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인스타그램 이후의 세계

앱 개발자가 예측해보는 인스타그램 이후의 세계.

프로필 by 박세회 2026.09.07

베트남을 함께 여행했던 미국 친구들의 아이폰을 들여다보다 놀란 적이 있다. 다들 ‘나의 찾기(Find My)’ 지도 위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애인이나 가족 몇 명쯤 있을 줄 알았는데 수십 명의 위치가 빽빽하게 떠 있었다. 누구는 식당에 멈춰 있었고, 누구는 고속도로를 따라 움직였고, 우르르 뭉쳐 있는 점들도 있었다.

“항상 위치를 공유해도 괜찮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 않아?” 나는 물었다. 친구는 잠깐 뜸을 들였다. 그런 고민 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 눈치였다. 오히려 위치를 공유하면 서로 어디 있는지 묻는 일이 줄고, 다들 뭘 하고 있는지 슬쩍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자기가 어디 있는지 친구들이 안다는 데서 안전함을 느낀다고도. 2025년 시장조사기관 시빅사이언스 조사에서는 미국 성인의 41%, 18~29세의 65%가 적어도 한 명과 위치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도 불편할 때는 없어?” 조금 더 묻자 연애 이야기가 나왔다. 헤어질 때, 이별을 말하기 전에 위치부터 끄기도 한단다. 말하기보다 먼저 지도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이보다 정확한 이별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찾기’에는 게시물이 없다. 찍을 것도, 쓸 것도, 고를 것도 없다. 내 몸의 위치가 점이 되어 계속 흐르고,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리고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은 “어디야?”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몇 달 전에는 정반대의 장면을 봤다. 미술 작업을 하는 프랑스 친구가 인스타그램에 손글씨로 탈퇴 선언을 올렸다. “반자본주의=반테크노자본주의”라고 크게 적고, 이 거대하고 사악한 로봇에게 더는 먹이를 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블로그 주소에는 형광펜을 쳤고, 자신에게 연락하려면 이메일을 보내거나 시그널로 오라고 했다. 마지막에는 언젠가 우리도 이 ‘Pue du cul’, 굳이 옮기자면 ‘똥구린 네트워크’를 떠났으면 좋겠다고 썼다. 나는 처음에는 그 친구의 블로그에 몇 번 들어갔다. 그러다 조금씩 덜 들어갔다.

소셜네트워크는 내가 던지는 질문을 많이 바꿔놓았다. “요즘 뭐 해?” “어디 있어?” “아직 그 일 해?”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그 사람의 게시물을 보면 대충 알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네트워크 밖으로 나가자 궁금증은 다시 생겼다. 요즘 뭐 하는지, 어디 있는지, 아직 그 일을 하는지 묻고 싶어졌다. 문제는 묻고 싶어졌다고 꼭 묻게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질문과 답 사이에 거리가 조금 생겼고, 나는 놀랄 만큼 게을렀다.

인스타그램에서 친구 관계보다 체류 시간이 더 중요한 상품이 되자, 피드는 관계망에서 광장으로 변했다. 친구가 올린 사진들 사이로 추천 영상과 광고가 들어오더니, 이제는 내 친구들이 올린 포스팅이 추천 영상과 광고 사이에 한두 개쯤 끼어 있는 쪽에 가까워졌다. 이제 우리는 새로 친해진 사람을 알고 싶을 때면 “너 요즘 인스타에 뭐 떠?”라고 묻는다. 같은 앱을 열어도 각자 다른 욕망의 카탈로그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피드는 MBTI보다 정확하다.

작년 11월, 인스타그램과 왓츠앱을 매각하라는 미국 연방거래위원회의 반독점 소송에서 메타는 1심 승소했다. 승소 논리가 재미있다. 이제 우리는 친구들의 게시물을 보여주는 서비스가 아니라 알고리즘이 고른 영상을 보여주는 회사이므로, 경쟁사는 틱톡과 유튜브이며,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의 영상과 사진을 보기 위해 자사 앱을 쓴다는 논리였다. 인스타그램 책임자 애덤 모세리는 친구들의 근황을 볼 수 있던, 이른바 ‘관계 중심’ 피드를 두고 “그 피드는 죽었다”고 했다. 친구 간의 네트워크가 죽었다는 사망진단서에 플랫폼 자신이 서명한 셈이다.

인스타그램이 실패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성공했다. 우리끼리 있던 방에 친구의 친구가 들어오고, 직장 사람이 들어오고, 부모가 들어오고,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다. 서비스 입장에서는 성공이고, 방으로서는 끝이었다.

그 틈에 작은 앱들이 생겼다. 셋로그(Setlog)에서는 친구들과 한 시간마다 몇 초씩 영상을 찍는다. 그러면 같은 방 사람의 하루가 브이로그처럼 한 화면에 이어 붙는다. 영상은 방 안에 초대되어 있는 사람들끼리만 볼 수 있다. 처음 써보면 생각보다 찍을 게 없다. 한 시간 전에도 회사였는데 지금도 회사고, 친구 화면에는 지하철 천장이 나오고, 누구는 거의 매번 자기 고양이를 찍는다. 이걸 누가 보고 있지 싶다가도, 그 몇 초들이 나란히 붙으면 묘한 뿌듯함이 생긴다.

한 명의 브이로그라면 별일이 없어서 편집됐을 장면들. 그런데 셋로그에서는 그런 시간에도 관객이 생긴다. 보는 것과 보여주는 것이 같은 인터페이스 안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내가 친구의 시시한 하루를 보는 동안 친구도 내 시시한 하루를 본다. 어쩌면 사람들이 새 소셜미디어를 찾는 이유는 더 좋은 콘텐츠를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전처럼 다시 형편없는 콘텐츠를 올릴 수 있는 곳이 필요해서인지도 모른다.

셋로그를 쓰면서 다른 앱들도 이것저것 깔아봤다. 사람들은 친구와 대체 어디에서 놀고 있나 궁금했다. ‘요프(Yope)’라는 앱은 사진 접근을 허용했더니 내 라이브러리를 뒤져 콜라주를 만들어줬다. 내가 만들고 있던 앱 화면과 필터가 걸린 셀카, 길거리 사진, 회 한 접시 사이에 토끼 몇 마리가 붙었다. 내가 직접 만들었다면 왜 만들었는지 설명하기 도무지 어려운 이미지였다. 그래서 조금 웃겼고, 마지못해 내 실험에 참여한 동생에게 보내버렸다.

반대로 샤오훙수를 며칠 들여다봤을 때는 인스타그램보다도 더 인스타그램처럼 느껴졌다. 서울이 내가 사는 도시라기보다 사흘 동안 소비해야 할 장소들의 목록처럼 보였다. 카페와 식당과 전시가 끝없이 이어지고, 익숙한 동네까지 여행지가 됐다. 그러다 보다 말고 생각했다. 나는 서울 트래블러가 아닌데.

아마 그래서 작은 관계망 안에서 작동하는 앱들에 더 눈이 갔는지도 모른다. 인스타그램은 혼자 들어가도 온 세상이 기다리지만, 이 작은 앱들은 대개 친구들을 몇 명 데려가야 비로소 재미가 생긴다. “너도 이거 깔아봐”라는 이야기가 먼저 필요하다. 계정을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관계의 그물망 하나를 통째로 이주시켜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얼마 전 중학생을 키우는 기획자의 집에서 소셜미디어 이야기를 하다가 비슷한 말을 들었다. 아이들 중 가장 인기가 많은 친구가 그들끼리 쓰는 앱을 정하면 친구들 모두 그 앱에 들어가 일상을 공유한다. 그러다가 혹시나 그 앱이 성공해 어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또 다른 앱으로 옮겨간다고 했다. 이쯤 되면 무슨 앱을 쓰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특정 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그 앱에 우리밖에 없다는 상태를 원하는 것일 수 있다. 앱이 잘되면 방이 커진다. 친구의 친구가 들어오고, 직장 사람이 들어오고, 어른이 들어온다. 어느 순간 우리끼리 있던 곳이 모두가 있는 곳이 된다. 서비스 입장에서는 성공이지만, 사람들은 다시 이사를 준비한다.

여러 앱을 돌아다니다 보니 앱보다 앱이 대신해주는 질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디야?”는 나의 찾기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뭐 했어?”는 인스타그램 스토리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뛰었어?"는 스트라바 안으로 들어갔다.

질문이 사라진 게 아니라 인터페이스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앞 문장을 건너뛸 수 있다. “어디야?”를 생략하고 “내가 그쪽으로 갈까?”라고 묻는다. “오늘 뭐 했어?”를 건너뛰고 “그래서 거기 어땠어?”부터 시작한다. 친한 사람 사이에서는 원래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문장이 많다. 기술은 생략을 더 많이 만들어왔다.

그렇다고 앞 문장이 줄어든 자리에 곧바로 진짜 내가 나타나는 건 아니었다. 비리얼은 불시에 알람을 받은 뒤 2분 안에 휴대전화의 전면 카메라와 후면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만 올릴 수 있다. 보정 기능이 없는 이 앱을 막상 써보니 제일 먼저 거슬린 건 내 얼굴이었고, 결국 나는 몇 번이고 구도를 수정해 다시 찍어야 했다. 예전에 ‘toilet.fm’이라는 작은 앱을 만든 적이 있는데 그때도 비슷했다. 10초간의 소리를 녹음해 공유하는 그 앱을 쓸 때는 내 목소리가 너무 낯설어서 결국 내가 만든 앱에 내 손으로 음성 필터를 붙여야 했다.

최근에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은 이것이다. 혹시 인스타그램 이후의 소셜미디어에선 사람이 필요 없어지는 게 아닐까? AI는 지루해하지 않고, 새벽 3시에도 대답하고, 어제 나누던 이야기의 다음 대목에서 곧바로 다시 시작한다. 대화의 맥락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나와의 대화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마치 인격체처럼 작동한다. 소셜네트워크가 친구에게 던질 질문을 인터페이스 안으로 옮겼다면, AI는 이제 질문할 상대까지 조금씩 인터페이스 안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밤에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상대가 있다는 건 실제로 좋은 일이다. 다만 아직 친구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내 별것 없는 하루를 친구가 봐주는 일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 친구가 다른 것을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사진을 보지 않고 넘길 수도 있고, 내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어느 날 지도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셋로그에서는 보는 것과 보여주는 것이 서로 묶여 있지만, AI와의 관계에는 그런 대칭이 없다. 나는 내 하루를 내놓지만 아직 AI에게는 내게 내놓을 하루가 없다.

어쩌면 다음의 작은 방도 오래 남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이 모이면 다시 광장이 되고, 우리는 또 다른 곳으로 이사할 것이다. 그사이 기술은 사람 사이의 앞 문장을 하나씩 지워왔다. 어디 있는지 묻지 않고, 점 하나를 보고, 아, 또 거기 있구나, 라고 알게 되는 것. 시시한 몇 초를 보고도 오늘도 똑같았네 하는 것. 묻지 않았는데도 이미 알고 있는 것. 다만 그 생략이 친밀함이 되려면 한 가지가 인터페이스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 지금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이 보지 않을 수도 있고 언제든 떠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


서기준은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때때로 회사를 만든다. 게임사 플라네타리움랩스를 공동창업했으며, 지금은 사주를 영어권에 소개하는 앱 '팔자'를 만들고 있다. 서울 효자동의 프로젝트 공간 '합'을 함께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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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서기준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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