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자신의 포기와 싸운다
배추 한 포기로 네 명의 주인공들에게 건네는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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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무싸는 오랜만에 매주 챙겨 본 드라마였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우면 황진만의 체념과 황동만의 허세, 변은아의 냉소와 고혜진의 침묵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글은 드라마 비평이라기보다, 오래 남은 장면들에 대한 뒤늦은 식사 대접에 가깝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황동만은 출장뷔페 일을 한다. 이상하게도 그 설정들이 낯설지 않았다. 나 역시 영화감독을 꿈꾸며 케이터링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자무싸의 인물들이 싸우는 무가치함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었던 황진만은 강원도에서 배추를 뽑고, 그 배추들을 주변 인물들에게 나눠준다. 누구는 김치를 담그고, 누구는 국을 끓이고, 누구는 팔아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트럭 가득했던 배추가 하나둘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단 한 포기만 남은 배추를 황진만이 챙겨간다. 그 마지막 배추 한 포기로 모자무싸의 인물들에게 요리해주면 어떨까.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싸우기 전에 밥부터 먹이기로 했다.
바깥잎 - 황진만
배추의 바깥잎은 가장 먼저 세상을 맞는다. 비를 맞고 흙에 스치고 벌레에게 갉아먹히며 자라다가, 수확의 순간이 오면 사람의 손에 가장 먼저 뜯겨 나간다. 겉이 거칠고 상처가 많다는 이유로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져 버려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황진만도 =그런 바깥잎을 닮아 있다. 시를 쓰던 그는 결국 생계를 위해 강원도의 배추밭으로 향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실패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시를 쓰던 손으로 배추를 뽑는다고 해서 사람이 갑자기 덜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집 한 권이 팔리는 동안, 그가 뽑은 배추는 이미 누군가의 저녁이 되어 식탁 위에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황진만에게는 가장 바깥의 잎을 건넨다. 가장 먼저 상처 입고 가장 먼저 버려지지만, 막상 불 위에 올리면 누구보다 진한 맛을 내는 잎. 그것을 잘게 썰어 반죽에 섞고 노릇하게 부쳐낸다. 바삭한 가장자리와 부드러운 속살이 함께 있는 배추전처럼, 황진만 역시 여전히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과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황진만식 배추전
배추 바깥잎 4장 (약 180g)
부침가루 120g
찬물 180ml
멸치액젓 1작은술
청양고추 1개
식용유 3큰술
소주 1병 (조리용 아님)
만드는 법
」배추는 1cm 폭으로 썬다.
부침가루 120g과 찬물 180ml를 섞는다.
멸치액젓 1작은술을 넣는다.
청양고추를 다진다.
배추를 넣고 가볍게 섞는다.
팬에 식용유를 넉넉히 두르고 노릇하게 굽는다.
소주를 따른다.
왜 시를 쓰게 되었는지 떠올린다.
한 잔 더 마신다.
중간잎 - 황동만
황동만은 늘 전쟁 중이다. 그는 세계대전의 총알 자국이 남아 있다는 군용 코트를 단벌신사처럼 입고 하루를 버틴다. 낡은 코트에는 시간의 흔적과 서사가 묻어 있지만,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 코트는 메이드 인 차이나였다. 황동만은 그 사실에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그가 원했던 것은 진짜 총알 자국이 아니라, 총알 자국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전쟁과 혁명, 예술과 낭만이 뒤섞인 거대한 영화를 꿈꾸지만 현실의 그는 출장뷔페 행사장을 오가며 음식을 나르고 접시를 치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이름이 남지만, 뷔페의 만두를 누가 쪘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뷔페에서 가장 빨리 사라지지만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음식. 사람들은 그의 안에 거대한 서사 하나쯤 품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정작 황동만을 움직이는 것은 영화보다 오래된 것들이다. 먹고 사는 일, 그리고 내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 그래서 황동만에게는 만두를 만들어주고 싶다. 배추 중간잎으로 만두를 빚는다. 한국 배추를 넣되 중국 향신료를 조금 섞는다. 황동만의 코트처럼 진짜와 가짜, 이상과 현실이 뒤섞인 맛이다. 배추의 단맛 사이로 산초의 향이 올라오고, 오향분의 이국적인 냄새가 뒤늦게 따라온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맛 같기도 하고 전혀 처음 먹는 맛 같기도 하다. 마치 황동만이 꿈꾸는 영화들처럼.
황동만식 산초 배추만두
배추 중간잎 150g
다진 돼지고기 80g
만두피 10장
대파 1대
마늘 2쪽
산초가루 1작은술
간장 1큰술
참기름 1큰술
만드는 법
」배추를 잘게 다져 소금에 절인다.
물기를 짠 뒤 돼지고기와 섞는다.
대파와 마늘을 넣고 산초가루로 향을 더한다.
만두피에 소를 넣어 천천히 빚는다.
빚는 동안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를 떠올린다.
세 번째 만두를 접을 즈음이면 거절한 투자자가 떠오르고,
일곱 번째 만두를 접을 즈음이면 밀린 월세가 떠오르며,
만두 열 개를 다 빚었다면 찜기에 넣고 10분 동안 익힌다.
김이 오르는 동안 영화는 잠시 잊는다. 영웅주의도 걷어낸다.
어차피 만두도 영화도 한 번에 완성되는 법은 없으니까.
속잎 - 변은아
변은아는 공동작가다. 분명 글을 쓰지만 이름은 없다. 가명을 쓰고, 다른 사람의 이름 뒤에 숨어 문장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 문장들로 성공하고 박수받는다. 그녀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지만 정작 이야기의 앞면에는 서지 못한다. 드라마 속 변은아의 대사 중에는 이상하게 오래 남는 말이 하나 있다. "모든 인간이 죽순에서 태어나. 아무도 원망할 꺼리가 없으면, 여기가 천국일 텐데. 이렇게 쉽게 천국을 만들 수 있는데. 왜 굳이 신은 인간을 인간한테서 태어나게 해서, 이 지옥을 만들었을까?” 대사를 곱씹을수록 그 말은 부모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자식이 되고, 누군가의 기대를 짊어지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는다. 인간은 혼자 태어나지 못하고, 그래서 끝내 혼자 살아갈 수도 없다. 배추도 마찬가지다. 바깥잎과 속잎, 심지가 서로를 감싸며 한 포기를 이룬다. 한 장의 잎만으로는 결코 배추가 될 수 없다. 인간 역시 가족과 기억, 애정과 원망이 켜켜이 쌓이며 지금의 모습이 된다. 하지만 변은아는 그 구조 바깥을 상상한다. 누구의 딸도 아니고, 누구의 부모도 아니고, 누구도 원망할 필요 없이 땅에서 홀로 솟아오르는 존재. 그녀가 말한 죽순은 어쩌면 자유가 아니라, 아무도 원망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 대한 상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장 부드러운 배추 속잎에는 죽순을 넣는다.
변은아식 죽순 배추말이
배추 속잎 6장
죽순 120g
두부 100g
표고버섯 2개
다시마 육수 600ml
만드는 법
」죽순을 채 썬다.
두부와 섞는다.
배추잎에 돌돌 말아 감싼다.
육수에 넣고 천천히 15분 동안 익힌다.
아삭거리는 죽순을 한 조각 먹어본다.
아직도 인간보다 죽순이 더 마음에 든다면 5분 더 끓인다.
심지 - 고혜진
배추를 한 장씩 뜯어내고 나면 마지막에는 심지만 남는다. 사람들은 보통 그 부분을 잘라내거나 버린다. 질기고 딱딱하고 손질하기 귀찮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 끓여본 사람은 안다. 배추의 단맛은 의외로 심지에서 가장 늦게 나온다는 것을. 고혜진 대표는 그런 심지를 닮아 있다. 그녀는 술집 아지트를 운영하며 수많은 영화인들을 먹여 살린다. 누군가의 시나리오가 막히면 밥상을 차려주고, 누군가의 영화가 망하면 말없이 술잔을 채워주며, 누군가의 마음이 무너지면 안주 한 접시를 더 내어준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늘 감독과 배우가 이야기되지만, 정작 그 뒤에서 사람들을 버티게 만든 식탁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그녀 자신은 대접받지 못한다. 심지처럼 늘 중심에 있었지만 정작 아무도 중심을 바라보지 않는다. 모두가 그녀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위로를 받아 가지만, 정작 고혜진이라는 사람의 허기와 외로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남편 박경세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새로운 여자 작가와 가까워지고, 고혜진은 그것을 모른 척 지켜본다. 용서도 이해도 아니다. 그저 시나리오가 잘 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녀는 감독의 아내도, 영화사 대표도 아니다. 누군가를 먹이고 돌보고 버티게 만드는 일을 오래 해온 나머지, 자신이 정말 필요한 사람인지 의심하게 된 한 사람일 뿐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남은 심지로는 국을 끓인다. 배추 심지는 오래 끓여야 맛이 난다. 처음에는 질기고 밍밍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천천히 단맛을 내고, 국물은 그 맛을 받아 점점 깊어진다. 사람도 비슷하다. 가장 단단한 사람은 가장 늦게 무너지고, 가장 늦게 무너지는 사람은 대개 가장 오래 다른 사람을 먹여 살려온 사람이다.
박경세 감독이 차려야 하는 배추 심지 들깨탕
배추 심지 200g
멸치다시마 육수 0.5L
들깨가루 3큰술
표고버섯 2개
대파 1대
국간장 1큰술
미안함 약간
반성은 취향껏
만드는 법
」배추 심지를 얇게 썬다.
육수에 넣고 약불에서 30분 동안 끓인다.
그동안 고혜진 대표가 차려준 밥상을 떠올린다.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다시 떠올린다.
들깨가루를 풀고 국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아직도 미안하지 않다면 10분 더 끓인다.
충분히 미안해졌을 때 불을 끈다.
박경세 감독이 직접 그릇에 담아 서빙한다.
고혜진 대표보다 먼저 수저를 들지 않는다.
마지막 배추
황진만이 남긴 마지막 배추 한 포기는 결국 네 사람에게 나누어졌다. 가장 먼저 상처 입는 바깥잎은 배추전이 되었고, 중간잎은 배추만두가 되었으며, 속잎은 죽순을 품은 배추말이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늦게 단맛을 내는 심지는 오래 끓인 배추 들깨탕이 되어 식탁 한가운데 놓였다. 사람들은 배추를 다듬을 때 가장 바깥의 잎을 떼어내고 가장 안쪽의 심지를 잘라낸다. 거칠고 상처 입은 부분은 버리고, 질기고 단단한 부분도 버린다. 하지만 배추는 원래 처음부터 끝까지 먹을 수 있는 채소다. 우리가 버린다고 생각했던 부분에도 저마다의 맛이 있고,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고 조금 더 오래 끓이면 의외의 순간에 가장 깊은 단맛을 내기도 한다. 모자무싸의 인물들도 그렇다. 시를 쓰다 배추를 뽑게 된 사람, 영화를 꿈꾸며 만두를 나르는 사람, 인간이 인간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 그리고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을 먹여 살리느라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한 사람. 그들은 모두 스스로를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때로는 이제 그만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한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끝내 무너지지 않고 자기 몫의 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의 얼굴이다. 그래서 황진만이 마지막까지 품에 안고 돌아간 배추 한 포기가 자꾸 생각난다. 누군가에게는 팔리지 못한 배추였을지 모르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늦게 남은 배추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한 포기는 결국 네 사람의 식사가 되었다. 어쩌면 사람도 그렇다.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이미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고 누군가의 식사가 되고 있는지 모른다. 모두가 자신의 포기와 싸운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포기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끝내 포기하지 못한 것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배추의 단맛이 가장 늦게 우러나듯.
Credit
- WRITER 류경진 jinjonjam
- PHOTO 각 캡션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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