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 않는 영웅의 시대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강이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1981년생 로저...

강이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1981년생 로저 페더러가 1988년생 마린 칠리치를 완파 하고 윔블던을 제패했다. 페더러는 2012년 대회 우승 이후 윔블던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피트 샘프라스와 동률이었던 통산 7회 우승 기록도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2017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숫자가 변했다. 테니스 그랜드슬램 우승 횟수 또한 19회로 늘었다.

테니스는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 체력이 중요하다. 남자 경기는 최장 5세트를 치러야 한다. 4시간 넘게 경기하는 경우도 많다. 이번 윔블던에서도 나달과 뮬러의 8강 경기는 4시간 넘게 이어졌다. 플레이가 진행된 시간만 따지면 1시간이 채 안 된다고 해도 그 시간 동안 기량과 집중력을 유지하는 건 당연히 어렵다. 그런 경기에서 30대 후반의 선수(심지어 한동안의 슬럼프를 이겨내고 다시) 활약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페더러는 경기를 오래 끌지 않는다. 서비스를 포함해 대부분 5구 이내에 승부한다. 다른 선수에 비해 경기 시간이 줄어든다. 이번 윔블던에서도 그랬다. 타이브레이크가 두 번 있었던 베르디흐와의 4강을 제외하면 모든 경기가 2시간 안에 끝났다. 베르디흐와의 경기도 2시간 18분밖에 안 걸렸다. 덕분에 테니스 경기를 여섯 번 치르면서도 기량을 유지했다. 노장의 가장 큰 적은 체력이다. 페더러는 효율성을 끌어올린다는 답을 찾았다.

로저 페더러페더러는 경기를 오래 끌지 않는다. 서비스를 포함해 대부분 5구 이내에 승부한다

한국 프로스포츠 세계에서도 노장의 활약을 볼 수 있다. 프로축구 K-리그 클래식 에서는 이동국이 눈에 띈다. 그는 1979년생, 한국 나이로 39세다. 여전히 한국 최고의 프로축구팀 전북 현대의 주전 스트라이커다. 이동국의 200호 골 기록 달성 여부는 이번 시즌 K-리그 클래식의 가장 큰 화제 중 하나다. 8월 초 현재 이동국이 기록한 통산골수는 이번 시즌의 4골을 비롯해 196골. 200골까지는 4골밖에 안 남았다. 만약 이동국이 200호 골을 넣는다면 한국 프로축구 최초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동국이 그라운드에서 오래 활약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적응력을 꼽고 싶다. 데뷔 초의 이동국은 날렵했다. 탁월한 상황 판단에 재빠른 움직임까지 더해져 다른 선수들보다 더 많은 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스피드가 느려지고 몸놀림은 둔해질 수밖에 없다. 이동국은 미련 없이 기존 스타일을 버리고 새로운 형태의 공격수로 변신했다. 상대 수비수와 몸싸움을 벌여 공을 따내고 동료에게 패스하는 연계 플레이 를 시작했다. 그러니 골 수는 줄어도 팀 내 비중만은 줄어들지 않았다. 만약 이동국이 왕년의 플레이 스타일을 고집했다면 그의 활약 이 지금처럼 오래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98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이동국은 중거리 슛으로 아주 깊은 기억을 남겼다. 그 후 20년이 지나 노장이 된 이동국이 다시 금자탑을 쌓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K리그의 최다 출장 기록은 김병지가 갖고 있다. 706경기. 아마 오랫동안 깨지지 않을 대기록이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김병지나 이동국 같은 선수들이 밝히는 체력 관리 비결이 ‘특별한 게 없다’는 것이다. 김병지는 ‘선수 생활 내내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은 것’을 오래 활약한 비결로 꼽는다. 이동국이 밝히는 비결 역시 ‘잘 먹고 잘 잔다’는 정도다. 물론 선수 생활 내내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자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특별한 자기 관리법을 기대한 팬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비결이 아닐까 싶다.

프로야구의 대표적 노장은 단연 이승엽이다. 야구는 플레이가 오래 이어지지 않아 장수가 가능한 대표적인 경기로 꼽힌다. 그런 야구계에서도 1976년생 선수가 홈런을 펑펑 터트리는 광경은 보기 힘들다. 이승엽은 그 어려 운걸 해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이승엽이 기록한 홈런 수는 17개. 놀라운 숫자다.

운동선수의 장수와 관련해 프로야구계에는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있다.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보다 더 오래 활약한다. 관련 기록을 조금만 살펴보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투수 쪽에서 한국 야구 장수 관련 기록 을 독차지하는 선수가 있다. 송진우다. 그는 1989년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해 2009년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했다. 총 21시즌. 그동안 최고령 승리투수(43세 51일), 최고령 완봉승 (39세 6개월 23일), 최고령 홀드(41세 3개월 20일)를 기록했다. 장수 선수였으니 최다 투구이닝(3003이닝), 최다승(201승), 최다 탈삼진(2048개) 기록도 송진우의 것. 딱 하나 밀리는 게 있다. 최다 출장. 그건 LG 트윈스 출신의 류택현이 갖고 있다. 901경기. 구대성도 잊지 말아야 할 장수 선수다. 1993년 빙그레 이글스에서 경력을 시작한 이후 오릭스 블루웨이브스, 뉴욕 메츠, 한화 이글스를 거치며 계속 던졌다. 2010년 KBO에서 은퇴하고도 계속 던졌다. 곧바로 호주 리그에 진출해 세이브 1위를 몇 번씩 차지했다. 송진우, 류택현, 구대성은 모두 왼손잡이다

메이저리그 최고령 승리투수는 제이미 모이어다. 2012년 4월 17일 덴버 쿠어스 필 드에서 열린 콜로라도 로키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경기. 모이어는 로키스의 선발 투수로 출전해 7이닝 2실점(비자책)으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통산 268일째, 나이는 49세 150일. 1932년 49세 70일에 브루클린 다저스를 승리로 이끈 잭 퀸의 기록을 80년 만에 경신했다.

메이저리그 투수 최다 출장 기록은 제시 오로스코가 갖고 있다. 그는 2003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할 때까지 모두 1252경기에 출전했다. 2위는 마이크 스탠턴의 1178경기, 3위는 존 프랑코의 111경기. 이 셋 모두 왼손잡이다.

일본에는 야마모토 마사라는 투수가 있다. 1986년 1군 데뷔 이후 2015시즌까지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뛰었다. 그는 2014년 한신과의 경기에 선발 출장해 5이닝 무실점 으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49세 25일. 그 전 기록은 1950년 한큐 브레이브스의 하마사키 신지가 세운 48세 4개월이었다. 54년 만에 기록 을 깬 것이다.

같은 팀 투수 이와세 히토키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인에게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에서 이승엽에게 역전 홈 런을 허용한 투수로 알려져 있다. 이와세는 2017년 8월 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 기에 출전하며 통산 950경기 출전 기록을 세 웠다. 요네다 데쓰야가 세운 949경기를 뛰어 넘은 신기록. 이날 이와세는 세이브도 올려 통산 404세이브를 기록했다. 역시 일본 최다 기록. 야마모토, 하마사키, 이와세도 모두 왼손잡이다. 그러고 보니 이승엽도 왼손잡이.

사회적으로는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보다 수명이 짧다는 게 통설이다. 미국 의학 박사 데이비드 개먼의 <왼손잡이 알코올중독 자가 많은 까닭은?>에 이런 말이 있다. “어떤 왼손잡이는 다양한 분야나 특정 분야에서 천 재성을 발휘한다. 반면 오른손잡이 위주의 사 회에 적응하지 못해 오른손잡이보다 수명이 짧아질 수도 있다. 환경과 유전의 복합 작용 으로 학습 장애나 천식, 당뇨병 등을 앓을 수 도 있고 알코올중독자가 되기도 한다.” 유독 야구에서만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는 셈이다. 이유가 뭘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분석이 아직 없다. 다만 흥미로운 이론이 있다. 일본의 전설적인 우완 투수 고미야마 사토루가 방 송 해설에서 했던 주장이다. 그는 뛰어난 로케이션으로 팬들로부터 ‘미스터 콘트롤’이라 불렸다. 고미야마의 주장은 역시 미스터 콘트롤답다. 바깥쪽 낮은 코스가 왼손 투수의 장수 비결이라는 것.

“사람들은 막연히 왼손 투수가 왼손 타자를 잘 상대하기 때문에 장수한다고 생각합니다. 좌투수가 좌타자에게 유리하므로 그런 이유도 작용하겠지요. 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프로야구에는 우타자가 좌타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우타를 요리해야 투수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구종과 상관없이 우 타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코스는 두말할 것 도 없이 바깥쪽 낮은 코스입니다. 투수라면 이곳에 잘 던져야 하고 많이 던져야 합니다. 좌완 투수는 그 공을 비교적 쉽게 던질 수 있 습니다. 직선으로 던지면 되거든요. 반면 오른손잡이는 몸과 팔과 손목을 비틀어야 합니다. 이 과정을 장기간 되풀이하면 피로가 쌓 이고 쌓여서 급기야 투수의 생명까지 위협받습니다. 가장 많이 던지는 코스에 던질 때 우완 투수가 좌완 투수보다 더 피로합니다. 그런 부담에서 자유로우니 왼손잡이가 장수하 는 것은 당연합니다.”

경탄할 만한 분석이다. 프로야구를 오래 경험한 선수만이 내놓을 수 있는 이야기다. 고미야마가 말하는 곳은 스트라이크존을 9등분해 왼쪽 위부터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 을 때 7번에 해당한다. 투수들은 거기에 공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오른손잡이보다 이 코스에 더 쉽게 공을 꽂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왼손잡이의 장수 비결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좌완 투수가 더 오래, 잘 던지는 현상은 앞의 요인과 고미야마의 주장까지 합쳐진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못 다룬 또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다. 스포츠의 순간에서 은연중 드러나는 인체의 비밀을 누가 통째 꿰뚫겠는가.

최근 LA 다저스의 류현진이 아주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8월 7일 뉴욕 메츠 전에서 7이닝 동안 8삼진을 잡고 안타는 하나만 맞으며 환상적인 무실점 투구를 선보였다. 류현진도 왼손잡이다. 고미야마의 분석이 정확하다면, 그리고 앞에 열거한 이유가 어느 정도 타당하다면 류현진은 아직 한참 더 활약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이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1981년생 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