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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 쿡, 실재하는 자연 안에서 즉각 응답하다

파도와 햇빛이 모든 순간 변화하는 곳에서 그의 신체는 화폭 위에 어떻게 응답했는가.

프로필 by 박세회 2025.04.28

포르멘테라 섬의 바닷가에 집을 빌리고, 그 집에서 매일 드로잉북을 들고 바닷가로 나가 그림을 그렸다. 과슈에 바닷물을 섞기도 하고 드로잉 북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페이스 갤러리 서울에서 5월 17일까지 열리는 전시 [Nigel Cooke : Sea Mirror]는 그렇게 완성됐다. 파도와 햇빛과 비람. 모든 것이 매순간 변화하는 자연에 그의 신체는 어떻게 반응해 그 흔적을 화첩에 남겼는지, 그 과정에 대해 물었다.

‘Sea Mirror 6’, 2024, gouache on paper, 17 x 26 cm. © Nigel Cooke

‘Sea Mirror 6’, 2024, gouache on paper, 17 x 26 cm. © Nigel Cooke

이번에 페이스에서 공개한 작업 및 인터뷰 영상을 봤어요. 해변과 집이 너무 아름답더군요.

스페인 포르멘테라 섬과 그곳에 있는 집이에요. 작업을 위해서 여름에만 빌렸죠. 집을 빌려서 집중적으로 작업해보니 참 좋았어요. 해외에 스튜디오를 하나 마련해볼까 싶은 마음은 있지만, 아직 진행된 건 없어요.

이번 전시 <Sea Mirror>의 제목이기도 한 ‘Sea Mirror’ 연작은 그 작업 방식이 흥미롭다고 들었어요.

포르멘테라 섬에 있으면서 작은 드로잉북을 들고 바닷가로 가서 펼쳐놓고 바닷물을 과슈에 섞어 그렸어요. 게다가 채색한 후 밀물에 잠기도록 뒀죠. 자연에 실재하는 장소에서 화폭이 물에 잠기기도 하는 방식으로 그리다 보니, 바다의 영향이 그림에 드러나요.

파일 형태의 모니터로만 보다가 실제를 보니 연작의 사이즈가 정말 작아요. 지금까지의 캔버스 작품들과는 물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폼이라 다른 언어를 사용해야 했을 것 같습니다.

해변에서 작업을 하다보니 그런 크기과 형태가 됐어요. 작품의 크기가 ‘들고 다닐 수 있는 사이즈’로 결정된 거죠. 작가가 작품의 방식을 바꾸려며 생각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 방식을 신체에 내제화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제 몸을 다르게 쓸 수 있도록 훈련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이 작업들은 외부 공간에서, 작품이 제 신체와 밀착된 상태에서, 햇빛이 달라지고 바닷물이 밀려오며 즉각성을 요구하는 상태에서 한 작업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죠.

아까 얘기한 영상에서 작가님이 이런 얘기를 하지요. 물감을 칠한 붓질이 어떻게 빛처럼, 물결처럼 보이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고요. 사실 우리가 그림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캔버스에 물감이 쌓인 물체일 뿐이고, 다만 우리가 그것을 빛과 물결의 형태로 인식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아이콘, 심볼, 인덱스와 예술의 재현성에 대해 배웠던 대학시절 미학 교양 수업이 생각났습니다. 나이젤 쿡이라는 작가의 작품이 변해온 과정을 떠올려보면 그 바탕에는 확실히 이런 미학적인 논리가 있다고 느껴요.

저는 꽤 오랜 시간을 회화라는 것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그리고 시각적으로 생각하며 보냈어요. 회화에 대해서 철저히 알고 싶었죠. 그것의 역사, 그것의 이론, 그것의 실천에 대해서 공부했어요. 회화는 (당신이 말한) 모든 영역을 가로지르며 나타난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워요. 그리고 전 이 회화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화에 대해서 거의 러브레터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논문도 썼어요.(그가 언급한 그의 박사 논문의 제목은 <The Ambivalence of the Undead – Entropy, Duality and the Sublime as Perspectives on Contemporary Painting>이다.) 미술관들을 찾아 돌아다니고 미술사를 공부하고, 동시에 제 스스로 회화를 만들면서 회화의 360도 모든 면을 알고 싶어요. 그러나 그럴 수록 더 드러나는 것은 회화의 미스터리가 깊어만 간다는 점이에요. 그 미스터리가 제 안에서 깊어질수록 더 나은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논문이 궁금하네요. 어떤 내용이었나요?

정말 오래전에 낸 거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얘기를 하자면, ‘회화는 죽었다’라는 얘기들이 대체 왜 자꾸 수면에 떠오르는 것인지에 대한 논문이었어요. 실제로 시간이라는 것은 선형적으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닌데, 왜 자꾸 회화의 끝이 거론되는 걸까? ‘obsolete’(쇠락)한다는 것, 또 ‘obsolescence’(진부화)라는 개념들이 다른 예술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일어나고 있을까? 회화는 인류의 문명만큼이나 오래된 것인데, 계속해서 끝났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는 뭘까? 그런 것에 대한 논문이었어요.

회화의 죽음이라고 하면, 저는 사진의 재현성이 즉각적으로 떠올라요.

사진이 발명된 것도 회화가 종결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한 한 사건이죠. 그러나 제가 하고 싶었던 건 인간이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는 방식으로서의 회화를 굳이 선형적 진보의 흐름 속에서 (시작이나 끝을 가진 형식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였어요.

나이젤 쿡의 작품 세계를 표현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아마도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혹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 등일 거라고 생각해요. 분명히 구상인데 추상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많고 완벽한 추상인데 꽤나 구체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작품들이 있지요. 예를 들면 ‘Scandalous Magic Par Excellence (with Iggy Pop)’ 같은 작품은 풍경화인데 추상화 같아 보이기도 하지요.

그 작품은 정말 초창기 그림이에요. 어떻게 보면 제 작업은 추상적으로 만들어진 구상 혹은 구상적으로 만들어진 추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어요. 그 둘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하는 게 아녜요. 전 그 두 개념 사이에 있는 갭과 그 두 개념이 공유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두죠. 아까 우리가 얘기했듯이 모든 회화는 근본적으로 추상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 추상적인 형태가) 구체적인 상을 지시할 때가 있을 뿐이죠. 제 초창기의 작업들, 커다란 몸에 작은 머리가 달려 있고 뒤에서 번개가 치는 그런 작업들은 구상을 어떻게 추상적으로 구성할 수 있을지를 다뤄본 것들이죠. 지금 전시는 반대로 구상인양 그려진 추상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이 그림들의 색상의 톤이라든지 그 안에서 보이는 움직임들을 살펴보면 그런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나이젤 쿡 포트레이트 사진. © Pace Gallery

나이젤 쿡 포트레이트 사진. © Pace Gallery

아까 우리가 잠시 얘기했던 회화에서의 대상성이라는 주제도 재밌었어요. 예를 들면 당신 작품 중에 ‘Rilke in Rome’(2025)같은 무척 구체적인 제목들이 무엇을 전달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거죠.

전 워낙 언어라는 것을 좋아해요. 그리고 회화가 가진 언어적 측면도 좋아하고, 또 좋아하려고 노력해왔죠. 이를 테면 최근에는 제목을 통해서 어떠한 것을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하지 않아요. 명확한 이미지를 그리지 않고 그보다 어떤 단어의 소리나 느낌을 통해 뭔가를 떠올리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죠. 예를 들면 ‘The Bees of the Invisible’이라는 작품의 니콜라 푸생의 ‘The Nurture of Jupiter’를 레퍼런스로 삼았지요. 목동과 정령이 염소를 붙잡아 그 젖을 아기 주피터에게 먹이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지요. 이 장면의 후경에는 나무가 있는데, 자세히 보면 그 나무 근처에 벌떼가 등장해요. 그래서 저는 생각했어요. 이 장면을 그 벌들의 관점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전 이런 식의 불가능한 상상력, 말하자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이 그 외부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유희적이고 재밌는 장면들이 떠오르면 작품으로 구현해보곤 해요.

최근에 본 한 넷플릭스의 시리즈에서 제우스와 바람 피운 디오니소스의 엄마를 질투의 여신 헤라가 꿀벌로 만들어 버리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아까 그 영상 속에서 신화와 그림에 대해 얘기하면서 ‘옛 신화 속에서 몸은 하나의 관념’이라는 얘기를 했는데, 역시나 관련이 있어보여요.

맞아요. 그런 상상력이죠. ‘몸이 하나의 관념’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 제가 의미했던 것은 신화 속에서 신체가 등장할 때, 그게 반드시 인간이라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돌로 변할 수도 있고, 벌로 변할 수도 있는 하나의 관념이죠. 복수의 이야기, 사랑의 이야기 등 그런 이야기의 관념 또한 그림 속에 표현된 신체에 들어갈 수 있고, 늘 새로운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전 그런 점에서 신화 속에 등장하는 ‘몸’이 우리가 가진 회화라는 개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회화는 물질로서는 캔버스와 물감일 뿐이지만, 제 터치와 움직임 그리고 운동을 담고 있는 산출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또 이 회화라는 ‘물체’의 경계 역시 변화한다는 점에서 그렇지요.

추상 표현주의의 방법론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릴케의 ‘사물시’의 회화 버전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전 릴케의 글이 로맨틱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제 작업 안에도 어떤 열망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질문을 향한 열망인 듯 한데, 정확하게 어떻게 표현해야할지는 모르겠어요. 릴케가 쓴 ‘젊은 시인을 위한 편지’라는 글을 읽으면 사랑과 창조성의 관계, 창발이 떠오르도록 기다리는 인내, 자신의 때를 아는 것 등에 대해 얘기하지요. 전 릴케가 쓴 시보다 그 편지가 더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는 생각도 해요.

예전 작품부터 살펴보면 어쩌면 선명한 색의 선들이 화폭 위를 떠돌던 바로 직전 전시, 그 전에 인물들이 화폭위에 유령처럼 떠돌던 작품들, 그리고 자못 감정적인 이번 전시의 작품들까지를 놓고 보면 나이젤 쿡이라는 작가가 마지막 변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피카소가 완전히 큐비즘에 들어서기 전에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같은 느낌이랄까요?

‘Rilke in Rome’, 2025, oil on linen, 130.5 x 165 cm. © Nigel Cooke

‘Rilke in Rome’, 2025, oil on linen, 130.5 x 165 cm. © Nigel Cooke

결국 제가 가진 묘사의 힘이라는 것을 제 안에서부터 그림을 통해서 배운다고 생각해요. 모든 화가들은 정말 진실된 어떤 주제를 다룰 때는 종종 그 주제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한 폭의 그림에 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죠. 예를 들면 ‘자유’나 ‘가능성’과 같은 주제는 하나의 그림에 묘사되기보다는 작가가 그 주제를 체화해야 표현될 수 있어요. 작가 자체가 자유와 가능성을 내재화 해야 그 주제를 다루는 그림을 그릴 수 있죠. 모든 작가들이 이런 변화의 과정을 겪어요. 또 종종 어떤 주제를 다루는 그림은 (그 주제를 깨닫는 길로 가는) 문을 열어주는 게이트웨이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나치게 젊은 작가가 어떤 변화의 길목도 보여주지 않은 채 대뜸 추상으로 진입하면, 전 그 진정성을 의심해보는 편입니다. 반면에 작가님의 경우엔 여러 작품들의 연보가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걸 증명하지요.

추상과 구상의 관계라는 것이 항상 그것이 지닌 가치의 범위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 생각각해요. 어렵고, 고통스럽고, 어두운 것에서부터 좀 더 밝고, 가볍고, 희망적인 상태까지 연속적인 단계가 있다고 생각하지요. 이걸 정확히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명확한 건 그러한 모든 단계를 지닌 폭, 인간이 가진 폭을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게 있거든요. 어렵고 뭔가 징그럽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아름답고 아주 부드럽기도 한 것을 묘사할 수 있는, 글쓰기라면 어휘와 같은, 이제 다양한 붓질을 통해서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고 다양한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그 ‘폭’을 저 역시 가지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상의 영역에 다다르려면 뭔가 자신의 뇌와 신체가 서로 연결되고, 감정에 따라 붓질이 움직이는 어떤 변신의 과정이 필요해요.

[Nigel Cooke : Sea Mirror] 설치전경, 4월 11일~5월 17일까지, Pace Gallery, Seoul.

[Nigel Cooke : Sea Mirror] 설치전경, 4월 11일~5월 17일까지, Pace Gallery, Seoul.

지난 2020년 전시에서는 훨씬 더 선명한 색들이 화폭을 지배했고, 그 그림들을 보면서 꽤나 관념적이라고 느꼈어요. 한편 이번 전시의 그림들은 좀 더 모호하고 시적입니다. 두 전시 사이에 화풍이 눈에 띄게 변한 이유는 뭘까요?

2020년 전시의 그 선들은 여전히 어떠한 형상이었어요. 속이 차 있지는 않지만, 어떤 프레임처럼 작동하는 그 선들은 어떻게 보면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기도 하고, 벽처럼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것이기도 했죠. 그러나 이제 제 선들에는 구멍이 나 있고, 그림 안에 있는 형태들은 좀더 다공적인 특성을 지닙니다. 안과 밖, 내부와 외부,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그 경계라는 것 자체가 움직이도록 그리고 싶었지요. 그림에서 ‘선’이라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픽션적이라고 생각해요. 선에는 정보 혹은 그 비슷한 것들이 흐르죠. 지금은 차이나 경계보다 방금 얘기했던 불분명하고, 다공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선을 그어서 생긴 형상들에서 솔리디티, 단담함을 빼내고 그 대신에 네트워크로 그 연결을 채우고 싶었습니다. 이번 작업을 보면 선은 있지만, 그것을 지운 것처럼 또 무언가가 그 선 위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그 위에 다른 선을 그어서 그것을 없앤 것처럼, 선 자체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선이라는 것 자체가 가진 우아함과 의미를 해체하고 그 해체를 전체적인 분위기로 확산하는 작업을 하게 됐지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당신은 언제 그림이 완성됐다는 걸 알게 되나요?

흥미롭고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리다보면, 창작의 과정 밖에서 서서 작업을 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해고 당하는 것처럼요. 작품에 더 가고 싶어도 이제는 들어갈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지요. 그냥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아요. 무엇이든 덧붙여도 그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요. 흥미로운 건 몇 번의 세션을 거쳐서 작품이 완성이 되는지를 살펴보면 괜찮게 완성이 됐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의 세션 수가 비슷해요. 7번에서 8번의 세션을 거쳐 완성된 작품들이 대부분이죠. 10번까지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 이상 넘어가지는 않아요. 매일 작업을 한다고 치면 일주일에서 열흘 사이에 완성되는 셈인데, 그걸 넘어가면 작품이 힘을 잃게 되는 것 같아요.

‘해고 당한다’라는 표현이 재밌네요.

맞아요. 작품이 완성되면 저를 해고하지요.

Credit

  • PHOTO Courtesy of Pac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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