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성 독서가 뭐가 어때서?
퍼포머티브 메일의 퍼포머티브 리딩에 대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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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아이스 마차 라테를 들고, 샐리 루니의 신작 <인터메조>를 표지가 잘 보이도록 들고 읽는다. 그러나 자그마치 432페이지에 달하는 이 거대한 페이퍼백을 든 남자의 손은 십 분째 책장을 넘기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남자들을 ‘퍼포머티브 메일’이라 부르고, 이들이 책을 읽는 척하는 행위를 ‘퍼포머티브 리딩’이라 한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연극성 독서 증후군. 여자들이 출몰할 것만 같은 주말 오후 번화가에서 특히 증상이 심해진다. 이들은 주로 여성 작가의 책을 읽는데, 요새 여자들이 자신과 공통점이 많은 여성 작가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 병에도 지역별 처방전이 있다. 런던이라면 샐리 루니, 뉴욕이라면 벨 훅스, 파리라면 마르그리트 뒤라스나 아니 에르노쯤은 들고 있어야 눈에 띌 수 있다고 한다. 특별히 여성에게만 어필하려는 게 아니라 전 인류를 상대로 지적 수준을 과시할 목적이라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인피니트 제스트>도 좋겠다. 10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한 손으로 들고 읽는 것은 지성뿐 아니라 체력과 악력까지 검증해주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유선 이어폰을 끼고 다니고, 바이닐로 음악을 듣고, 마차 라테를 마시고, 가방에 라부부를 매달고 다니는 남자들에 대한 조롱이 넘쳐난다. 책 읽는 남자의 사진 아래에는 이런 댓글이 달린다. “헤이 브로, 그 책은 딴 데서 읽으면 안 되는 거야?” 급기야 콘테스트도 생겼다. 시애틀에서 시작된 ‘퍼포머티브 메일 콘테스트’는 시카고, 뉴욕, 런던으로 번졌고,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손에 책을 든 채 심사위원 앞에서 퍼포머티브 리딩을 선보였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까지 놀릴 일인가? 고백하자면, 나 역시 연극성 독서 증후군을 앓고 있다. 그것도 꽤나 악성이다. <전쟁과 평화> 같은 벽돌만큼 두꺼운 책을 택시에서 펴는가 하면, 비행기에서 남들 다 잘 때 홀로 독서등을 켜고 <마담 보바리>를 읽는다. 스스로 악성이라 진단하는 이유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곳에서도 꼿꼿이 책을 읽으며 수치보다는 오히려 쾌감을 느끼기 때문. 최근에는 커버 스토리 배우 허남준의 인터뷰를 기다리며 촬영 현장에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스타일리스트 팀, 헤어 메이크업 팀, 영상 팀, 사진 팀, 브랜드 관계자, <에스콰이어> 패션팀까지 십여 명이 분주하게 오가는 촬영장 한구석에서 <북유럽 신화>를 읽고 있는 나를 보며, 그날 촬영을 담당한 우리 패션팀 후배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극도로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연극성 독서 증후군 환자는 쉬는 시간에 쇼츠나 보고 게임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는 사람으로 오인받는 것만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건 혼자 있을 때나 하는 짓이다. 누군가 그날의 나를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면 아마 이런 댓글이 달렸을 것이다. “아저씨, 그 책 꼭 거기서 읽어야 했어요?”
그럼에도 나는 퍼포머티브 리딩을 옹호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연극성 장애가 있다. 매일 파인다이닝에서만 밥을 먹는 척하는 연극성 다이닝 증후군, 일 년 내내 전 세계를 떠도는 것처럼 보이는 인스타 여행 증후군,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수입차 키만 테이블에 올려두는 퍼포머티브 드라이빙 신드롬, 인생에서 단 몇 시간밖에 갖지 못했던 몸을 영구 전시하는 퍼포머티브 보디빌더 신드롬까지. 이를테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연극이다. 이 수많은 연극 중 퍼포머티브 리딩이야말로 가장 가벼운 병이 아닐까? 파인 다이닝은 소화되고, 수입차는 감가되고, 보디 프로필의 근육은 지방 몇 스푼이면 사라지지만, 책은 책장에서 감가상각 없이 나의 내면을 과시해준다. 책값이 많이 올랐다지만 2만원이면 노벨상의 후광을 두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극에는 다른 연극에 없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하나 있다. 읽는 척이라도 자꾸 펼치다 보면, 결국 읽게 된다는 것.
Credit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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