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고요하지만 다면적인 피터 도의 세상

헬무트 랭과 피터 도의 파노라마 같은 이야기.

프로필 by 이하민 2024.11.02
당신은 차세대 미니멀리즘 디자이너로 평가받고 있다. 피터 도의 헬무트 랭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나?
모던한 뉴욕 스타일의 헬무트 랭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과 스타일로 입을 수 있는 옷을 디자인하는 데 방점을 두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계속 옷을 소비하지 않고 오래도록 입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미니멀리즘의 특징이기도 하다.
당신의 브랜드 피터 도와 헬무트 랭은 어떻게 다른가?
피터 도는 내가 느낀 것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브랜드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변화할지 나조차도 모른다. 반면 헬무트 랭은 타깃부터 확실하다. 젊은 세대에게 브랜드의 정체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옷을 단순히 미적인 영역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길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벌써 1년째 헬무트 랭을 이끌고 있다. 그간 어떤 변화들이 있었나?
로고, 패키지, 옷의 디테일 등 대부분의 것을 바꿨다. 공장을 다니며 옷의 안감과 트리밍도 다시 손봤고 니트, 슈즈, 벨트 등 정말 많은 것을 업데이트했다. 또 아틀리에와 디자인 팀도 새롭게 꾸렸다. 팀 자체를 바꾼 것은 아니고 오랜 시간 같이한 팀원들과 함께 새롭게 일하는 방식을 찾았다. 예를 들어, 이전엔 스케치 후 바로 공장으로 넘어갔다면 지금은 아틀리에가 있기 때문에 콘셉트를 구상하고 피팅, 드레이핑 등 모든 과정을 좀 더 유동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됐다. 또 젊은 팀원들을 대거 영입해 타깃층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다.
옐로캡 택시, 횡단보도, 비 오는 거리,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헬무트 랭이 바라본 뉴욕의 모습엔 일상적인 생동감이 넘친다. 헬무트 랭과 뉴욕은 어떤 연결성을 가지고 있나?
뉴욕과 헬무트 랭의 관계는 꽤 깊고 오래됐다. 일단 전통적으로 파리에서 시작하던 패션위크가 뉴욕 시작으로 바뀌게 된 것도 헬무트 랭 본사의 뉴욕 이전과 관련이 깊다. 헬무트 랭의 첫 광고도 옐로캡 택시에 실었다. 뉴욕이란 도시의 상징을 마케팅에 그대로 활용한 셈이다. 이미 그때부터 헬무트 랭은 뉴욕을 가장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브랜드였다고 할 수 있다.
피터 도가 바라본 뉴욕은 어떠한가.
뉴욕으로 처음 이주했을 때, 마침내 제대로 숨이 쉬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뉴욕은 거대했고 자유로웠다. 각기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콜라주를 한 것처럼 한데 섞여 뉴욕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낯설지만 한편으론 무척 설레는 경험이었다. 각자의 개성이 발현되면서도 결국엔 그게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 뉴욕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헬무트 랭 컬렉션은 어떻게 탄생하나? 디자인 과정이 궁금하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기도 하고, 콘셉트를 먼저 정하고 영감이 될 이미지들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2024 F/W 컬렉션은 차이나타운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차이나타운 백 플레이드를 활용했다. 원단은 견고하고 내구성이 강한 소재를 선택했는데 이민자들의 강한 회복력을 떠올리며 골랐다. 영감을 받은 대상은 하나지만 점층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을 거쳐 컬렉션을 완성하기도 한다.
두 시즌 연속 헬무트 랭의 아카이브를 재해석하고 있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테마나 요소가 있나?
헬무트 랭은 긴장감을 중요시하는 브랜드다. 주로 대비되는 개념을 사용하곤 하는데 2024 F/W 시즌에는 표출과 보호라는 주제를 사용했고, 2024 S/S 시즌에는 안전벨트에서 모티브를 얻은 디자인을 선보였다. 안전벨트는 차 안에서는 보호하는 기능을 하지만, 재킷에 더해지면 개성을 드러내는 요소가 된다. 실용적이고 기능적이면서도 표현 수단이 될 수 있다. 헬무트 랭은 앞으로도 양가적인 태도로 패션을 해석하지 않을까 싶다.
헬무트 랭 인스타그램 피드는 남달라 보인다. 백스테이지, 디자인실, 스태프들과 다 같이 바닥에 앉아 패턴을 고르는 모습… 컬렉션이 완성되기까지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니 흥미롭다. 이러한 운영 방식을 선택하게 된 이유나 계기가 있나?
사람들에게 헬무트 랭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피드 속 비하인드 컷의 90%는 내가 찍었고 운영에도 직접 관여한다. 때론 많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보는 이들에게 해석의 즐거움을 막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아직까진 흥미롭게 봐주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몇 달 전에도 한국을 방문했다고 들었다. 당신이 보는 서울은 어떤 도시인가?
8년 전, 석 달 전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서울은 정말 변화가 많은 도시라고 느낀다. 석 달 전과도 확연하게 달라졌다고 느껴질 정도니까. 거리에 상점들만 봐도 획일화되어 있지 않고 개성이 넘친다. 뉴욕과도 닮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한국이 더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것 같다.
헬무트 랭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후 오픈한 첫 국내 팝업 스토어다.
늘 사무실에서 일만 하다 보니, 내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사실이 어떤 임팩트를 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시아인이 큰 패션 하우스에서 일하는 게 흔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 와서 제대로 실감하고 있다. 헬무트 랭과 한국 그리고 나에게도 이번 팝업은 새로운 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즘 당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개인적인 삶은 지루한 편이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몰두하기 때문에 가끔 이 업계를 은퇴했을 때를 생각하곤 한다. 한국과 일본, 아이슬란드에서 여유를 즐기며 더 오랜 시간 머물고 싶다는 바람도 있고, 나의 가족과 강아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도 많다. 하지만 아직까진 일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 패션은 아직도 나를 가슴 뛰게 한다.
은퇴를 한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나?
푸드 트럭. 평소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복잡한 준비 과정을 거쳐 결과물을 낸다는 점에서 요리와 패션은 닮았다는 생각도 한다. 아버지가 군대에서 요리사로 일하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파인 다이닝보다는 많은 양의 요리를 할 수 있는 푸드 트럭이 끌린다.
헬무트 랭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이 있다면 지금일 것 같다. 피터 도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언제인가?
맞다. 헬무트 랭은 레더, 니트, 캐시미어 등 가을·겨울에 더 돋보이는 아이템이 많다. 나 역시도 가을과 겨울을 좋아한다. 레이어드할 수 있는 옷을 만들기에도 이맘때가 좋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나의 개인 브랜드 피터 도는 여름에 좀 더 강한 편이다. 어쩌면 더위에 대한 증오가 옷에 드러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웃음)
가장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 취향도 궁금하다.
유일하게 즐기는 영화 장르는 호러다. 그래서인지 <파묘>도 아주 재미있게 봤다. 음악은 사실 즐겨 듣는 편은 아니다. 조용하게 일하는 것을 좋아하고, 개인적으로도 콘서트나 북적이는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뉴욕 하면 소음을 빼놓을 수 없다. 좋아하는 소리가 있나?
처음 뉴욕에 왔을 땐 정말 시끄럽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백색소음처럼 익숙해졌다. 뉴욕의 소리를 반영한 것이 첫 데뷔 무대였던 2024 S/S 컬렉션의 사운드트랙이기도 하다. 뉴욕에서 택시를 타고 브루클린까지 가는 길의 모든 소리를 녹음해서 음악으로 재현했다. 헬무트 랭 곳곳에는 뉴욕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러한 소음도 이 도시만의 매력이다.
헬무트 랭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컬렉션 비하인드 컷.

헬무트 랭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컬렉션 비하인드 컷.

Credit

  • PHOTOGRAPHER 김재훈
  • ART DESIGNER 최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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