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펜폴즈의 고향 남호주 와인들의 지금과 미래

호주 미식의 심장인 남호주와 남호주의 심장인 애들레이드 인근을 돌아다니며 와인 지도를 그려봤다.

프로필 by 박세회 2026.03.31
약 마흔 명의 기자와 크리에이터들이 각자가 원하는 호주를 탐험하고 그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바로사 밸리의 원더그라운드 갤러리 앤드 미러스 빈야드의 에스테이트에 모였다.

약 마흔 명의 기자와 크리에이터들이 각자가 원하는 호주를 탐험하고 그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바로사 밸리의 원더그라운드 갤러리 앤드 미러스 빈야드의 에스테이트에 모였다.

바로사 밸리의 언덕에서

지난 3월의 어느 날, 나는 전 세계에서 온 약 마흔 명의 기자 및 콘텐츠 크리에이터들과 함께 바로사 밸리에 있는 한 언덕을 향해 걷고 있었다. 언덕에 다다르자 머리가 하얗게 센 선주민 남자가 이름을 알 수 없는 풀을 태우며 그 연기로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는 이 풀의 연기를 몸에 입으면 병이 다 사라진다고 믿어요. 예전부터 이 땅에 내려오는 풍습이죠.” 그가 말했다. 그와 함께 등장한 선주민 여성 댄서들의 환영 공연이 끝나자, 우리는 걸어왔던 평원을 가로질러 광활한 포도밭 속에 위치한 한 갤러리로 향했다. 정말 누군가의 상상에나 있을 법한 공간이었다. 단층으로 지어진 넓은 갤러리 안에는 호주 작가들의 현대미술 작품들이 걸려 있었고, 건물 앞으로는 넓은 계단식 잔디밭이 자리했다. 그 너머로는 캥거루가 뛰어다니는 갈대밭과 꽤 큰 연못이 보였다. 우리는 계단식 잔디밭에 세워둔 하얀 텐트에서 남호주의 로컬 음식과 함께 바로사 밸리의 와인을 마시며 축배를 들었다.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것은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포도밭이었다. 경관에 눈을 조금이라도 오래 두면 울컥하며 신비로운 감정이 올라왔다.

호주관광청이 그런 신비로운 장소로 전 세계 미디어와 인플루언서, 그리고 호주 현지의 미식 셀럽들을 불러 모은 이유는, 세상에는 직접 그 장소에서 경험해야만 전달될 수 있는 감흥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으로는 도저히 전할 수 없고, 큰돈을 들여 직접 불러 모아야만 보여줄 수 있는 대단한 것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관계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교류하게 하는 'Gday Stories'(이하 '그데이 스토리즈')라는 프로그램을 처음 기획하고 실행하며 선택한 장소가 바로사 밸리에 위치한 원더그라운드 갤러리 앤드 미러스 빈야드(Wonderground Gallery and Mirus Vineyards)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단 이 거대한 프로그램의 기획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호주관광청은 지난 3월 초부터 두 주에 걸쳐 전 세계 기자와 크리에이터들을 호주로 불러 모아 시드니가 있는 뉴사우스웨일스, 멜버른이 있는 빅토리아, 브리즈번이 있는 퀸즐랜드, 퍼스가 있는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로 마치 신입 사원을 파견하듯 보냈다. 그러고는 그 중간에 날을 잡아 애들레이드로 집합시키더니 우리 모두를 차에 태워 바로사 밸리로 데려갔다. “호주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날 때 '굿 데이'를 흘리듯 'G'day'(그데이)라고 말하죠. 기자와 크리에이터들이 호주의 이곳저곳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가지고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는 것이 바로 그데이 스토리즈의 취지예요.” 호주관광청 한국사무소 권은정 과장의 말이다. “저희도 이렇게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 처음이에요.” 그가 이어 말했다.

처음으로 기획하는 행사인데, 시드니도 아니고 멜버른도 아닌 바로사 밸리인 이유는 뭘까? 와인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바로사 밸리는 전 세계 모든 와인 교과서에 등장하는 호주 와인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호주에서 가장 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주는 남호주고, 남호주의 주도는 애들레이드죠. 시드니나 멜버른에 비하면 그 크기나 인구는 한참 작지만, 애들레이드의 미식은 상대적으로 매우 발달해 있어요.” 여기까지는 남호주의 국제 홍보팀장 던컨 프레이저의 말이다. “게다가 호주 와인의 캐피털이라고 하면 애들레이드에서 차로 1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바로사 밸리고요.” 그리고 이것은 바로사 밸리를 홍보하는 바로사 오스트레일리아의 매니저인 루비 스토바르트의 말이다.


선주민들이 손님을 반기는 춤을 추는 모습.

선주민들이 손님을 반기는 춤을 추는 모습.

남호주 쉬라즈의 다면

그런데 어쩌다 바로사 밸리는 호주 와인의 수도가 되었을까? 세상에는 축복받은 땅들이 있다. 남위 34도로 호주 대륙 중에서도 남호주의 서쪽에 위치한 바로사 밸리는 여름이면 아열대 고기압이 내려와 이 지역을 덮는다. 고기압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비가 내릴 수가 없다. 여름 낮에는 거의 40도에 육박할 정도로 기온이 올라가지만, 해가 지면 남호주 대륙 서쪽에 흐르는 남빙양의 차가운 해류의 영향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이닥친다. 한여름에도 가끔 계곡 밑면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릴 만큼 아침 기온이 서늘하다. 낮에는 포도가 햇빛을 흡수해 익어가며 당도와 미네랄을 응축하고, 밤에는 차가운 바람 덕분에 포도가 식으면서 산도를 유지한다. 당도와, 산도도 높고, 온갖 폴리페놀이 응축된 포도들을 재배할 수 있는 땅, 전 세계에 그리 많지 않은 '뜨거운 지중해성 기후'로 빚어낸 쉬라즈(Shiraz)의 고향이 바로 바로사 밸리다.

바로사 밸리의 쉬라즈를 처음 입에 머금는 순간, 깊은 자줏빛 혹은 잉크처럼 불투명한 검보랏빛 색조가 우리의 감각을 지배한다. 레드 와인을 맛볼 때 가장 크게 와인의 특성을 구분하는 방식은 지배적인 과실의 색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서늘한 기후에서 자란 피노 누아나 가메를 입안에 머금으면 체리와 스트로베리, 가끔은 더욱 신선한 라즈베리와 크랜베리의 붉은 과실들을 떠올린다. 한편 좀 더 뜨거운 기후에서 익은 포도로 만든 레드 와인들은 블랙베리, 과숙한 체리, 블랙 커런트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사 밸리의 쉬라즈는 단순히 검고 거대하고 단단하지만은 않다. 앞서 설명했듯 서늘한 밤에 소중하게 지킨 산미들이 이 강건한 몸집을 우아하게 조각한다. 특히 붉은 점토와 라임스톤을 비롯한 수십 가지의 토양이 켜켜이 쌓인 이 테루아에서 자란 쉬라즈는 다양한 폴리페놀들의 개성을 머금고 그 우아함을 뽐낸다.

‘그데이 스토리즈’ 행사에 앞서 다른 기자들은 캥거루 아일랜드와 울루루(Uluru)에서 자연을 만끽하고 돌아오거나 멜버른과 시드니의 도심을 즐겼다. 그러나 나는 와인에 집중했다. 애들레이드에 머물며 남호주의 와인들을 맛봤다. 내가 선택한 '그데이 스토리즈'의 주제는 남호주 와인 이야기였으니까. 남호주 쉬라즈의 기준을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펜폴즈를 방문하는 것이다. 1844년 애들레이드시 안에 설립된 호주 와인의 심장인 '펜폴즈'의 철학은 남호주를 아우르는 '멀티 빈야드 블렌딩'이다. 그 정점에 ‘그랑주’(Grange)가 있다. 바로사 밸리를 중심으로 남호주 각지의 밭에서 수확한 최상급 쉬라즈를 블렌딩해 만드는 이 와인은, 수석 와인메이커 맥스 슈버트가 1951년 처음 양조한 이래 호주 최초의 '컬트 와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짙고 응축된 과실미에 아메리칸 오크가 더하는 바닐라와 초콜릿의 레이어, 특유의 페퍼리한 질감, 그리고 수십 년을 버티는 단단한 구조는 세계 어떤 쉬라즈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와이너리인 펜폴즈의 매길 에스테이트에서 그랑주를 비롯한 펜폴즈의 대표 와인들을 시음하는 것은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건 마치 남호주라는 와인 생산지 전체의 상향 평준화된 평균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사 밸리 북동쪽 라이트 패스(Light Pass)에 위치한 톰풀러리(Tomfoolery) 와이너리와 마라낭가 서쪽 능선에 위치한 미러스 빈야드의 쉬라즈를 비교하며 특이성을 감지하는 시음 역시 큰 즐거움이었다. 풀보디임에도 산도가 살아 있어 무겁지 않고 우아한 톰풀러리의 쉬라즈는, 부드럽고 매끈한 타닌으로 긴 여운을 남긴다. 또한 최소한의 개입을 원칙으로 하는 양조 철학 덕분에 과실미가 전면에 드러난다. 반면 아이언스톤과 편암, 모래 토양이 블록마다 다르게 분포하는 80에이커의 부지에서, 관개를 전혀 하지 않은 드라이 파밍으로 자란 미러스 빈야드의 싱글 블록(그렇다. 빈야드가 아닌 블록이다.) 올드바인 쉬라즈들은 블록 하나하나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아낸다. 남호주 와인계의 큰손인 '펜폴즈'의 수석 포도 재배자 출신인 롭 깁슨이 세운 깁슨 와인즈는 두 가지 색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지질학자였던 롭 깁슨의 별명인 '더트 맨'에서 딴 더 더트맨 바로사 쉬라즈(The Dirtman Barossa Shiraz)는 바로사 지역에서 수확한 포도에 소량의 에덴 밸리 쉬라즈를 섞어 만든다. 이 와인은 응축된 블랙커런트와 블루베리 위로 다크 초콜릿과 모카, 아니스의 레이어가 아름답게 드러난다. 직관적으로 ‘맛있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이 와인은 ‘깁슨 에덴 밸리 쉬라즈’와 대비를 이룬다. 후자는 마치 프랑스의 시라(Syrah)와도 비슷한 특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방금 ‘시라’라고 쓴 것은 오타가 아니다. 같은 포도 품종을 두고 프랑스에선 시라(Syrah)라 쓰고 호주에선 쉬라즈(Shiraz)라 쓴다. 프랑스 론 밸리 북부, 에르미타주와 코트 로티에서 수백 년간 재배되며 절제되고 후추 향 강한 스타일로 발전한 시라는 19세기 호주에 수출되어 바로사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화했다. 프랑스 시라가 서늘한 기후에서 날렵한 산도와 소금과도 같은 감칠맛 넘치는 미네랄리티를 키우는 방향으로 발전한 반면, 호주 쉬라즈는 농익은 블랙베리와 자두, 다크 초콜릿을 품은 풍요로운 팔레트로 세계 시장을 사로잡았다. 같은 씨앗, 다른 땅이 만든 두 개의 언어는 품종의 표기이면서 또한 양조 스타일의 철학을 일별하는 분류다.


에스테이트 빈야드의 중식에 아름다운 공원과 거대한 아트 피스들이 곳곳 자리하고 있는 버드 인 핸드 와이너리는 하나의 거대한 비티컬처 콤플렉스다.

에스테이트 빈야드의 중식에 아름다운 공원과 거대한 아트 피스들이 곳곳 자리하고 있는 버드 인 핸드 와이너리는 하나의 거대한 비티컬처 콤플렉스다.

쉬라즈 너머의 세계

즉 에덴 밸리(Eden Valley)에서 경작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 '시라' 스타일이라는 얘기는 해당 산지가 그만큼 서늘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깁슨 와인즈의 포도밭에서 에덴 밸리를 바라보면 이제 무슨 뜻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저기 멀리 기다란 산맥부터가 바로 에덴 밸리예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인 바로사 밸리의 바닥이 해발 150m 정도인 반면에 에덴 밸리가 시작되는 곳은 550미터 정도 되지요. 특히 동향이거나 남향인 경우엔 북반구의 서향이나 북향처럼 더욱 서늘해요.” 깁슨 와인즈의 셀러 도어에서 우리를 안내한 샘 카트라이트가 말했다. “바로사 밸리가 아닌 에덴 밸리를 포함하는 ‘바로사 존’의 대표 품종을 꼽자면, 레드로는 쉬라즈, 화이트로는 리슬링이에요. 리슬링은 유럽에선 북방 재배한계선(와인을 재배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위도 지역)인 독일이나 알자스에서 재배하는 품종이고, 쉬라즈는 프랑스에서 가장 더운 남쪽 지역인 론 밸리의 레드 와인을 대표하는 품종이죠. 바로사 존은 이 두 품종이 모두 도미넌트하게 재배될 만큼 다양한 메조클라이밋(mesoclimate, 중기후)을 지녔어요.” 톰풀러리의 와인메이커 벤 치프먼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범위를 바로사 밸리에서 애들레이드 권역으로 넓히면 남호주 와인의 다양성은 상상을 넘어서는 범위로 증가한다. 애들레이드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30~40Km, 해발 400~700m의 마운트 로프티 산맥 서사면에 형성된 애들레이드 힐스는 남호주 와인 산지 중 가장 서늘한 곳이다. 세인트 빈센트 만(Gulf of St. Vincent)에서 밀려오는 해풍과 산지 특유의 야간 냉기가 합쳐져 포도의 성장 기간이 길다. 이렇게 느리게 익는 현상(slow ripening)이 바로 애들레이드 힐스 와인의 정수다. 긴 성장 기간 동안 서늘한 기후에서 포도 알갱이는 안에 산도를 충분히 보존하면서도 향기 성분을 축적한다. 이런 포도에서는 생동감 넘치는 산미, 초록 허브들의 뉘앙스, 길고 섬세한 피니시를 지닌 와인들이 탄생한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버드 인 핸드’의 네스트 에그 샤르도네를 마셔보는 게 가장 빠르다. 1997년 설립된 이 패밀리 와이너리가 애들레이드 힐스 우드사이드(Woodside)에 있는 80에이커의 직접 경작 농지에서 생산한 샤르도네만으로 양조한 이 와인은 오크의 영향에 의한 2차 향이 최대한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20개월이라는 긴 숙성 기간을 통해 복합도를 충분히 끌어올렸다. 레몬보다는 자몽이 떠오르는 부드러운 시트러스 향, 허니서클, 라벤더 등의 꽃향, 딜과 로즈메리 등의 다채로운 허브 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과실미가 강렬하지만 끝에 아주 살짝 올라오는 스파이스와 함께 어우러지며 생동감 있는 여운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앤드루와 수지 누젠트(Andrew & Susie Nugent) 부부가 일군 이 와이너리는 포도밭과 양조장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형태가 아니다. 셀러 도어(시음 공간),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LVN’, 고급 숙박시설 ‘O 쿼터스’를 2024년 남호주 올해의 정원(Garden of the Year)으로 선정된 에스테이트 가든이 감싸고, 이 가든을 거대한 포도밭이 또다시 둘러싸고 있는 형태다. 예술 작품들이 포도밭 곳곳에 설치된 이 공간은 와이너리가 아니라 하나의 ‘비티컬처 콤플렉스’에 가깝다.

래리 제이콥스(Larry Jacobs)와 마크 돕슨(Marc Dobson)이 2002년에 와이너리를 인수한 한도르프 힐 와이너리에 다다르면 우리가 몰랐던 호주 와인의 다양성은 특이점을 넘어선다. '한도르프'라는 옛 독일인 정착지 인근에 위치한 이 와이너리는 오스트리아 품종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다. 그뤼너 펠트리너(Grüner Veltliner) 묘목을 겨우 들여와 2010년 남호주 최초의 그뤼너 펠트리너 생산자에 이름을 올린 데 이어 오스트리아의 대표 레드 품종인 블라우프렌키슈(Blaufränkisch), 츠바이겔트(Zweigelt)를 도입했다. 특히 2015년에는 오스트리아에서도 희귀한 품종인 생로랑(St. Laurent)을 식재했다.


데비에이션 로드의 와인 메이커 케이트 로리가 자신의 플래그십 샴페인 로피타의 레이트 디스고지드를 잔에 따르고 있다.

데비에이션 로드의 와인 메이커 케이트 로리가 자신의 플래그십 샴페인 로피타의 레이트 디스고지드를 잔에 따르고 있다.

남호주 스파클링의 재발견

이번 와인 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확은 호주 스파클링의 재발견이다. 호주관광청의 초대를 받고 애들레이드 공항에 처음 도착한 날 내 이름이 담긴 푯말을 들고 있던 기사는 나를 ‘세쿼이아 로지’에 데려다 주고 떠나며 '부럽다'는 말을 남겼다. 바다에 면한 거대한 평지에 세워진 애들레이드시의 동쪽에는 거대한 산맥이 시작되는데, 그 시작점인 ‘마운트 로프티’의 정상에 있는 5성급 호텔이 세쿼이아 로지다. 세쿼이아 로지는 숙박자들에게 웰컴 드링크와 컴플리멘터리 주류로 ‘세쿼이아’라는 동명의 스파클링 와인을 제공하는데, 이 와인을 마시고 나는 기분 좋은 충격에 빠졌다. 샴페인이 가진 거의 모든 복합미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사해보니 애들레이드 힐스에서 가장 높은 해발 650m 고도에 위치한 포도밭에서 재배한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로 만든 이 와인은 효모 찌꺼기와 함께 병에서 샴페인 전통 방식으로 2년을 숙성했다.

“샴페인 전통 방식을 쓰는 호주 와인이 정말 많은데, 특히 장기 숙성을 거친 ‘레이트 디스고지드’ 와인들은 세계적인 브랜드의 샴페인에 퀄리티 면에서 절대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해요.” 남호주관광청의 국제 미디어 팀장인 던컨 프레이저가 말했다. 레이트 디스고지드란 샴페인의 효모 찌꺼기(lees)를 아주 늦게 빼낸 뒤 출시된 장기 숙성 와인들을 말한다. 이렇게 긴 시간을 효모 찌꺼기를 품은 채 숙성하면 효모의 잔여물들이 와인에 녹아들고, 병 안의 이산화탄소들은 더 촘촘한 방울로 액체 속에 스며든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인 와인들은 잔에 따르는 순간 그 정체를 드러낸다. 갓 구운 브리오슈, 버터 바른 토스트, 헤이즐넛 향이 사과나 레몬 같은 과실의 풍미와 함께 번지고, 한번 부푼 거품이 가라앉으면 아주 자잘한 기포들이 오랜 시간 천천히 가늘게 올라온다.

‘데비에이션 로드’는 남호주 스파클링의 정점에 서 있다. 스콧 크릭 로드(Scott Creek Road) 207번지, 해발 고도가 높은 롱우드(Longwood)의 셀러 도어에서 와인메이커인 케이트 로리(Kate Laurie)를 만난다면, 당신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재간이 없다. 19세에 프랑스 샴페인 지방으로 건너가 그곳의 리세 비티콜 다비즈(Lycée Viticole d’Avize)에서 양조학을 공부한 그녀는 5대째 포도를 재배 중인 ‘포도 수저’ 해미시 로리와 결혼하며 세기의 마리아주를 이뤘다. 이들이 만드는 벨타나 블랑 드 블랑(Beltana Blanc de Blancs) 레이트 디스고지는 이 와이너리의 정점이다. 2015 빈티지로 양조하고 2024년 10월 데고르주망한 이 와인은 특별한 해에만 출시된다. 데비에이션 로드의 양조장을 찾은 날 케이트와 해미시는 나를 트럭에 태우더니 샤르도네를 기르기 위해 정비 중인 가장 꼭대기에 있는 포도밭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피크닉 바스켓에서 와인잔을 꺼내고 벨타나 블랑 드 블랑을 열었다. 9년의 효모 접촉 숙성이 만들어낸 토스티한 풍성함과 부싯돌 같은 미네랄리티, 만개하는 시트러스의 섬세한 향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호주 최고의 스파클링 와인 중 하나’라는 평가는 코와 혀로 직접 검증해 본 결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호주 와인의 다양성을 내 몸으로 확인한 순간이기도 하다. 한때 바로사 밸리는 쉬라즈의 동의어였고, 애들레이드 힐스는 소비뇽 블랑의 본고장으로 단순화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 이 두 지역의 가장 흥미로운 생산자들은 그 고정된 틀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

Credit

  • PHOTO 호주관광청/버드인핸드와이너리/데비에이션로드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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