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시스가 르망 24 내구 레이스를 완주하던 날의 기록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팀이 대한민국 모터스포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르망 24시에서 태극기를 단 차가 완주하는 모습을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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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에 참전하는 62대의 차가 메인 스트리트 위에 도열했다. 제네시스는 르망 24시를 위해 스페셜 리버리를 레이스카에 적용했다.
“너희들 정말 잘 싸웠어.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해.” 얼굴도 모르는 어느 남자가 대뜸 악수를 청하며 건넨 말이다. 페라리의 유니폼을 입고 있던 것과 영어 억양을 미루어 짐작해볼 때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온 듯했다. 그가 갑자기 내게 응원의 말을 전한 건 내가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팀(이하 제네시스)의 유니폼을 입고 제네시스의 패독 앞에 서 있던 몇 없는 동양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뜨거운 태양과 연거푸 들이켠 맥주 탓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는 이 말을 덧붙였다. “앞으론 제네시스를 지켜볼게.”
1등이 아니다. 포디엄에 오르지 못했다. 포인트 획득도 실패했다. 결승선을 통과한 14대 중 13위를 기록했으니 꼴찌를 겨우 면한 수준이다. 그러나 제네시스의 19번 레이스카가 체커기를 받는 순간 피트 스톱의 분위기는 우승 그 이상이었다. 루크 동커볼케 사장, 시릴 아비테불 제네시스 감독 그리고 ‘르망의 전설’인 재키 익스는 함께 고생한 팀원들과 연신 포옹을 나누며 기쁨을 만끽했다. 지난 6월 13일부터 14일까지 프랑스 르망의 라 사르트 서킷에서 열린 제94회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이하 르망 24)에서 벌어진 일이다.
‘고작’ 완주에 성공했을 뿐인데 이렇게 환호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르망 24가 얼마나 가혹하고 험난한 레이스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올해 개최 103년을 맞이한 르망 24는 13.6km의 서킷을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대회다. 한 팀당 2대의 차가 출전할 수 있으며 레이스카 1대당 3명의 드라이버가 돌아가며 운전대를 잡는다. 대회에 참가하는 차량의 성능과 경기 당일의 날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24시간 동안 5000km 정도 달리는 게 일반적이다. 5000km면 직선거리로 서울에서 호주나 이란까지 닿는 거리다.
오래 달린다고 해서 천천히 달리는 건 아니다. 르망 24의 레이스카 평균속도는 시속 200km가 넘는다. F1의 평균속도가 220km 수준인 걸 감안하면 결코 느린 편이 아니다. 심지어 ‘뮬산 스트레이트’라고 불리는 직선 주로에선 시속 350km의 최고 시속을 기록하기도 한다. 과거엔 뮬산 스트레이트에서 시속 400km를 돌파한 차도 있었지만, 1990년 국제자동차연맹(FIA)이 안전상의 이유로 직선 주로 중간에 2개의 코너를 설치하면서 최고 속도가 낮아졌다.
서킷도 변수가 많다. 르망 24는 비교적 단조로운 형태의 레이아웃이지만 상설 서킷과 일반 도로가 섞여 있어 노면 상태가 제각각이다. 대낮처럼 밝게 불을 켜놓는 상설 서킷과 달리 일반 도로를 활용한 구역에는 가로등조차 없다. 즉 드라이버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헤드램프에만 의지해 초당 80m를 달리는 셈이다. “이 정도면 거의 눈을 감고 달리는 수준이죠.” 스포티비 해설진이 르망 24의 야간 주행을 중계하며 남긴 말이다.
르망 24 완주를 어렵게 하는 요소는 하나 더 있다. 총 62대의 레이스카가 뒤엉켜 달린다는 점이다. 르망 24는 하이퍼카, LMP2, GT3라는 3개의 클래스로 나뉜다. 최상위 클래스인 하이퍼카 클래스에는 제네시스를 비롯해 페라리, BMW, 토요타 등 내로라하는 자동차 제조사가 참여하고 있다. 하이퍼카는 레이스카를 만드는 방식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한다. LMH와 LMDH다. LMH는 차의 하나부터 열까지 제조사가 전부 직접 만드는 것을 말하고, LMDH는 레이스카 전문 제작 업체에서 차체를 가져다가 엔진과 외부 패널만 제조사가 제작해 얹는다. 전자보다 후자를 택하는 게 비용과 시간을 단축하기에 유리하다. 제네시스는 LMDH를 선택했다.
LMP2는 하이퍼카와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같은 차체와 같은 엔진을 탑재한 차를 타고 달리는 ‘원메이크 레이싱’에 가깝다. 차의 성능이 아닌 드라이버 실력으로 순위가 판가름 난다는 뜻이다. 보통 LMP2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가 하이퍼카 클래스로 올라간다. 반면 GT3는 양산차를 기반으로 한다. 예를 들면, 포르쉐 911이나 BMW M4를 내구 레이스에 맞게 튜닝해 출전하는 식이다. 각 클래스별로 발휘하는 성능에 차이가 커서 상위 클래스 차량은 끊임없이 하위 클래스를 추월하며 달린다. 문제는 검증된 드라이버만 출전하는 하이퍼카 클래스와 달리 하위 클래스에는 르망 24에 처음 출전하는 루키나 아마추어 드라이버가 많다는 점이다. 페이스가 느린 차는 페이스가 빠른 차에게 길을 양보해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야간에 집중력이 흐려져 잘못 비켜줄 경우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팀마다 엔진 소리와 배기음이 달라요. 특히 애스턴 마틴은 눈을 감고 들어도 알 정도로 독특하더라고요” 르망 24 출장에 함께한 어느 일간지 기자의 말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하이퍼카는 팀마다 서로 다른 엔진을 사용하므로 차가 달릴 때 내는 소리도 각양각색이다. 애스턴 마틴은 자연흡기 V12 엔진을 탑재해 고 RPM에서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고, 캐딜락의 5.5L V8 엔진은 아메리칸 머슬카가 떠오르게 하는 중후한 소리를 낸다. 제네시스는 현대자동차가 월드 랠리 챔피언십(WRC)에서 사용했던 4기통 엔진 2개를 연결해 만든 ‘G8MR 3.2L V8 터보 엔진’을 사용한다. 상대적으로 배기량은 작지만 WRC에서 10년 넘게 사용하며 성능이 검증된 엔진이다.
모터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거렸을 가능성이 높다. 팀마다 서로 다른 제조사의 엔진을 사용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배기량마저 제각각이라면 공정한 경쟁이 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FIA는 ‘BoP’(Balance of Performance)를 차마다 다르게 적용해 성능 격차를 조절한다. Bop는 팀마다 다르게 적용되는데 올해부터는 관련 정보가 비공개로 바뀌어서 팀이 어떤 조정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성능을 조절하는 방식은 다양해서, 엔진 출력을 제한하거나 무게를 강제로 늘리거나 지상고를 높이는 식이다. Bop는 레이스 위크가 시작되기 전 확정된다.
다시 서킷으로 돌아와서, 제네시스는 르망 24 본 경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월드 인듀어런스 챔피언십(WEC)은 르망을 비롯해 전 세계 8개 서킷을 순회하며 경기를 치른 후 포인트를 합산해 시즌 챔피언을 결정한다. 그런데 지난 5월 벨기에 스파프랑코샹 서킷에서 열린 6시간 내구 레이스에서 제네시스가 8위를 기록하며 4포인트를 획득한 것이다. 첫 출전한 신생팀이 완주도 모자라 포인트까지 획득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게다가 제네시스는 르망에서 15분간 달려 랩타임 순위로 출발 순서를 정하는 ‘하이퍼폴’에서도 19번 차량은 6위, 17번 차량은 9위를 기록했다. 비록 15분짜리 레이스지만, 제네시스의 차량 두 대 모두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는 토요타와 페라리보다 순위가 높았다. “이러다 진짜 제네시스가 르망에서 사고 한번 거하게 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이 기자들 사이에서 돌 정도였다.
하지만 르망 24는 녹록지 않았다. 약 16시간 30분 동안 좋은 페이스를 유지하며 9위로 달리고 있던 17번 레이스카가 코너를 탈출하던 중 쇼크 업쇼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하필 고장이 발생한 장소가 출발선을 얼마 지나지 않은 곳이어서 자력으로 한 바퀴를 돌아 피트 스톱으로 돌아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피트 스톱으로 돌아올 수만 있었다면 저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쳤을 겁니다. 하지만 한쪽 바퀴가 덜컹거리는 상태로 13km를 달린다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컸어요. 눈물을 머금고 리타이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네시스에서 파워트레인을 담당하는 김종혁 책임 매니저의 말이다. 17번 차가 멈춰 섰을 때 중계 화면에 드라이버 ‘마티스 조베르’의 얼굴이 잡혔다. 헬멧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은 이미 리타이어를 직감한 듯 풀이 죽어 있었다. 그는 17번 차를 모는 3명의 드라이버 중 가장 나이가 어린(2005년생) 드라이버인데도 불구하고 체력과 정신력을 극한으로 물아붙이는 ‘쿼드러플 스틴트’(4번의 피트 스톱을 하는 동안 운전자를 교체하지 않고 달리는 것으로 약 3시간 30분간 혼자서 운전했다는 의미)를 소화해낼 만큼 팀에 헌신적이었던 드라이버였다.
잘 달리다 한 번의 사고로 리타이어한 17번과 달리 19번은 상황이 더 심각했다. 야간 주행 중 전자제어에 문제가 생겨 두 번이나 트랙 위에 멈춰 섰다. 19번은 이전 라운드에서도 전자계통에 문제가 발생했던 적이 있던 터라 보는 이들은 더욱 가슴을 졸였다. 이후에도 19번은 피트를 빠져나가다가 시동이 꺼지면서 약 10분간 긴급 수리를 받았다. 여담이지만, 총 네 번이나 문제가 발생하고도 결국 완주에 성공한 19번을 두고 인터넷에선 팬들 사이에 ‘피닉스 19’ ‘좀비 19’ 같은 별명이 탄생하기도 했다.
“우린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르망은 세계에서 완주하기 가장 어려운 레이스이니까요. 오늘 우리는 작은 역사를 썼습니다.” 19번 차를 몰았던 폴 루 사턍의 말이다. WRC에서 현대자동차에 우승컵을 안겨줬던 가브리엘 타퀴니 제네시스 스포팅 디렉터는 “정말 대단한 성과입니다. 작년에 이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르망 24시간을 완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목표는 우승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제네시스가 13위를 기록하고도 축제 분위기였던 이유다.
한국에선 아직 르망 24가 생소하지만 제네시스가 진출하려 애쓰는 유럽에선 르망 24는 브랜드 이미지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대회다. 올해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포르쉐는 르망에서 총 열아홉 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들의 기술력과 내구성을 증명했다. 페라리 역시 2023년, 50년 만에 복귀한 르망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린 후 지난해까지 연속 3년 1등을 차지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브랜드가 매년 대회 참가를 위해 수백억을 쏟아붓는데도 ‘(브랜딩의 차원에서)내구 레이스의 가성비가 제일 좋다’는 평을 듣는 것도 그래서다. 르망 24를 찾은 35만여 명의 머릿속에 제네시스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것처럼 말이다.
모든 클래스의 순위가 정해지고 포디엄에서 샴페인 세리머니가 열리자 관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트랙 위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각기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만, 응원하는 팀의 순위와 상관없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르망24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건 24시간 동안 전력을 다한 팀 모두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내구 레이스에선 1등이 아니어도, 포인트를 획득하지 못해도, 완주에 실패하더라도 도전했다는 사실만으로 박수를 받는다. 내구 레이스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
르망의 밤은 고요하지만 가혹하다. 매년 야간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다행히 제네시스는 무사히 아침 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내구 레이스는 타이어를 교환하는 메카닉의 수를 4명으로 제한한다. F1처럼 동시에 갈아 끼울 수 없다.
Credit
- PHOTO 제네시스
- ART DESIGNER 최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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