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슐랭 가이드> 3스타 셰프 페란 아드리아가 만든 맥주, '이네딧 담'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오늘 밤 이네딧 담.


오늘 밤 이네딧 담


© Inedit Damm

© Inedit Damm

페란 아드리아. 57세. 미식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셰프. 물과 기름을 섞어 걸쭉한 에멀션을 만드는가 하면, 액체를 젤리처럼 굳히고, 곁에서 숨만 쉬어도 흩어질 것 같은 거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분자 요리의 창시자. 요리에 화학과 물리학을 접목해 고체와 액체, 기체라는 식재료 본래의 물성을 창조적으로 파괴한 그의 요리는 가히 초현실적이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 주방의 살바도르 달리.
〈미슐랭 가이드〉 최고 등급인 별 3개를 14년 동안 유지하며 1년에 6개월만 운영하던 페란 아드리아의 레스토랑 엘 불리는 재정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 2011년 문을 닫았다. 하지만 페란 아드리아는 엘 불리 재단을 설립해 스페인 지로나에 미식 박물관 ‘엘 불리 1846’을 열고 이곳에서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한다. ‘라불리피디아(LaBullipedia)’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누구나 서양 미식의 역사에 접근할 수 있게끔 하기도 했다. 레시피 개발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시각화한 콘셉트 스케치와 드로잉을 모아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디즈니와 LVMH 등 글로벌 브랜드와 다양한 협업을 한다. 개념적 확장에 이은 미식의 공간적 확장. 엘 불리라는 공간 안에서 미식의 경계를 넓히던 페란 아드리아는 자신의 혁신적 미식 철학을 레스토랑 밖 세상 전체로 끊임없이 확산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집 근처 마트에서 페란 아드리아의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을 대표하는 양조장 담(Damm) 브루어리와 페란 아드리아, 엘 불리 소믈리에 팀이 합작한 맥주 이네딧 담이다. 맥주를 젤리처럼 굳히진 않았다. 짙은 회색 바탕에 은색 별이 박힌 간결한 보틀 디자인이 기대감을 높인다. 한동안 ‘네 캔에 1만원’짜리 맥주만 마시느라 찬장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주석 오프너로 뚜껑을 열고, 페란 아드리아가 신신당부한 대로 냉장고에 차게 보관한 화이트 와인 잔에 200mL 정도 따르니 신선한 시트러스 향이 확 퍼진다. 그래, 화사하다는 말이 딱 맞다. 에델바이스나 블루문 등에서 익히 경험한 고수잎의 진한 풍미가 시트러스 과실 향, 씁쓸한 맥아와 구수한 이스트의 맛과 이음새 없이 어울린다.
하지만 전면에 내세운 페란 아드리아와 엘 불리의 이름에서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혁신이나 창조적 파괴, 발상의 전환 같은 건 그리 도드라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페란 아드리아는 맥주를 굳히거나 기화하지 않았다. ‘미식을 위한 유일한 맥주’, ‘맥주 발전사의 기준점’ 같은 번드르르한 수사도 이 산뜻한 맥주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맥주에 정찬을 곁들이는 시도는 이미 허다하게 이뤄졌고, 일례로 페란 아드리아 이후 세계 최고의 셰프 중 한 명으로 떠오른 레네 레제피의 레스토랑 노마에서는 자작나무 수액을 가미해 직접 빚은 필스너를 정찬에 곁들인다. 이 외에도 다양한 셰프들이 거친 맥주에 파인다이닝의 섬세함을 더했다. 분자 요리가 한창 유행하던 2010년대 초반 젤리처럼 동그랗게 굳힌 위스키를 먹어본 적이 있다. 손으로 위스키를 집어 입속에서 터뜨리는 경험 자체는 신기했지만, 다시 손이 가진 않았다. 섬세한 풍미는 느껴지지 않았고, 얇은 외피가 터지자 갑자기 입을 가득 채우는 거센 알코올 향은 불쾌하기까지 했다. 새로움이 주는 쾌감은 결국 일회성이다. 혁신의 상징이던 분자 요리가 수많은 셰프의 모방에 의해 열화되어 본래의 혁신적 의미보다는 감각적 유희 거리로 소비되는 이유일 것이다. 자신의 요리에 분자 요리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일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는 셰프가 있을 정도니까.
결국 중요한 건 완성도다. 에일의 섬세함과 라거의 청량함 사이 어딘가에 이네딧 담이 자리한다. 이른바 갖은양념을 하지 않은 요리라면, 녹색 채소와 과일, 해산물, 육류 등 식재료와 요리 스타일을 막론하고 능히 어울릴 수 있는 맥주다. 샴페인은 일반적으로 캐비아 등 고급 요리에 곁들어 마시기를 권하지만 그건 비싼 가격대 탓이 크다. 샴페인을 비롯한 드라이 스파클링 와인은 매칭할 수 있는 요리의 폭이 생각 외로 넓다. 단 요리만 아니면 된다. 시고 쓴 맛의 적절한 조화와 입안을 청량하게 자극하는 탄산의 작용, 여기에 맥주 특유의 곡물 풍미까지 더한 이네딧 담은 다디단 과자와 함께 먹어도 문제없다. 가히 음식 매칭계의 만능 플레이어라 할 만하다. NBA 선수에 빗대어 말하자면 현역 최고라는 르브론 제임스보다는 슬로베니아에서 온 신성 루카 돈치치에 가깝다. 이 모든 걸 너무도 쉽고 부드럽게 해낸다. 그러고 보니 돈치치 역시 스페인 리그 출신이다.
‘치맥’용으로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는 해산물 요리와 궁합이 정말 좋다. 새우를 마늘 기름에 볶는 스페인 요리 감바스 알 아히요나, 여기에 홍합과 토마토, 고수를 더한 포르투갈 요리 아로스 데 모로스코 같은 데 곁들이면 ‘정찬에 어울리는 맥주’라는 말이 그저 마케팅 용어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거다. 각양각색의 타파스에 곁들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복잡한 게 싫다면 마른 오징어도 좋다. 풍미가 모나거나 자극적이지 않아 맥주만 마셔도 훌륭하다. ‘네 캔에 1만원’에 길들여지다 못해 맥주가 지겨워진 사람들에게 제격이다. ‘맥주는 목 넘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다. 맥주를 그리 즐기지 않는 사람, 그중에서도 특히 맥주는 배불러서 싫다는 사람이라면 이 산뜻한 맥주가 능히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것이다.
오늘 밤 이네딧 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