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아시아 문화 지평 특집 vol2. 아시아의 문화 용광로 필리핀

지금 세상의 모든 눈이 동남아시아 연합, 소위 '아세안'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세안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프로필 by 오성윤 2025.03.15

가치가 다 반영된 주식으로는 아무것도 건질 수 없다. 우리가 늘 찾아야 하는 건 저평가된 주식. 아직 모멘텀을 가진 무언가들이다. 국가가 주식이라면, 우리에게 가장 흥미로운 땅은 이미 발전되어 고착화된 선진국이 아니라, 격변이 도처에서 들끓고 있는 도상국들이다. 수십 년 동안 지하철 출구의 타일 하나 바뀌지 않는 일본이나, 아직도 성에서 귀족들이 살고 있는 유럽이 아니라, 아세안이 미래의 땅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지금 세상의 모든 눈이 동남아시아연합, 소위 ‘아세안’으로 몰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세안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그래서 준비했다. 아세안의 주요 다섯 개 국가에서 가장 사랑받는 각 다섯 분야의 스타들을 뽑았다. 그들의 활동을 통해 그 나라의 문화적 지평을 조금이나마 감각해볼 수 있도록.


PHILIPPINES

아시아에서 11번째로 큰 경제 규모를 가진 필리핀은 ‘새끼 호랑이 경제 국가(Tiger Cub Economies,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는 동남아의 국가들을 뜻하는 표현)’의 사례로 꼽힌다. 농업과 제조업이 국가의 주요 동력이지만, 친절한 국민성, 높은 문해율, 폭넓은 문화권과 교류할 수 있는 문화 특성 덕분에 서비스 산업 역시 잘 알려져 있다. 필리핀의 해외노동자(OFW)도 필리핀 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열대 섬들은 매해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으고 있으며,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업무 처리 아웃소싱(BPO) 산업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지역이 되었다.

필리핀은 76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이고, 사용하는 언어는 200가지에 달한다. 이 복잡한 기반 위에서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문구가 구현된다.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의 여타 이웃 국가들과 문화적으로 유사점이 많으나, 400여 년의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스페인과 미국으로부터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히스패닉(미국 내 라틴 문화의 융합)적이면서 아시아적인 독특한 특성은 필리핀에 ‘동남아시아의 라틴아메리카 나라’라는 별명을 안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오해 마시라. 필리핀은 근본적으로 아시아 국가다.

지난 10년 동안 필리핀은 전 세계 소셜미디어의 수도라 불리게 되었고, 그 안의 활기찬 대중문화도 널리 알려졌다. 매니 파퀴아오, 히딜린 디아즈, 레아 살롱가, 블랙 아이드 피스의 애플딥(apl.de.ap), 돌리 드 레온, 브레트먼 록, 마이클 신코 등 스포츠, 패션,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세계적 유명 인사들이 필리핀에서 배출되었다.


1 - Vice Ganda

Entertainer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높은 개방성을 가진 필리핀에서 바이스 간다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코미디언, 배우, TV 진행자로 성장했다.

바이스의 본명은 호세 마리 비세랄(Jose Marie Viceral)이다. 그는 필리핀 문화와 성을 주제로 한 거침없는 유머로 20년 가까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인기 버라이어티쇼 <It’s Showtime>의 메인 진행자 중 한 명으로 인지도를 쌓았고, 9년 동안 자신의 토크쇼인 <Gandang Gabi, Vice!>(안녕히 주무세요, 바이스!)를 이끌었으며, 필리핀의 유명 TV 게임쇼 <Everybody, Sing!>의 주요 진행자로도 활동했다. 세계적인 리얼리티 코미디 프로그램 <LOL: Last One Laughing>의 필리핀판을 진행하기도 했다. 영화계에도 진출한 그는 필리핀 박스오피스 사상 최대 흥행작들에 출연하며 배우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바이스의 활발한 활동은 주류 미디어에서 성소수자의 존재감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의 영향력 아래에서, 끊임없이 규범에 도전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현대 필리핀 사람들의 힘을 볼 수 있다.


2 - Marian Rivera

Film Star

마리안 리베라는 슈퍼스타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그녀가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멕시코의 통속 드라마인 <Marimar>(마리마르)의 리메이크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으면서였다. 이후로도 그녀는 무수한 TV 프로그램, 연극 공연, 영화에 출연했는데, 개중에는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은 정치 스릴러 영화 <Balota>(투표)도 있다. 그리고 명실공히 필리핀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셀러브리티 중 하나로 입지를 굳혔다.

연예계에서 여성으로서 자기 의지를 확고하게 지키며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조심스러움과 밝음으로 대중적 이미지를 연출하는 보편적인 셀러브리티들과 달리, 리베라는 일부 팬들에게 거리를 두고 차갑게 행동한 일화들이 알려지며 세간의 비판과 추측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직설적이고 진솔하며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떠나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녀가 여러 자선 기관에서 봉사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필리핀 의회는 그녀를 장애를 가진 여성과 아동들을 위한 홍보대사로 임명했다.

배우가 아닐 때, 리베라는 동료 배우 딩동 단테스의 다정한 아내이자 두 딸의 헌신적인 엄마다. 그녀는 자주 가족과 떨어져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프로젝트는 아무리 좋은 기회라도 거절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3 - SB19

Musician

케이팝이 세계를 호령하는 와중에 피팝(Pinoy Pop) 그룹 SB19은 세계 곳곳의 뮤직 신에서 꾸준히 떠오르고 있다. 조쉬, 스텔, 켄, 저스틴, 그리고 리더 파블로로 구성된 이 보이 그룹은 2018년 데뷔한 이래로 다른 필리핀 아티스트들이 나아갈 길을 열어왔다.

SB19은 자신들이 설립한 회사 1Z 엔터테인먼트에서 직접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다. ‘피팝의 왕’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자신들의 곡을 직접 쓰고, 프로듀싱을 하고, 디렉팅도 한다. 그들은 힙합, 록, 발라드, 디스코, 하우스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왔으며, 특히 히트곡 ‘Gento’(‘이렇게’라는 뜻의 필리핀 은어)는 오래도록 여러 대륙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2023년에는 월드 투어를 성공적으로 치렀으며 필리핀과 국제 무대에서 큰 상도 여러 번 수상했다. 2025년에는 새 앨범을 발표하고 또 한 번의 투어를 시작할 계획이다. SB19은 음악을 통해 필리핀의 문화를 알리고 있다. 현실적이고 겸손한 자세로 늘 다른 피팝 그룹들을 끌어올리는 데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들은, 필리핀의 음악적 재능이 세계적 수준이라는 또 다른 증거다.


4 - Ronald Ventura

Artist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전역의 수많은 갤러리와 박물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는 로날드 벤투라의 세계는 역동적이며 복합적이다. 그는 그라피티, 팝아트, 하이퍼리얼리즘 등 다양한 스타일을 혼합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것들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정체성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동시에 현대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탐험으로 작동한다.

벤투라는 현재 가장 많은 작품이 팔리는 동남아시아 작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그 자신의 과거 작품들을 비롯하여 경매 기록을 끊임없이 경신하고 있다. 그는 2011년 홍콩 소더비에서 자신의 대표작 ‘Grayground’를 842만 홍콩달러(약 16억원)에 낙찰시킨 기록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당시 동남아시아 아티스트의 작품으로는 역대 가장 비싼 낙찰가를 기록했다. 벤투라는 몇 년 후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가 1945만 홍콩달러(약 36억원)를 기록한 작품 ‘Party Animal’로 예전 자신의 기록을 뛰어넘기도 했다. 그가 얻어낸 이런 성취는 단순히 상업적 성공을 넘어 필리핀 예술계가 가진 창의성과 시각예술 분야에서의 재능을 조명한다.


5 - Carlos Yulo

Sports Star

체조 선수 카를로스 ‘칼로이’ 율로는 2024 파리 하계올림픽에서 필리핀인, 나아가 동남아시아인 최초로 금메달 두 개를 획득하는 역사를 썼다. 개인 기록 관점에서 보면 그는 그 전에도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아선수권대회, 동남아시안게임에서도 꾸준히 메달을 획득했다.

필리핀에서 농구와 복싱이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상황에서, 율로는 어린 나이에 비인기 종목에 속하는 체조에 뛰어들었다. 열악한 환경이 어린 선수의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필리핀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후에 실력 향상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16세 때부터 이어진 극도로 집중된 훈련이 나를 한계까지 밀어붙였다”고 종종 말했다. 한계는 율로의 실력뿐 아니라 정신과 의지까지 더욱 강하게 했고, 이는 결국 그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꿈을 이루며 결실을 맺었다.

율로는 극복하기 힘들 것 같은 난관을 만났을 때 회복력과 결단력을 발휘하는 필리핀 사람들을 상징하며, 그것이 율로를 말할 때 세계 최고의 자리를 꿰찬 체조 실력과 함께 그의 삶까지 들여다봐야 할 이유다.


Who’s the Writer?

알란 폴 카리온(Allan Paul Carreon)은 필리핀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칼럼니스트이자 인터뷰어다. <Esquire Philippiness> <Mega Magazine> 등의 매체에 기고하고 있으며 대중문화 및 사회 논평 블로그 allancarreon.com을 운영하고 있다.

Credit

  • WRITER ALLAN PAUL CARREON
  • PHOTO 바이스 간다 페이스북 계정 / 로날드 벤투라 페이스북 계정 / 게티이미지스코리아
  • TRANSLATOR 박수진
  • ASSISTANT 남가연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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