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제 우리는 '바나나 우유: 더 무비'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게 아이피로 귀결되는 콘텐츠 시장의 판도를 살펴보자.

프로필 by 박세회 2025.06.11

올해 한국 영화도 영 답이 없다. 2025년도 절반이 지난 지금, 관객 수 300만을 넘은 영화가 없다. 기대작 <승부>와 <하얼빈>도 겨우 200만을 넘겼다. 4월 개봉한 <야당>이 현재까지 255만으로 1위다. 심지어 흥행을 무조건 보증하던 마동석의 신작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도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마동석조차 극장에 관객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큰일이다. 2026년 개봉할 <범죄도시 5>가 전작들처럼 천만을 넘지 못하면 그건 한국 영화의 장례식이 될 것이다.

나는 <범죄도시> 시리즈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 따져보자면 1편은 좋았다. 2편도 괜찮았다. 전형적인 한국 형사물 장르에 속하는 1편과 달리 가볍고 빨라졌다. 할리우드 액션 프랜차이즈 스타일에 가까워졌다. 3편과 4편은 이를테면 <리썰 웨폰> 3편과 4편 같은 영화다. 다들 1, 2편만 기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딱히 만들 필요가 없는 속편들이라는 소리다. 물론 이런 나의 불평은 이제 아무 상관 없다. <범죄도시 3>와 <범죄도시 4>는 모두 천만 이상 관객을 끌어모았다. 다른 대작들이 모조리 침몰하는 가운데, 마동석만 살아남았다.

얼마 전 영화 만드는 사람들을 만났다. 일본 영화 이야기가 나왔다. 요즘 충무로 영화인들은 불안하다. 한동안 우리가 대중문화 영역에서는 압도적으로 이겼다 자신했는데 영화 부문은 어쩐지 역전당하는 느낌이 들어서다. 요즘 일본 영화는 한국보다 사정이 낫다. 극장 관객 수가 한국처럼 갑자기 줄어들지도 않았다. 비밀은 하나다. 단단한 IP(Intellectual Property : 지적재산권)다. 2024년 일본 박스오피스를 살펴보자. 1위는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이다. 2위는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 4위는 <극장판 SPYxFAMLIY CODE:White>, 6위는 <기동전사 건담 SEED FREEDOM>이다. 9위는 <도라에몽 : 진구의 지구 교향곡>이고, 10위는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THE MOVIE : 유어 넥스트>다. 박스오피스를 이끈 10편 중 6편의 작품이 모두 일본의 오랜 IP를 활용한 애니메이션이다.

한국은 이런 게 없다. 우리는 코난도 없고 건담도 없다. 도라에몽도 없다. 원피스도 없다. 지난 몇 년간 충무로는 웹툰의 세계에서 그나마 IP를 수혈했다. 문제는 수혈을 받는 곳이 전통적인 충무로 영화사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애플티브이플러스 등 미국산 OTT들도 웹툰 원작 영화와 시리즈로 꽤 장사를 잘했다. 문제가 터져 나올 시점이 됐다. 더는 쓸 만한 IP가 없다. 검증된 IP가 없다. 정말 쓸 만한 IP는 다 써먹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뭘 써먹을 것인가. <아기공룡 둘리>? 마동석 그리고 그가 만든 마석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력이 점점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그는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보장하는 IP다.

원래 한국 영화의 장점은 익숙한 IP 놀음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차피 IP라고 부를 만한 게 없었다. IP가 없을 땐 창의적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상업영화를 만드는 나라 중 하나가 됐다. 할리우드에 존재하던 상업영화의 컨벤션을 살짝 트는 재주로 돈도 벌고 상도 받았다. 가장 상업적인 감독이 가장 창의적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였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극장 관객이 여러 이유로 감소하자 더는 누구도 창의적일 수 없게 됐다. 오리지널 시나리오 영화들이 실패하자 투자가 멈췄다. 이제 투자사들은 감독의 이름과 스타가 아니라 검증된 IP를 먼저 찾는다. 웹툰, 웹소설 등 대중에게 익숙하고 팬덤이 존재하는 IP를 기반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나마 안전해진 탓이다.

몇몇 성공작이 나오긴 했다. 넷플릭스의 <킹덤> 시리즈와 <오징어 게임> 정도라면 오래 살아남는 IP가 될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그 외에는? 다시 말하지만 한국은 IP가 별로 없는 나라다. 이제 IP를 만들기 시작한 나라다. IP만 찾아서는 곤란하다는 소리다. 창의적인 프로젝트에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도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분명 지금 어떤 제작자는 “이런 이야기가 투자가 되겠냐”며 창의적인 시나리오를 쓰레기통에 쑤셔 넣고 누구도 모르는 제목의 웹소설 프린트물을 회의실 탁자에 던지고 있을 것이다. “이거 드라마, 쇼츠 드라마, 극장판으로 나눠서 싹싹 어떻게 발라먹을지나 회의해.”

할리우드도 다를 건 없다. 3월 공개된 애플티브이플러스의 <더 스튜디오>는 IP 타령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풍자 코미디다. 주인공 매트 레믹(세스 로건 분)은 위기에 빠진 영화 제작사 ‘콘티넨털 스튜디오’의 신임 대표로 임명된다. 이 임명에서는 조건이 하나 있다. 분말가루 주스 브랜드인 ‘쿨에이드’를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아니다. 말이 되는 개소리다. 실제 할리우드는 21세기 내내 영화화가 불가능한 IP로 억지 영화를 줄줄이 생산해왔다. 장난감 회사인 ‘하스브로’의 보드게임을 소재로 <배틀쉽>(2012)을 만들었다. 크게 망했다. 스마트폰 이모지를 소재로 <이모지 무비>(2017)를 만들었다. 더 크게 망했다. 2023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시사를 열자 모두가 한탄했다. 이건 뭐, 그냥 IP밖에 없는 영화였다. 수억 명의 팬이 있는 역사적 게임이라고 해도 영화로 만들 땐 뭔가 좀 영화적인 데가 있어야 한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게임을 어떻게 영화로 옮길지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만든 영화였다. 시사회를 나오며 나는 말했다. “망할 거야.”

이쯤에서 내가 늙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늙어도 영화 평론은 할 수 있다. 영화평론가는 다 자기 시대의 유물이라 늙으면 영화 평론도 좀 늙는다. 젊은 시절 본 영화들을 영원히 평가 기준으로 삼는 탓이다. 1984년 패미컴 출시와 함께 등장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대히트였다. 할리우드는 당연히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다. 닌텐도도 할리우드라면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993년 ‘공식 게임 라이선스를 얻어 제작한 세계 최초 게임 원작 기반 실사 영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개봉했다. 데니스 호퍼와 밥 호스킨스 등 연기파 스타들이 출연하고 당대로서는 엄청난 제작비 4800만 달러를 들였다. 실패했다. 문제는 분명했다. 간단하기 짝이 없는 게임의 세계관을 어떻게든 영화적으로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해보려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그래도 노력은 했다.

2023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반대다. 아무 노력이 없다. 게임 팬들을 위한 서비스만 가득하다. 이건 영화인가? 아니면 그냥 게임의 연장선인 어떤 새로운 종류의 극장용 영상인가? 어쨌든 “망할 거야”라던 내 추측은 틀렸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겨울왕국>의 흥행 성적도 제쳤다. 2025년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전 세계 엄청난 팬을 거느린 게임 IP를 기반으로 한 <마인크래프트 무비>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캐릭터라도 있다. 마인크래프트는 똑같이 생긴 블록으로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 게임이다. 이런 걸 어떻게 영화로 만드냐 불평하는 사이 할리우드는 또 해냈다. <마인크래프트 무비>는 심지어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보다 비평가 평점이 낮았지만 역시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박살 내는 중이다. 전문가의 평가? 그런 건 더는 필요 없다. 내가 원하든 아니든 영화라는 매체는 점점 뭔가 다른 것이 되어간다.

이젠 나도 굴복하겠다. 영화의 시대는 갔다. 사람들은 극장을 점점 덜 찾는다. 새로운 세대는 점점 더 극장과 넷플릭스의 차이를 개의치 않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는 이벤트가 되어야 한다. 팬미팅이 되어야 한다. 그게 감독의 팬이든 원작의 팬이든,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전에 팬덤이 존재하는 영화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IP가 게임이든 음료수든 영화로 만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더 스튜디오>의 주인공 매트는 어떻게든 ‘쿨에이드’로 영화를 만들려 시도한다. (능청스럽게 직접 출연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독약을 쿨에이드(정확하게는 쿨에이드와 비슷한 ‘플레이버 에이드’라는 다른 상품)에 타 마시고 918명이 자살한 1978년 ‘존스타운 집단 자살 사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회사가 그런 걸 받아들일 리가 없다. 그래도 회사는 어떻게든 쿨에이드 영화를 완성하려 할 것이다. 회사는 쿨에이드에 대한 어떤 고민도 없는 다른 감독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에 방해되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저작권을 사버린 뒤 사장시킨다. 장사가 되면 해야 한다.

가만 생각해보니 한국에도 가능성은 있다. 마동석 빼면 IP 부족한 나라라고 한탄했다만, IP가 꼭 소설이나 만화나 게임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쿨에이드가 된다면 바나나우유도 된다. 이 글을 우연히 읽게 될 영화 제작자는 꼭 바나나우유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위한 IP 확보에 나서길 바란다. 요즘 한국 오는 여행자들이 환장을 하는 아이템이라고 하니 국제적 흥행도 노려볼 만하다. 뭔 말도 안 되는 농담이냐고? <바나나우유 더 무비>가 개봉하는 날 이게 농담이었는지 진담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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