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마라토너를 위한 새로운 선택, 사이판 마라톤 경험기

인생 첫 마라톤에 참가하러 사이판까지 다녀왔다. 새벽 4시부터 달렸고, 적도의 햇살에 피부는 빨갛게 익었으며, 새끼발가락엔 핏물집이 터졌지만, 절대 잊을 수 없을 첫 풀코스 마라톤을 기록한다.

프로필 by 박세회 2025.05.04

제2차 세계대전에는 여러 전선이 있었다. 그중 거대하고 유명한 전선들을 꼽아보자면, 대부분 독일이 만든 것들이다. 영화에도 나왔던 바로 그 프랑스 쪽의 서부전선, 소련과 맞붙었던 동부전선, 유고슬라비아·그리스 등을 침공하며 만들어진 지중해 전선, 영국 및 미국 해군과 격돌했던 대서양 전선. 그러나 아무래도 우리와 가까운 제2차 세계대전의 흔적은 ‘태평양 전선’이다. 일본이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과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미국을 대표로 하는 다국과 벌였던 거대한 전쟁. 그걸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살짝 구분 지어 ‘태평양전쟁’이라 부른다. 사이판으로 대표되는 마리아나제도는 이 태평양전쟁의 요충지 중 하나다.

태평양의 지도를 잠시 머릿속에 그려보자. 태평양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섬 하와이가 있고, 그 서쪽으로 웨이크섬, 또 그보다 더 서쪽으로 북마리아나제도, 즉 사이판이 자리 잡고 있다. 태평양전쟁은, 일본이 석유가 나는 동남아시아를 차지하기 위해 유일한 군사적 위협인 하와이에 주둔해 있던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됐고, 분노한 미국이 세계대전에 전격 참전한 뒤 전세를 뒤집고, 마리아나제도에 있는 사이판 바로 옆 섬 티니안에서 이륙시킨 비행기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와 팻맨을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하며 끝났다. 그래서 태평양전쟁 한복판에 있었던 사이판 섬에는 전쟁의 흔적이 섬 곳곳에 뿌려져 있다. 지난 3월 8일 내가 달리던 ‘사이판 마라톤’의 터닝 포인트는 우리말로 ‘만세 절벽’이었으나 영어로는 ‘후레이 클리프’나 ‘비바 클리프’가 아니라 일본어와 섞인 ‘반자이 클리프’였다. 1944년 여름에 벌어진 치열한 사이판 전투의 끝에서 일본의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80m 아래 바다로 몸을 던지며 ‘텐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쳤기 때문이다.

사이판 마라톤 당일 새벽(그렇다. 뜨거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 사이판 마라톤의 풀코스는 새벽 4시에 출발한다), 마이크로 비치에서 출발한 나는 2시간여를 뛰어 반자이 클리프에 다다랐고, 눈앞에 펼쳐진 태평양의 무한함과 사상에 편입되어 죽는 순간까지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친 인간의 무상함의 대비를 생각하며 지적 감성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고 하면 완전 거짓말이고, 종아리와 발목의 고통을 참는 데 모든 의식을 집중한 채 헐떡이며 1km 6분대의 페이스로 걷다시피 뛰고 있었다. 코너를 돌 때면 절벽으로 가는 유일한 길인 ‘반자이 클리프 로드’의 서쪽으로는 이제 막 떠오른 태양에 자글자글 부서지는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졌고, 동쪽으로는 ‘수어사이드 클리프’(반자이 클리프와 비슷한 이유로 붙여진 다른 절벽의 이름이다)의 절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러나 이미 30km를 넘게 뛴 사람의 마음은 며칠을 굶주린 짐승만큼 날카로운 법이라, 너무 아름다운 경치마저 살짝 짜증이 났다.

이날 사이판 마라톤에는 총 612명이 참가했다. 마라톤을 여러 번 뛰어본 사람이라면 이 행사가 얼마나 작은 규모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참가한다는 JTBC 서울 마라톤의 작년 참가자 수는 10km와 마라톤(하프, 휠체어 포함)을 합해 3만7000명 수준이었다. 그러나 또 사이판에 와본 사람이라면 이 섬의 시가지가 가진 아기자기한 규모에 비해서는 대회가 그리 작은 수준이 아니라는 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19개 국가에서 612명이 참가했어요. 지난해 9개 국가에서 512명이 참가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성장이죠.” 마리아나관광청 구정회 이사가 말했다. “15분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는 게 가라판 시내인데, 그 작은 곳에 이렇게 많은 마라토너가 모이니까 제대로 축제 분위기가 나네요.”

특이한 점은 이들이 대부분 크루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라톤 대회가 있기 하루 전, 남는 시간 동안 스노클링을 즐기기 위해 찾은 마나가하섬에서 나는 한 무리의 일본인 관광객들을 만났다. 그들이 마라토너인 것을 알 수 있었던 건 바다에 들어가며 겉옷을 벗었을 때다. 체지방률이 10% 한참 미만인 듯한 그 몸들은 마치 예수의 조각상처럼 잘게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사이판 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섬을 찾았다는 이들은 나와 같은 비행기로 사이판에 입도해 나와 같은 비행기로 떠날 예정이었다. “일본에서는 사이판 직항이 없어요. 인천을 경유하는 경우가 많죠”라며 그는 “사이판 마라톤은 국제육상경기연맹에서 인증한 코스거든요. 여기서 뛴 기록은 정식으로 인정이 되니까 일석이조인 셈이죠”라고 말했다.

국제육상경기연맹이 인증한 코스라는 점 때문에 수많은 한국인 역시 참가했다. “요새 한국 마라톤 신청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시죠?”라며 같은 날 마나가하섬에서 만난 한국인 러너가 말했다. 그에 따르면 소위 동마(구 동아마라톤, 현 서울마라톤)나 제마(JTBC 서울마라톤) 신청하는 건 임영웅 콘서트 정도는 아니지만 웬만한 아이돌 콘서트만큼 힘들다고 했다. “오는 김에 가족들 다 데리고 왔어요. 어차피 올 거 휴가도 한꺼번에 해결하는 거죠.”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보니 어쩐지 호텔 로비에 유모차가 참 많았다. 가라판의 해변가에는 큰 호텔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내가 묵었던 크라운 플라자 리조트 사이판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리아나 비치 리조트다. 두 호텔 모두에서 마라톤의 출발점인 마이크로 비치 로드까지는 걸어서 채 5분이 되지 않는다. 사이판 마라톤을 전후로 두 호텔은 늘 북적거렸는데, 아마 그 사람들 중 적어도 3분의 1은 마라톤에 참가하는 사람들이거나 그들의 가족이었을 것이다. 내가 묵었던 크라운 플라자 리조트는 마라톤을 위해 찾은 사람들에겐 완벽한 곳이다. 다이닝, 피트니스 설비, 라운지, 바 등 모든 시설이 가라판 시내에 부족한 시설들을 갈음한다. 마라토너의 다수가 이곳을 이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이판 마라톤에 참가한 유이는 연령대 1위를 차지했다.

사이판 마라톤에 참가한 유이는 연령대 1위를 차지했다.

크라운 플라자 리조트 사이판의 가장 큰 자랑은 아타리 디너쇼다. 해변에 접한 로맨틱한 야외 레스토랑 아타리에서 차모로 원주민들이 라이브 음악에 맞춰 추는 전통 춤을 추는 감상하며 뷔페를 즐길 수 있다. 관객 참여형 공연으로 종종 댄서들에게 붙잡혀 불려 나가는 일이 있으니 극단적 내향인이라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둬야 한다.

그래서 좀 더 이를 꽉 물고 뛰어야 했다. 실은 그날 이미 31km 지점에서 오른쪽 새끼발가락 쪽에 감전과도 같은 통증이 흘렀고, 잠시 후에 보니 물집에서 터져 나온 피가 신발 바깥쪽까지 배어나오고 있었다. 워터스테이션에서 주저앉아 신발을 벗어보니 새끼발톱이 생을 다한 듯 보였다. 얼마 전에 새로 산 신발이 길이 덜 든 게 분명했다. 그러나 거기서 포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마라톤이란 31km 정도를 달렸으면 나머지는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완주해야 하는 법이다. 지나가고 마주치며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면면이 기억난다는 점이 내 등을 떠밀었다. 같은 호텔에 묵는 사람들이었다. 그 말은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할 때 다시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호텔 조식 때 떳떳하게 절뚝거리려면 완주는 필수였다. 완주도 못 하고 절뚝거리는 건 너무 창피하지 않은가. 워터스테이션에서 빌린 키친타월을 새끼발가락에 감고 겨우 완주한 나의 기록은 4시간 55분. 첫 마라톤치고도 처참한 기록이었지만, 다음 날 얼굴을 들고 천연 해저 동굴인 그로토를 찾을 만큼은 됐다. 그래도 완주는 했으니까. 그리고 그로토에서 나는 여지없이 마라토너 무리들을 만났다. 울산에서 소방공무원을 하고 있다는 20대 친구가 나를 토닥이며 말했다. “5시간 안에만 들어왔으면 공식 기록으로 인정도 해준다”라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만약 중간에 포기했더라면 그로토 관광 따위는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로토의 물은 유난히 맑고 차가웠다.

한편 이날 대회에는 마리아나관광청의 스포츠 홍보대사 유이와 가수 션의 가족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모두 10km를 성공적으로 달렸다. 특히 유이와 션의 셋째 아들 노하율 군은 연령대 1위를, 션의 첫째 딸 노하음 양은 여성 전체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 참가자들이 눈에 띄게 많은 건 올인원 러닝 플랫폼 ‘러너블’과의 MOU 체결 덕이기도 했다. 612명 중 총 200명이 한국인 참가자들이었는데, 이들 중 다수가 러너블을 통한 마라톤 관광 상품으로 사이판을 찾았다. →

해변에서 바라본 크라운 플라자 사이판의 모습. 숙박객만 입장할 수 있는 프라이밧한 해변의 한적함을 즐길 수 있다.

해변에서 바라본 크라운 플라자 사이판의 모습. 숙박객만 입장할 수 있는 프라이밧한 해변의 한적함을 즐길 수 있다.

CROWNE PLAZA SAIPAN

사이판의 유일한 번화가인 가라판을 대표하는 호텔이자, 미크로네시아 최고의 리조트로 꼽히는 크라운 플라자 사이판은 섬에서 가장 최근 리모델링을 마친 최신식 호텔이기도 하다. 섬에서 가장 많은 422개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는 규모 덕에 호텔 섬에서 가장 럭셔리한 시설들을 보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고급 와인이나 위스키를 즐기고 싶다면, 가라판을 돌아다닐 것 없이 가장 먼저 찾아야 하는 곳은 바로 크라운 플라자 사이판이다. 넓은 야외 풀장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리조트 해변은 주로 숙박객들이 이용해 인적이 드문 편. 저녁이면 모든 객실에서 석양으로 물들는 더 없이 낭만을 즐길 수 있다. 기사에서도 언급한 아타리 디너쇼는 계절마다 다른 요일에 펼쳐지는데, 해변에 접한 로맨틱한 야외 레스토랑 아타리에서 차모로 원주민들이 라이브 음악에 맞춰 추는 전통 춤을 추는 감상하며 뷔페를 즐길 수 있다.

FUN-SAIPAN 3

사이판을 즐기기 좋은 세 개의 스폿.

스노클링 천국 마나가하섬

지금까지 본 모든 바다 중 가장 아름다운 바다를 사이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나가하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차원이 다른 맑은 바다는 수경을 쓰고 앞을 내다보면 10m 밖의 물고기가 보일 정도로 물이 투명하다. 굳이 스노클링을 하지 않더라도 매점에서 맥주를 사 마시며 태닝만 해도 천국의 한 조각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 Junji Takasago

© Junji Takasago

다이버들의 천국 그로토

사이판섬의 북동쪽에 위치한 바다와 연결되어 있는 해저 동굴 그로토는 무섭도록 아름다운 곳이다. 최대 수심이 무려 20m를 넘어 밧줄만 잡으면 검푸른 바닥에 도달해볼 수 있다. 마나가하의 바다가 에메랄드빛으로 아름답다면 그로토의 물은 짙은 파랑으로 빛난다. 다이빙을 못해도 가이드와 함께라면 전혀 위험하지 않다.

숨겨진 섬 포비든 아일랜드

사이판 남동쪽에는 마치 나무 그루터기처럼 생긴 ‘포비든 아일랜드’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제대로 된 주차장도 없을 정도로 높은 언덕 위에서 가파른 내리막과 오르막을 지나야만 도달할 수 있는데, 그 경관은 하이킹의 노고를 다 갚고도 거뜬히 남는다. 가이드에게 숨겨진 동굴로 가자고 해보자. 상상도 하지 못했던 로맨틱한 바다 동굴을 만날 수 있다.

Credit

  • PHOTO 마리아나관광청
  • ART DESIGNER 최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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