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에르메스적 태도

2017 A/W 에르메스 남성 유니버스가 열렸다. 홍콩이 뒤집어졌다. 한 남자가 뒤흔들렸다.

BYESQUIRE2017.11.09

“I like your shirts.” 베로니크 니샤니앙이 소곤거렸다. 지난 9월 22일이었다. 홍콩 출장 첫날 밤이었다. 에르메스 남성 유니버스 2017 A/W 홍콩 쇼를 하루 앞두고 있었다. 에르메스가 주최한 만찬이 코보 하우스에서 열렸다. 홍콩의 패션 피플들과 아시아 각국에서 초대받은 패션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코보 하우스는 지금 홍콩에서 가장 분방하면서도 세련된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코보는 보헤미안 집단을 뜻하는 영어 약자다. 프랑스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보헤미안식 태도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분명 에르메스를 빼닮은 공간이었다.

베로니크 니샤니앙의 옆자리에 앉았다. 우연을 가장한 선택이었다. 베로니크 니샤니앙은 에르메스 남성 유니버스의 아티스틱 디렉터다. 30년 가까이 에르메스 남성 유니버스를 이끌고 있다. 내심 유니버스라는 에르메스의 표현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패션이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는 브랜드라니. 이번 홍콩 출장길에 에르메스 세계로의 문을 두드려볼 참이었다. 그 세계의 설계자인 니샤니앙이 바로 옆자리에 있었다. 니샤니앙을 이해하는건 에르메스 남성 유니버스를 이해하는 열쇠였다.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새로운 유니버스의 문을 두드렸다.

베로니크 니샤니앙은 아주 온화한 사람이었다. 여느 천재 패션 디자이너들에게서 볼 수 있는 신경질적인 면모를 언뜻 찾아보기 어려웠다. 니샤니앙 스스로는 자신을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아주 친절한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잠시 지켜본 니샤니앙은 사람에겐 너그럽고 일에는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삶의 즐거움을 마주한 그녀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니샤니앙은 코보 하우스의 음식을 연신 칭찬했다. 그녀는 삶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데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찬의 하이라이트는 트러플을 곁들인 대구 요리였다. 니샤니앙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바로 다음 날 홍콩의 외딴 공항에서 홍콩 전체를 들썩이게 할 패션쇼를 열어 성공시켜야 한다는 중압감 따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금 현실의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삶의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우리는 혀끝에 감기는 송로버섯 향을 음미하면서 다음 날 있을 홍콩 쇼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니샤니앙의 관심사는 온통 전문 모델들과 함께 런웨이를 누빌 일반인 모델들에게 쏠려 있었다. 앞서 열린 LA 쇼에서도 일반인 모델들이 무대에 섰다. 홍콩 쇼에선 14명이나 되는 일반인 모델을 섭외해놓은 상태였다. 니샤니앙이 생각하는 에르메스의 남자들이 누구인지 가늠할 수 있는 면면이었다. 기본적으로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셀러브리티들이었지만 그게 니샤니앙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들이 얼마나 자기 삶을 사랑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니샤니앙이 살짝 말했다. “자기 삶을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는 패션도 사랑할 수 없으니까요.”

니샤니앙은 디저트가 나오기 직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 날 쇼를 마저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일어설 즈음엔 비주를 할 만큼 친해져 있었다. 그건 전적으로 니샤니앙의 우아한 태도 덕분이었다. 우리는 홍콩에 대한 각자의 개인적인 추억까지 공유했다. 니샤니앙은 홍콩 같은 아시아 도시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서울에 대한 이야기도 더 많이 듣고 싶어 했다. 14명이나 되는 일반인 모델들의 일정을 맞추고 런웨이에서 입을 핏을 맞추는 게 영 쉽지가 않다며 중얼거렸다. 그때 니샤니앙이 일어서면서 살짝 귀띔했다. “I like your shirts.”

니샤니앙의 이 한마디가 뇌리에 박혔다. 30년 동안 세계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를 이끌어온 디자이너의 칭찬이어서가 아니었다. 30년 동안 세계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를 이끌어온 디자이너가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그날 만찬에 입고 간 셔츠는 에르메스가 아니었다. 평범한 브랜드지만 핑크빛이 특별한 스웨트셔츠였다. 니샤니앙이 원하는 건 온몸을 에르메스로 휘감은 어떤 남자가 아니었다. 인터뷰에서도 니샤니앙은 같은 말을 했다. “현실의 남자들은 고급스러운 옷에 일상적인 옷을 섞어 입어요. 그게 일상이고 현실이죠. 저는 그런 남자들이 멋져요.” 니샤니앙은 언제 어디서나 그런 남자를 찾고 있는 듯했다. 럭셔리와 일상을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그런 남자 말이다. 니샤니앙은 에르메스가 한 남자의 일상이면서 동시에 특별함이 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게 아마 특별한 자리에 편안한 옷을 입고 온 한 보통 남자와의 일상적인 대화를 니샤니앙이 기억했던 이유였을 것이라 짐작했다. 만찬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 니샤니앙을 조금 알게 된 만큼 에르메스 남성 유니버스의 단면을 조금 이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패션과 인생을 바라보는 에르메스적 태도를 납득할 수 있었다.

9월 23일 저녁에 열린 에르메스 2017 A/W 홍콩 쇼는 ‘업사이드 다운’이라는 부제답게 뒤집어지게 왁자지껄했다. 파리 패션쇼에서 열렸던 2017 A/W의 옷을 그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선보였다. 니샤니앙의 애를 태웠던 14명의 일반인 모델들은 키가 크고 훤칠한 전문 모델들 사이에서도 주눅 들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당당한 태도였다. 심지어 유머러스했다. 일반인 모델들이 등장할 때마다 객석에선 박수와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일반인 모델들은 객석을 향해 윙크를 해 보이거나 손을 흔들었다. 그들 모두가 지금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에르메스의 패션은 평가하고 평가받고 값을 매기고 값을 치르는 과시와 허세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함께 향유하는 즐거움의 대상이었다.

사실 홍콩 쇼를 보면서도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니샤니앙과 에르메스 사람들이 쇼가 시작되기 직전에 던진 농담 때문이었다. “니샤니앙이 찾지 않았어요? 쇼가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무대에 설 일반인을 찾고 있었거든요.” “서울에서 쇼를 하면 꼭 무대에 서야죠. 준비하고 계세요.” “니샤니앙이 홍보팀을 통해 프로필을 알아보라고 했다던데요. 그런데 사진과 실물이 많이 달라서, 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던데요?” 그때부터 에르메스 런웨이에 선다는 것에 대한 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날 챙겨 입은 2017 A/W 에르메스 더블브레스트 재킷을 전문 모델이 입고 눈앞을 걸어가자 그런 미망이 절정에 달했다. 적어도 신장은 저 모델 못지않은데. 무대에 서면 키 값도 못 하지 않을까.

에르메스의 야심은 더 거대하다. 거꾸로 패션이 태도를 만들고 패션이 삶을 바꿀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니샤니앙과 에르메스의 방식이다.

진짜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베로니크 니샤니앙과 에르메스가 홍콩의 버려진 공항에서 ‘업사이드 다운’이라는 이름의 파티를 연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이번 시즌의 새로운 옷을 상업적으로 선보이려고 이번 행사를 기획한 게 아니었다. 진짜 보여주려는 건 패션이 아니라 태도였다. 에르메스적인 삶의 태도를 공유하기 위해 파티를 주최한 것이었다. 전통과 격식을 알지만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는 자유분방한 태도 말이다. 상자 밖에서 사고할 줄 알지만 상자가 있다는 것도 무시하지 않는 태도 말이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나눈 니샤니앙과의 대화 덕분에 그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에르메스적인 태도는 쇼가 끝난 뒤 이어진 포스트 파티에서 더 명백하게 드러났다. 파티장 한가운데엔 에르메스의 스니커즈로 조립한 무선 조종 자동차들이 놓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패션은 장난감이었다. 천장에는 모터사이클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거대한 아이스바 안에서 추위를 즐기고 뒤집혀진 그림을 보면서 퍼즐을 맞췄다. 이 모든 게 거대한 농담 같았다. 홍콩의 야경이 쏟아지는 무대 위에 밴드 캠프 클로드가 섰다. 그들은 에르메스 런웨이의 배경음악이었던 ‘Hero’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샴페인 잔을 든 채 하루가 뒤집어질 때까지 춤을 추었다.

그날 밤 펼쳐진 모든 풍경이 삶의 즐거움을 누리는 에르메스적 태도였다. 에르메스의 런웨이에 선다는 농담을 곱씹으면서 과연 삶을 에르메스적 태도로 즐길 줄 아는 남자인지 생각했다. 니샤니앙이 설계한 에르메스 남성 유니버스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분명 에르메스 스카프나 에르메스 가방이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그래서 패션을 사랑하고 결국 삶을 사랑하는 태도 그 자체다. 니샤니앙은 그런 남자가 에르메스를 입고 에르메스 유니버스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에르메스 남성 유니버스를 이해하기 위해선 파리 패션 위크에서 에르메스 쇼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파리 쇼는 에르메스의 전통적인 측면을 보여준다면 전 세계 도시를 누비며 열리고 있는 남성 유니버스 파티는 에르메스의 자유분방함을 드러낸다. 니샤니앙은 럭셔리의 화려함과 일상의 수수함 둘 다 사랑한다. 둘 다 에르메스의 진면목이다.

니샤니앙이 30년 동안이나 에르메스를 이끌어올 수 있었던 건 언제나 유행의 최첨단에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최첨단의 유행은 돌고 돈다. 니샤니앙은 유행이 아니라 스타일을 창조했다. 패션 스타일은 삶의 태도와 일치한다. 어떤 삶을 사느냐가 그 사람의 패션을 결정한다. 도시인과 산악인의 패션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삶의 모습과 삶의 태도가 남자의 패션을 결정한다.

에르메스의 야심은 더 거대하다. 거꾸로 패션이 태도를 만들고 패션이 삶을 바꿀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니샤니앙과 에르메스의 방식이다. 패션 스타일을 창조하고 그걸 통해 남자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다. 그런 삶의 태도를 공유하는 사람들로 유니버스를 만든다. 그들이 창조한 유니버스를 하나로 묶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지난 9월 23일 홍콩에서 열린 에르메스 남성 유니버스 행사는 에르메스의 세계가 서로 마주하고 뒤섞이고 뒤집어지는 자리였다. 그 세상의 일부가 되고 싶어졌다. 농담이 진담이 되듯 에르메스 쇼에 설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어졌다. 그렇게 에르메스의 유니버스가 한 남자의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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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신 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