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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요구한 가치와 미감에 응답해 온, 까르띠에의 궤적

장인정신과 기술, 시대와 예술이 교차하며 형성된 까르띠에의 역사는 근대적 미감의 형성과 변화를 기록한 문화사적 서사다.

프로필 by 윤웅희 2026.03.26
Jean Larivière pour Egoïste © Cartier

Jean Larivière pour Egoïste © Cartier

까르띠에의 역사를 시대의 흐름 속에서 통시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단순한 브랜드 연대기를 넘어선다. 그것은 근대 이후 주얼리와 시계가 사회적 구조, 기술혁신, 예술 사조, 그리고 정체성이 어떻게 교차하며 변화해 왔는지를 추적하는 하나의 문화사적 탐구에 가깝다. 까르띠에의 유산은 특정 스타일이나 아이콘의 집합이 아니라 각 시대가 요구한 가치와 미감에 응답해 온 축적의 기록이며, 그 궤적은 곧 근대 이후 장식 문화의 변천사와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7세가 1904년 3월 10일 까르띠에에 수여한 왕실 납품 허가증. Cartier Archives Londres © Cartier

에드워드 7세가 1904년 3월 10일 까르띠에에 수여한 왕실 납품 허가증. Cartier Archives Londres © Cartier

차르 니콜라스 2세가 1907년 4월 23일에 까르띠에게 수여한 왕실 납품 허가증. Cartier Archives © Cartier

차르 니콜라스 2세가 1907년 4월 23일에 까르띠에게 수여한 왕실 납품 허가증. Cartier Archives © Cartier

1847년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Louis-François Cartier)는 스승 아돌프 피카르(Adolphe Picard)에게서 몽토르게이 29번지의 매장을 인수하며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아틀리에를 설립했다. 그는 하트와 마름모꼴 안에 이니셜 L과 C를 조합한 장인 마크를 등록하고 상호를 ‘메종 까르띠에’로 변경함으로써 독자적인 브랜드를 구축해 나갔다. 바로 까르띠에 하우스의 탄생이자, 주얼리가 단순한 장신구에서 문화적 서사로 확장되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당시 제2제정기를 맞이한 파리는 화려한 궁정문화와 부르주아 계층의 부상으로 소비 미학이 빠르게 진화했고, 까르띠에는 이런 변화의 중심에서 귀금속 공예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의 욕망을 시각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나폴레옹 3세의 사촌인 마틸드 공주(Princess Mathilde)와의 인연을 비롯, 왕실 및 귀족 사회와 형성한 관계망은 까르띠에가 ‘왕들의 보석상’이라는 명성을 얻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아카이브에 남아 있는 초기 주문서와 디자인 스케치는 까르띠에가 일찍부터 정치적 행사, 혼인, 외교적 제스처와 긴밀히 얽혀 있었음을 보여주며, 미적 권위를 공인받았음을 시사한다.

19세기 말로 접어들며 가업은 2세대와 3세대로 이어지고, 까르띠에는 본격적으로 해외시장 진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899년 파리 뤼 드 라 뻬 13번지(13 Rue de la Paix)에 문을 연 매장은 작은 공방을 넘어 럭셔리 하우스로 도약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루이 조제프(Louis Joseph), 피에르 카미유(Pierre Camille), 쟈크 테오뒬(Jacques Théodule) 까르띠에 삼형제는 각각 파리, 런던,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지역별 미적 취향을 섬세하게 반영했고, 이는 까르띠에가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시기부터 까르띠에는 단일한 스타일을 고수하기보다 문화적 차이를 조율하는 감각을 브랜드의 핵심 역량으로 삼았다.

20세기 초, 까르띠에는 명실상부 왕실 보석상으로 위상을 굳힌다. 1902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을 위한 티아라 제작은 영국 왕실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고, “왕의 보석상, 보석상의 왕(Jeweller to Kings, King of Jewellers)”이라는 찬사는 당시의 위상을 상징하는 문구로 남았다. 이 무렵 하이 주얼리 분야에서는 플래티넘의 도입이 중요한 전화점이 됐다. 강도와 유연성을 모두 갖춘 플래티넘은 미세한 세공과 정교한 다이아몬드 세팅을 가능하게 했고, 까르띠에는 이를 통해 빛을 구조적으로 설계하는 ‘빛의 건축’이라는 새로운 미학을 구현했다. 이때부터 주얼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공간감을 지닌 조형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편 워치메이킹 분야에서도 혁신이 이어졌다. 바로 세계 최초의 현대식 손목시계인 산토스(Santos)의 탄생이다. 1904년 제작된 산토스는 시간의 사용 방식과 신체의 움직임을 재해석한 결과물이었다. 비행사 알베르토 산토스-뒤몽(Alberto Santos-Dumont)의 요청으로 탄생한 이 시계는 회중시계 중심의 문화를 손목시계 시대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기능성과 우아함이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사각 케이스와 노출된 스크루 장식은 산업화 시대의 기계적 미학을 반영하면서도 세련된 이미지를 유지했고, 이후 산토스는 다양한 베리에이션을 거쳐 까르띠에 시계 디자인의 핵심 축으로 정착했다. 1917년 선보인 탱크(Tank) 시계 역시 또 하나의 전환점이다. 전차의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직선 형태는 장식을 절제해 구조적 균형을 강조했는데 이후 탱크 루이, 탱크 아메리칸, 탱크 프랑세즈 등 시대적 감수성을 반영한 다양한 모델로 변주되기도 했다. 덕분에 탱크는 금새 예술가와 정치인, 영화배우들에게 선택받으며 까르띠에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까르띠에는 이 과정에서 시계를 단순한 시간 측정 도구가 아닌 개인의 미적 취향을 드러내는 오브제로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1922년 촬영된 까르띠에 가의 형제들. Cartier Archives © Cartier

1922년 촬영된 까르띠에 가의 형제들. Cartier Archives © Cartier

1912년에서 1913년 사이의 파리 뤼 드 라 뻬 13번지 까르띠에 부티크. Archives Cartier Paris, André Taponier © Cartier

1912년에서 1913년 사이의 파리 뤼 드 라 뻬 13번지 까르띠에 부티크. Archives Cartier Paris, André Taponier © Cartier

1920~1930년대는 까르띠에가 아르데코풍 작품과 함께 디자인 언어를 본격적으로 확장해 나간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1924년 루이 까르띠에는 자신의 친구이자 시인인 장 콕토(Jean Cocteau)를 위해 세 개의 밴드가 얽힌 링을 제작했는데, 이는 훗날 트리니티(Trinity) 링으로 알려지며 사랑과 우정, 충실함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서로 다른 색의 골드가 맞물려 회전하는 구조는 관계성과 시간의 지속성을 은유하며, 하나의 철학적 오브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쟈크 까르띠에가 인도에서 받은 영감으로 1925년 탄생한 뚜띠 프루티(Tutti Frutti) 하이 주얼리는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의 강렬한 색채와 유기적인 형태를 통해 동서양 미감의 융합을 보여주었다. 이는 식민주의 시대 문화 교류의 복합적 양상과 긴장감을 내포한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1928년 파티알라 마하라자 부펜드라 싱(Bhupinder Singh) 대규모 주문 역시 유럽 외 지역의 미적 요소가 까르띠에의 디자인 언어 속으로 녹아드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1933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쟌느 투상(Jeanne Toussaint)이 합류하면서 까르띠에는 또 한 번의 전환을 맞는다. 그녀는 기하학적 구조 중심의 디자인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동물과 식물 모티브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특히 팬더(Panthère)를 브랜드의 상징으로 발전시켰다. 점 무늬 패턴에서 출발한 팬더는 점차 입체적 조형으로 진화하며 브로치와 시계, 링으로 확장됐고, 여성성과 권력, 우아함을 동시에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확립됐다. 팬더는 까르띠에가 구축한 상징 체계의 핵심 요소이자, 브랜드 스토리텔링 전략을 대표하는 사례로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구조가 변화하면서 주얼리가 지니는 의미는 점차 개인적인 표현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1969년 탄생한 LOVE 브레이슬릿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컬렉션이다. 나사로 고정하는 구조를 통해 착용자가 쉽게 벗을 수 없도록 설계된 이 팔찌는 사랑과 헌신이라는 개념을 물리적 형태로 구현하며, 주얼리가 감정적 서사를 담는 오브제로 변화했음을 드러낸다. 한편 이듬해 1970년대 등장한 저스트 앵 끌루(Juste un Clou)는 못이라는 일상의 사물을 럭셔리 주얼리로 재해석한 작품. 산업사회의 오브제를 미학적 대상으로 전환한 저스트 앵 끌루는 포스트모던 디자인 특유의 전복적인 감각을 담고 있다. 한편 이 시기 까르띠에는 시계 제작에서도 전문성을 본격적으로 강화해 나갔다. 1977년 버메일 케이스를 적용한 머스트 드 까르띠에(Must de Cartier) 워치를 선보이며 보다 대중적인 접근을 시도했고, 이후 1983년 팬더 드 까르띠에(Panthère de Cartier) 워치, 1985년 파샤 드 까르띠에(Pasha de Cartier) 워치를 연이어 출시하며 디자인과 기술의 균형을 보여주었다. 유연한 브레이슬릿 구조, 방수 크라운 보호 장치, 대담한 다이얼 구성 등 각 모델의 차별화된 요소는 워치메이킹 분야에서 까르띠에가 지닌 독창성을 분명히 각인시켰다.

오늘날 까르띠에는 과거의 아이콘을 재해석하며 아카이브를 창작의 핵심 원천으로 활용하고 있다. 산토스, 탱크, 트리니티, 팬더, LOVE 컬렉션은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통해 브랜드의 연속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메종이 스스로의 역사를 문화적 자산으로 전환해 온 방식을 보여준다. 까르띠에의 발전사는 장인정신과 기술혁신, 문화적 교류와 전략적 브랜딩이 교차한 결과물이며, 그 궤적은 럭셔리 산업이 어떤 서사와 가치를 통해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결국 까르띠에를 되짚는 일은 과거의 영광을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는 해석이자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어떻게 그려나갈지에 대한 비전에 가깝다.

두 개의 팬더가 보석을 받들고 있는 디자인의 반지. Archives Cartier Paris © Cartier

두 개의 팬더가 보석을 받들고 있는 디자인의 반지. Archives Cartier Paris © Cartier

까르띠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쟌느 투상. Cecil Beaton Archive © Condé Nast

까르띠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쟌느 투상. Cecil Beaton Archive © Condé Nast


Credit

  • EDITOR 윤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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