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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 걸려 있는 거대한 향수 광고의 정체에 대해 작가 신와이킨과 나눈 이야기

젠더 플루이드한 작가 신와이킨은 모든 것이 흔들리며 진실한 자아란 어쩌면 오래 된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프로필 by 박세회 2026.04.06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모퉁이를 돌아 정독 도서관 쪽으로 걷다보면, 거대한 현수막에 대형 향수 광고가 걸려 있다. '진정한 당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그럴싸한 카피와 그럴싸한 향수병이 등장하는 이 광고는 토론토 출신으로 런던에서 활동 중인 작가 '신 와이 킨(Sin Wai Kin)의 미술 작품이다. 홍콩 출신 아버지와 영국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인종과 국적, 젠더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자란 그는 퍼포먼스와 영상, 설치를 넘나들며 진정성과 정체성, 서사와 실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격렬하게 교차하는 지점들을 탐구한다. 지금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한국 최초의 대규모 퀴어 미술 기관 전시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로 한국을 찾은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신 와이 킨 '에센스(6시트)'. 폴리에스터 배너에 디지털 프린트, 750 x 500 cm. PHOTO 남서원, 아트선재센터 제공.

신 와이 킨 '에센스(6시트)'. 폴리에스터 배너에 디지털 프린트, 750 x 500 cm. PHOTO 남서원, 아트선재센터 제공.

토론토라는 도시는 제겐 낯선 곳이에요. 그 도시에 대해선 그다지 손에 잡히는 이미지가 없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유독 많은 디아스포라 예술가들이 그 도시 출신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토론토는 굉장히 다문화적인 도시예요. 정말 많은 문화들이 섞여 있죠. 제 아버지는 홍콩에서 캐나다로 이민했고, 어머니는 런던에서 왔죠. 두 분이 그곳에서 만났고요. 그리고 저는 지금 런던에 살고 있지요. 이렇게 계속 이동하고 이주하는 패턴이 저라는 사람을 만들어온 것 같아요. 예술가로서의 시각도 그 안에서 형성됐고요. 런던에서 산 지 이제 17년이 됐으니 성인으로서의 삶은 사실상 런던에 있지만, 토론토에서 자란 기억은 여전히 굉장히 중요한 토대예요.

광둥어 오페라, 경극, 케이팝까지 참조하면서도 작업의 뿌리를 런던 드래그 씬에서 찾는다고 하셨는데, 캐나다와 홍콩, 런던이 각각 정체성 탐구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가족의 이주 역사 때문에 저는 정말 다양한 곳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어요. 어디 출신 예술가냐는 질문에 한마디로 답하기가 어려워요. 제 작업은 많은 것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경험에서 나오거든요. 젠더 사이, 국적 사이, 인종 사이. 어디를 가도 약간은 아웃사이더인 느낌이 있는데, 그게 오히려 세상을 바깥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시각을 갖게 했다고 생각해요.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재한 교포2세들을 보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아요. 밖에 있을 땐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느끼다가, 막상 한국에 오면 낯선 언어 때문에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말을 듣곤 하지요. 작가님은 그런 혼란을 경험하신 적 있나요?

혼란은 있었죠. 근데 돌이켜보면 그 혼란은 제 안에서 온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보는 방식에서 왔던 것 같아요. 사람들은 항상 저를 어떤 카테고리 안에 넣으려 했거든요. 지금은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아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걸 느끼는데, 이제는 그건 제가 짊어질 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신 와이 킨, '에센스'(필름 스틸), 2024, HD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작가

신 와이 킨, '에센스'(필름 스틸), 2024, HD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작가

어쩌면 민족이나 국가 정체성의 탐구가 젠더 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굉장히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종과 국적의 경계 사이에 있었던 경험이 젠더를 탐구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줬나요?

네, 맞아요. 혼혈로 자란 경험이 젠더를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줬어요. 어릴 때는 나는 무엇인가, 내 정체성의 진실은 무엇인가를 계속 찾으려 했는데, 결국 깨달은 건, 그런 진실은 없다는 거예요. 젠더도 마찬가지고요. 사실 모든 이분법이 그렇죠. 인간은 늘 무언가를 범주로 나누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항상 그 사이 어딘가에 있고,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어요. 저에게 혼란을 해소한다는 건 범주 사이에 존재하는 것, 그리고 변화와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해지는 일이었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유일한 진실이에요.

작업을 보면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작업 속 캐릭터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요?

처음에는 캐릭터가 하나였어요. 오랫동안 그 하나만 가지고 작업했고요. 점점 캐릭터가 늘어나면서 깨달은 건, 중요한 게 캐릭터 자체가 아니라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라는 거였어요.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서로 다른 것을 대변하는 캐릭터들을 함께 놓았을 때 그들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시각이 흥미롭거든요. 사실 정체성이라는 것도 개인이 소유하는 무언가라고 우리는 배우지만, 저는 정체성이 관계라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아요. 정체성은 더더욱 그렇고요. 그리고 그 관계들은 항상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어요.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쪽을 향하는 아트선재센터의 한쪽 외벽에는 신와이킨의 작품 ‘에센스’ 시리즈가 거대한 현수막에 프린트되어 걸려 있어요. 향수 광고를 비튼 형태의 작품이지요. 또 내부 전시 공간에는 그 가상의 광고에 등장하는 향수병의 실제 모습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병 안에는 들어 있는 것은 물과 향수의 베이스가 되는 알코올일 뿐이죠. 모든 게 정말 재밌는 농담이에요.

작품을 제작 중인 작가 신 와이 킨의 모습. 작가 제공.

작품을 제작 중인 작가 신 와이 킨의 모습. 작가 제공.

맞아요, 에센셜리즘에 대한 농담이에요. 우리는 모든 정체성에 어떤 본질적이고 불변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도록 문화적으로 훈련받았잖아요. 광고, 종교, 심지어 과학적 서사들도 그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해요. 근데 사실 우리 본성에 본질적인 건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죠. ‘에센스’ 캠페인에서 저는 남성 향수 광고가 전형적으로 써온 영웅 서사의 트로프(trope)들을 그대로 가져왔어요. 말 타는 남자, 황야, 고독한 탐색.(광고 문구에는 “Your true self is awaits.”라고 쓰여 있다.) 그 남자가 찾아 헤매는 게 결국 ‘에센스’라는 향수인데, 그 병은 사실 비어 있지요. 광고를 광고하는 소품일 뿐인 거죠. 향수 광고는 특이하게도 실제로 향기가 어떤지를 전달할 수 없잖아요. 대신 그 제품을 쓰면, 당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이상적인 자아를 파는 거지요. 지금의 당신에게 결핍된 무언가, 그걸 채워주겠다는 약속.

정말 뛰어난 스토리 텔러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야기 자체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요. 이야기는 당신에게 도구인가요, 아니면 예술의 형식인가요?

‘스토리텔링’은 인간에게 정말 근본적인 행위예요. 언어가 생긴 이래로 계속 있어왔고, 몸과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도구이기도 하죠. 흥미롭게도 저는 요즘 기억력을 개선하려고 기억술을 공부하고 있는데, 많은 기억 기법들이 서사를 만드는 방식이에요. 연결고리를 만들어서 기억하는 거죠. 문자가 생기기 전에는 구전 이야기가 지식을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 안에서 신화와 서사가 형성됐어요. 가장 오래된 지식 생산과 전파의 매체인 셈이죠.

그리고 또 이야기는 조작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맞아요. 모든 서사는 어떤 의미에서 조작이기도 해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거죠. 저는 요즘 양자물리학의 어떤 개념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데, 물질적으로 객관적 현실이란 없다는 거예요. 입자조차도 우리가 규정하기 전까지는 정해진 성질이 없어요. 그러니까 객관적인 이야기란 존재할 수 없는 거죠. 어떤 서사가 지배적으로 굳어지면 그게 현실을 규정하게 돼요. 그래서 다양한 관점이 필요한 거고요.

작업을 하는 가장 깊은 욕망이 뭔가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

젠더를 바꾸는 경험이 사고방식 자체에도 영향을 줬나요?

네. 다른 젠더를 갖게 되면서 다른 시각을 갖게 됐어요. 젠더가 바뀌어서 생각이 바뀐 것이라기보다는, 제가 다르게 보이게 되면서 사람들이 저를 다르게 대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세상과의 관계가 달라졌어요. 관계가 달라지니 행동도 달라지고 사고도 달라지는 거예요.

신 와이 킨, '에센스(6시트)', 2024, 폴리에스터 배너에 디지털 프린트, 750 x 500cm.

신 와이 킨, '에센스(6시트)', 2024, 폴리에스터 배너에 디지털 프린트, 750 x 500cm.

케이팝을 참조하는 작업들이 있는데, 어떤 점이 끌렸나요?

케이팝은 매력적이고 몰입적이고 유혹적으로 만들어졌잖아요. 그 사실 자체가 흥미로워요. 정체성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보여주는 거의 완벽한 사례라고 생각해요. 저는 케이팝을 즐겨요. 퍼포먼스도, 음악도, 영상미도, 안무도 다 좋아하고요. 그런데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보는 건 그걸 만드는 구성 요소들이에요. 어떻게 이 완벽한 인간 상품이 만들어지는가. 사실 그 과정은 굉장히 폭력적이기도 하죠. 10대 초반에 들어가서 5년 뒤에 완성된 스타로 나오는 구조잖아요. (케이팝을) 즐기면서도 그 대상들이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졌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자의 ‘호접지몽’을 작업에서 자주 참조하신다고요.

나비 꿈은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것들의 완벽한 예시예요. 객관적 현실이나 절대적 진실은 없다는 것. 남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꾸는 게 현실인지, 나비가 남자가 된 꿈을 꾸는 게 현실인지, 어느 쪽이 진실인지 가늠할 수 없죠. 그리고 그 진실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고, 관점의 변화는 영구적이지 않아요. 지금 (당신이) 어디 서 있느냐에 따라 진실을 결정하는 거죠.

어쩌면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이면서 일관된 자아를 연기하며 사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일상이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매일 퍼포먼스를 하고 있어요.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제가 작업에서 계속 탐구하는 게 그거예요. 진정성은 어디서 시작하고 퍼포먼스는 어디서 끝나는가. 아니면 반대로 퍼포먼스가 언제 진정성이 되는가.

대부분이 그렇듯 스펙트럼 안에 있겠죠.

제 생각에 진정성이란 너무 많이 반복해서 연습한 나머지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는 걸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는 퍼포먼스예요. 모든 것은 스펙트럼이고, 퍼포먼스와 진정성의 이분법도 결국 거짓 이분법이에요. 물론 내일 당장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건 아니죠. 하지만 충분히 오래, 충분히 깊이 연습한다면 당신의 이야기는 달라지겠죠.

Credit

  • PHOTO courtesy of the artist and ART SON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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