은 슈퍼카보다 더 비싸고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는 ‘하이퍼카’ 브랜드로 차 1대당 가격이 30억원 수준이다. 그가 말한 맞춤 타이어란, 피렐리가 제공하는 ‘호몰로게이션’ 타이어를 말한다. 피렐리는 자동차 개발 단계부터 제조사와 협력해 차에 적합한 타이어를 제작 가능한 브랜드로 유명하다. 업계에서 가장 많은 호몰로게이션 타이어를 제작했는데 그 건수가 2위 업체의 2.5배 이상이다. 국내에는 현대차, 제네시스 등과도 호몰로게이션을 체결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피렐리는 지난 7월, 영국에서 열린 2024 굿우드 페스티벌을 통해 ‘사이버 타이어’를 선보였다. 사이버 타이어는 정보 수집 및 전송 센서를 타이어에 탑재해 자동차와 타이어가 실시간으로 소통 가능하다. 사이버 타이어를 장착하면 타이어 공기압이나 온도 모니터링은 물론 차량의 운동 성능과 제동 성능에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며, 가까운 미래 5G 기반의 자율주행 기술이 상용화되면 더욱 유용해질 전망이다. 이러한 혁신 기술은 파가니의 신모델 ‘유토피아’에 가장 먼저 적용될 예정이다.

[ ITALIAN WIT ]
피렐리가 F1에 쓰이는 타이어를 만들고 방대한 아카이브를 자랑하고 매년 화제가 되는 캘린더를 선보이고 앞선 타이어 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거꾸로 말하면 피렐리가 지닌 매력의 층위가 여러 갈래라는 뜻이다. 본사에서 만난 피렐리 프로덕트 총괄(다리오 마라푸스키, Dario Marrafuschi)에게 “피렐리가 이렇게 멋진 일을 하고 있는 줄 몰랐어요. 알고 나니 전혀 다르게 느껴져요. 피렐리 고객들이 자신의 타이어를 자랑할 수 있게 타이어에 들어가는 로고를 더 크게 만들면 어때요?”라고 묻자 “제가 꼭 듣고 싶었던 말이네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브랜드를 과하게 드러내는 건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은근히 드러내는 걸 더 선호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우린 조급하지 않습니다”라는 근사한 답이 돌아왔다.
자칭 ‘재미주의자’ 노홍철은 피렐리 본사 방문, F1 관람, 파가니 투어에 대한 소감으로 “정말 재미있었어요. 재미있는 곳에 갔더니 피렐리가 있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다음 타이어는 피렐리로 하려고요”라는 말을 남겼다. 재미를 위해 사는 그에게 ‘재미있다’는 말은 최고의 칭찬이다. 이 밖에도 피렐리는 요트, 모터바이크, 자전거, 축구 등 다양한 재미있는 것들을 후원한다. 피렐리를 보고 있으면 정중한 슈트 차림에 화려한 팔찌나 행커치프로 위트를 더한 이탈리안이 떠오른다. 자신들의 근본인 타이어의 본질은 지키되 각종 후원과 투자로 멋과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이 닮았다.

- INTERVIEW -
마리오 이솔라 피렐리 (모터스포츠 디렉터)

마리오 이솔라 피렐리 (모터스포츠 디렉터)

피렐리 내에서 모터스포츠팀은 어떤 일을 담당하나?
회사 안의 회사라고 볼 수 있다. 약 100명 정도가 함께 일한다. 우리는 F1뿐만 아니라 약 200개의 모터스포츠와 관계를 맺고 있다. 드라이버와 팀이 잘 달리는 것은 기본이고 팬들이 모터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돕는다.
모터스포츠에서 타이어의 중요도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요리를 할 때 재료, 레시피, 타이밍이 전부 중요한 것과 같다. 피렐리 직원으로서 ‘타이어가 전부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냉정하게 30% 내외라고 생각한다. 나머지는 드라이버와 레이스카의 몫이다.
피렐리가 오랫동안 F1 타이어 스폰서를 유지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모터스포츠 시장은 모든 게 빠르게 변한다. 사람들은 점점 더 빠른 속도를 원한다. 동시에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도 놓칠 수 없다. 수많은 호몰로게이션 타이어를 만들며 축적된 피렐리의 노하우가 아니면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피렐리는 ‘트랙에서 공도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F1은 어떤 식으로 승용차에 영향을 주나?
F1에 쓰이는 타이어만큼 혹독한 주행 환경을 견뎌야 하는 타이어가 또 있을까 싶다. 타이어가 지켜야 할 가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F1에서 얻은 데이터는 타이어의 안전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Credit

  • PHOTO 피렐리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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