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쓸데없이 단호한 양세종’이라는 제목의 사진 봤어요?
그게 뭐예요?
목표를 묻는 질문에 그런 거 없다고 답하면서 이렇게 말한 장면이에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아.(웃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네.
왜요?
진짜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웃음)
허무주의인가요?
오히려 반대죠.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오케이, 오늘 주어진 것 잘하자.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열여섯 살에 무슨 일로요?
그때 옛날로 치면 영화마을 같은 책&DVD 대여점에서 2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학교 끝나면 맨날 가던 대여점이었어요. 맨날 가서 서너 시간은 기본으로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까 사장님이 “너 맨날 올 거면 부모님한테 허락받고 선생님한테 허락받고 여기서 아르바이트해” 그래서 “정말요? 아싸” 하고 하게 됐어요.(웃음) 그때 만화책, 소설책, 영화를 엄청 많이 봤어요. 그런데 명작들 보면 사랑, 갈등, 그리고 죽음이 꼭 나오더라고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야 후회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특별히 어떤 작품을 봤길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을까요?
너무 많아서 기억도 안 나는데 아마 무의식 속에 쌓여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저도 사실 죽음을 되게 무서워해요. 두려워해요. 하지만 진짜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우리 모두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 가장 본질적인 일을 잘하고 싶어요. 그게 연기가 될 때도 있고 친구 관계가 될 때도 있고, 아무 생각하지 않고 음악을 듣는 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럼 지금 양세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뭐예요?
음저는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정리하거든요. 어제 걸으면서는 다음에 있을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촬영 생각하고 대사 읊고 그랬어요.
얼마나 걸었어요?
한 40분쯤? 새벽 2시 20분쯤부터 걸어서 집에 도착하니까 3시쯤이었어요.
꽤 오래 걷는군요.
걸을 때 목적지를 정해두지는 않아요. <사랑의 온도> 찍을 때는 세트장 근처에 잔디 구장이 있었거든요. 잠깐 짬날 때 패딩 하나 입고 이어폰 끼고 그곳을 계속 걸었어요. 그냥 계속 걸으면서 대사 생각하고 상황 생각하고. 계속 걷다가 느낌 오면 됐다, 하는 거예요.
어떤 느낌이요?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 그러면 그때는 제일 듣고 싶은 음악을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서 돌아가요.
어제는 뭐 들었어요?
오랜만에 태양의 ‘Where U At’ 들었어요.
그러고 집에 가면 상쾌하겠어요.
좋죠. 생각이 정리되니까 너무 좋죠.
그런데 생각을 정리하는 일과 그 생각을 실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지 않을까 싶어요.
당연하죠. 걸으면서 생각한다는 게 하나의 결론을 내리기 위한 행동은 아니에요. 한쪽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아요. 상상을 많이 해요. 예를 들어 “사랑해”라는 한마디 대사를 가지고 8가지든 9가지든 아니면 10가지든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충분히 생각해요. 내가 “사랑해”를 어떻게 표현할지, 상대방은 이 말에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하는 거죠. 상대방이 “(뿌리치듯이) 됐어”라고 할 수도 있고 “(체념하듯이) 됐어”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에 따라 제 반응도 달라져야겠죠. “(애교 부리며) 왜 그래?” 그럴 수도 있고 “(강하게) 사랑한다고!” 그럴 수도 있고. 이런 몇 가지를 상상해요.
마인드 컨트롤이랄까, 시뮬레이션을 하는군요.
상황의 사이사이를 생각하는 거죠.
오늘 촬영을 위해서도 생각해본 게 있나요?
처음 페이퍼(시안)를 봤을 때 느낌이 딱 왔는데, 사진 속 사람들의 눈이 다 똑같더라고요. 다 다른 사람인데 바라보는 시선은 똑같이 ‘왜?’라고 하더라고요. ‘왜?’, ‘뭐가?’, ‘왜?’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오케이, 이거다. 나는 오늘 ‘왜’만 가지고 간다.
포즈 취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준비한 시안이었어요. 그런데 눈을 봤군요.
이 사람들이 어떤 포즈를 하는지는 안 봤어요. 주문어를 찾은 거죠.
주문어요?
아, 말하면 안 되는데
왜요? 무서운 건가요?
저만 알고 싶어서.(웃음) 그런데 저만 하는 방법은 아닐 거예요. 캐릭터에 맞게 대사든 단어든 내게 제일 자극이 잘 오는 걸 주문어로 삼아요. 예를 들어 드라마 <듀얼> 할 때는 억울한 입장의 성준이랑 살인자인 성훈이를 연기했잖아요. 지금은 캐릭터를 잊어서 그때처럼 못하는데 성준일 때는 “나 아니에요, 나 아니에요”라든지, 성훈일 때는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라고 읊조리는 거예요.
오늘 양세종을 자극한 주문어는 ‘왜’인 거네요?
네. 대신 ‘왜’를 이렇게 해볼 수 있는 거죠. ‘왜’를 앞에 두고 다른 상황을 붙이는 거예요. FM 버전으로 “(담백하게) 왜?” 할 수도 있고 “(약간 멋쩍게) 왜? 나 좀 괜찮아?” 할 수도 있고. “(건들거리며) 왜? 뭘 봐?” 이런 것도 있잖아요. 그런 걸 해봤어요.
평소 본인다운 톤은 뭔가요?
“(다정하게) 왜?” 하는, 약간 부드러운 ‘왜’가 맞는 것 같아요. 마지막에 “(건들거리며) 왜? 뭘 봐?”라는 느낌을 주려고 하니까 불편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호흡을 다시 잡고 “(부드럽게) 왜?” 하는 걸로 돌아가니까 편해졌어요.
제가 그간의 인터뷰를 통해 본 양세종이라는 사람은 이번 신작에서 연기하는 ‘우진’과 가까울 것 같더라고요.
왜요?
우진이란 캐릭터의 한 줄 설명이 ‘세상을 차단하고 살아온 차단남’이라서요.
아.(웃음)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채네요. 작품을 준비할 때 모든 연락을 끊고 혼자만의 공간을 얻어 생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게오해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아예 세상과 차단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작품 들어가면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놓고 알람 기능으로만 쓰고 누구랑도 연락 잘 안 하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지냈던 건 맞아요. 어떻게 보면 차단이 맞네요. 하지만 요즘에는 친구들, 지인들도 “저 이제 작품 들어가요. 한동안 연락 못 드릴 거예요”라고 말하면 다 이해해주세요. 감사한 일이죠. 그전에는 그러지 못했어요.
그전에는 어땠는데요?
<사임당 빛의 일기> 찍고 <낭만닥터 김사부> <듀얼> <사랑의 온도> 찍는 중간중간 기간이 길지 않았어요. 바로바로였어요. 길어도 2, 3개월? <듀얼> 끝나고는 일주일 후에 <사랑의 온도> 대본 리딩 들어갔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그 네 작품 하는 동안 거의 모든 지인이나 친구들과 연락을 단절했죠. 안 했죠. 아니, 못 했어요.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랬는데 <사랑의 온도> 끝나고 2년 가까이 연락 못 드린 분들한테 다 연락드렸어요. 다 드리고, 다 뵙고, 술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그랬어요.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갑자기 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요?
(한참을 뜸 들였다.) 행복해지려고 하잖아요, 우리 모두.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려 하고 행복을 찾잖아요. 그런데 <사랑의 온도>가 끝나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 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것 맞나?
사실, <듀얼> 때의 캐릭터는 이미 잊었다고 했고, <사랑의 온도> 때 쓴 향수를 뿌리고 왔다길래 많이 사랑받은 캐릭터라서 생각났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눈에 보여서 뿌렸을 뿐이라고 했죠. 자신이 연기했던 옷을 빨리 벗어버리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바로 떨쳐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었나요?
그런데 어느 한 캐릭터가 끝나면 존경하는 모든 선배님들도 아마 다 힘드실 거예요. 다 그렇지 않을까요? 다 힘드실 거예요.
본인은 그랬어요?
네. 저는 힘들었어요, 저는.
왜요?
<사랑의 온도> 때문이 아니라, 쌓였던 것 같아요. 그냥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요. 네 작품을 연달아서 막 했잖아요.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작품도 계속하고 물질적인 것이나 여러 가지가 풍요로워 보일 수 있어요. 그런데 너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예를 들어 어머니하고 밥 먹을 때도 항상 대본을 생각하고 먹었단 말이에요? 작품을 준비하며 한 달에 한 번, 2개월에 한 번, 오랜만에 어머니와 함께 밥을 먹을 때도 저는 <듀얼>이든 <사랑의 온도>든 대본만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모습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랑의 온도> 촬영 마지막 날, 마지막 신 딱 끝났을 때 드는 생각이 이거였어요. 아, 이제 나를 찾아야겠다.
아무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있다 보니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왜? 그래서 왜? 그래서 왜, 세종아?그래서 문제가 뭔데?’ 계속 자문했어요.
‘나’가 사라진 거였군요.
그래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어요. 6개월 정도.
뭐 했어요?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런던도 가고 방콕도 가고. 여행 가서 느낀 게 진짜 많아요. 특히 런던 가서 느낀 게 생각의 전환을 한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무엇을 느꼈나요?
이건 말씀 못 드려요.
또?
그냥 나만 알고 싶어서.(웃음)
나만 알고 싶은 깨달음이에요?
깨달음까지는 아니고혼자 갔거든요. 혼자 10일인가 11일을 런던에 머물렀어요. 아무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있다 보니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왜? 그래서 왜? 그래서 왜, 세종아? 그래서 문제가 뭔데?’ 계속 자문했어요. 굳이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데. 너무 깊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데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왜 그랬지?
왜 그랬을까요?
모르겠어요.
더 잘하고 싶어서였던 건 아닐까요?
그런데 이건 연기적인 것뿐 아니라 나 자신을 자꾸, 나 양세종이라는 사람에 대해 너무 깊게그런데 지금은 좀 더 가볍게 해도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런데 깊게 생각하는 일을 꼭 피해야 할까요?
그게 그러니까어떤 부작용도 생기는 것 같아요. 네 작품을 연달아 했잖아요. 저보다 많이 한 분도 당연히 계시겠지만 막 진짜 단절하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까, <사랑의 온도> 끝났는데 며칠 뒤였지? 일주일 뒤인가 5일 뒤에 코피가 줄줄 새는 거예요. 예전에 <사임당 빛의 일기> 촬영 막바지쯤 샤워할 때도 그랬거든요. 그냥 코피인 줄 알았는데 덩어리랑 같이 한 2분 동안 계속 흐르는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흥, 흥 더 풀었어요. 흥, 흥, 흥 막 풀었는데 머리가 너무 시원한 거예요. 뭐가 쌓였었나 봐요. 그런데 그로부터 이틀 뒤에 또 코피가 터진 거예요. 그땐 눈앞이 핑 돌더라고요. 아무튼 이번에 <사랑의 온도> 끝나고 나서 또 똑같은 증상으로 코피가 난 거죠. 이번에도 흥 풀었어요. 또 시원하더라고요. 다행히 이번에는 이틀 뒤에 또 코피가 터지지는 않았어요. 다행인 거지.
그렇게 코피가 쏟아졌는데 다행이에요?
아, 코피 나고 이런 거는 기사 내용에 좀 그런가요?
아니요. 전혀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안에 있는 나쁜 것들이 다 빠져나갔다. 아이 시원해.(웃음)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웃음)
내 안을 깊이 들여다보려고 하는 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서일 거예요.
있죠.
그게 궁금해요.
말 안 할래요. 말 못 하겠어요.
왜 말 못 해요?
안에 있는 저는, 진짜 내가 가지고 있는 결핍은, 말하고 나면 후회할 것 같아요. 그렇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건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속이는 것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어요. 존중해주실 거죠?
어쩌면 이게 양세종 안에 있는 양세종인 것 같네요.
와우.(웃음)
적어도 ‘없다’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또 한참을 뜸 들였다.) 생각해보니까 저는 어머니, 아버지께도 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아요. 내 베스트 프렌드들한테도. 그 이유는 알아요, 제가. 그런데 그 이유에 대해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이것만 물어볼게요. ‘나를 찾아야겠다’고 했어요. 찾았나요?
최근 어머니랑 밥 먹는데 너무 편하더라고요. 그냥 눈앞의 반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예전에는 ‘이거 살찌지’, ‘아, 밥 반 공기 먹어야 하지’, ‘이따 촬영할 때 뭐 해야 하지?’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이번에는 그랬어요. “엄마, 이거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