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삿짐 별거 있나? 박스 만들어 물건 넣고 테이프로 붙이면 끝이지

그것은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는 기분도, 꿈꾸던 일을 끝내 실패했다는 기분도 아니었다. 두꺼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는 기분이었다.

BYESQUIRE2020.03.06
 
 

이삿짐을 꾸리며 

 
 
그것은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는 기분도, 꿈꾸던 일을 끝내 실패했다는 기분도 아니었다. 두꺼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는 기분이었다. 
 
2014년 여름, 태어나 처음으로 인감도장이란 걸 만들었다. 구둣방만큼 좁은 가게에서 도장을 파던 사장님이 웃으며 물었다. “좋은 일 있으신가 보네?” 젊은이가 와서 인감도장을 만들 때는 대개 거대한 무언가를 사기 위해서란다. 집이나 자동차. 내 경우 집이었다. 작은 아파트를 부부 공동 명의로 사게 된 것이다. 막도장 시절이 막을 내리고 인감도장 시절이 시작되었다는, 이상한 성취감을 느끼며 엄지손가락만 한 나무토막에 내 이름 세 글자가 새겨지는 걸 구경했다. 집을 거래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인감도장 말고 또 하나 있었다. 주민등록초본. 이것은 한 단계 레벨을 높여 어른이 되는 공식 같은 것인가? 막도장 지나 인감도장, 등본 지나 초본. 도장집 옆 구청에서 발급받은 주민등록초본은 예상보다 두툼했다. 그대로 봉투에 넣어 보관했다가 잔금 치르는 날 부동산에 들고 가면 될 일이었지만, 서류란 마땅히 그 정도의 관심만 받으면 되는 종류의 사물이건만, 나는 처음 보는 그것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거기에는 내가 태어나 살았던 집들, 열 개가 훌쩍 넘는 주소가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마치 나이순으로 정리된 사진첩처럼, 기억에서 잊힌 것까지 빠짐없이 꼼꼼하게. 성실한 그 나열을 훑어보는 동안 나를 성장시킨 집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해가 정수리 위에서 이글거리는 여름의 한낮이었다. 차가 쌩쌩 달리는 4차선 도로 옆 인도였다. 나는 서 있던 그 자리에서 그만 말뚝이 되었다.  
한 해 걸러 한 번씩 이사를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2년은 짧았고 이삿날은 빠르게 돌아왔다. 이사하고 짐 정리하고 몇 번의 명절을 치르고 나면 다시 그날이었다. 이사도 짐 정리도 몇 번의 명절도 모두 엄마 몫이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집 한쪽 구석에 몇 개의 상자가 쌓이기 시작했다. 상자 더미는 날마다 조금씩 높아졌다. 상자가 높아진다는 건 이삿날이 다가온다는 뜻이었다. 엄마가 하루 종일 이삿짐을 꾸린다는 뜻이었다. 출근한 남편과 학교 간 아이들을 대신해서 홀로. 젊은 엄마에게 2년은 짧았고, 여섯 식구의 짐은 너무 많았다. 한 달 동안 찬찬히 짐이 쌓이고, 마침내 디데이가 되면 엄마는 아침 일찍 일어나 목에 수건을 두르고 허리춤에 전대를 매고서 미리 얼려둔 생수병을 꺼냈다. 화물차를 끌고 온 아저씨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심판이었다가 후방을 지키는 수비수가 되었다가, 소리치며 작전을 지시하는 감독이 되기도 하고, 급할 땐 전방의 공격수가 되어 직접 짐을 날랐다. 그날만큼은 다양한 포지션으로 활약하는 엄마였다. 처음으로 새 아파트에 입주하던 날도, 가세가 기울어 집을 팔고 세를 얻어 들어가던 날도, 고층 아파트를 떠나 5층짜리 작은 빌라로 이사 가던 날도 엄마는 같은 모습이었다. 목에 수건을 두르고 벌건 얼굴로 2L짜리 생수를 벌컥거리던.
지난 일들이 새삼 떠오른 건 나의 이삿날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1월 27일. 빌리 아일리시가 연두색 구찌 오버핏 슈트를 입고 그래미 어워즈 무대에 올라 다섯 개의 트로피를 휩쓸던 그 시각, 나는 짐 더미 사이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읍내에서 한 묶음에 3000원씩 주고 두 묶음 사 온 신문지, 인터넷으로 주문한 박스 60개를 이용해 집 안의 모든 짐을 꾸리기 시작한 지 7일째 되는 날이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신발을 신은 채로 집 안으로 침입해 후루루룩 짐을 싸고 커다란 트럭에 실어 이동해 우르르르 짐을 쏟아 대충 정리해주는, 이른바 ‘포장 이사’라는 놀라운 제도가 있는데도 우리는 이 고생을 자처했다. 지금 집과 나중 집의 잔금일이 다르다는 점, 나중 집을 보수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두 집의 거리가 353.2km라는 점 때문에 이사 비용이 짐작했던 것의 세 배에 달했다. 커다란 가전제품과 가구를 모두 두고 가는 마당에 그 비용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 선택에는 시골로 내려오면서 물건을 많이 줄였다는 자신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는 직접 짐을 싸기로 했다. 별거 있어? 박스 만들어 물건 넣고 테이프로 붙이면 그만이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용기를 얻고 싶을 때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네 글자, ‘별거 있어?’의 마법이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물건을 포장하는 건 말 그대로 별거 없다. 진짜배기 노동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감춰진 것들을 꺼내는 일에서 시작된다. 깊은 서랍과 옷장 구석, 세탁실, 보일러실, 앞 창고와 뒤 창고 같은 곳을 뒤집어엎어야 하는 것이다. 얼굴 닦는 수건이라기엔 더럽고 걸레라기엔 깨끗한 타월들, 플라스틱 반찬통, 연주된 적 없는 악기, 죽 만드는 기계를 포함한 각종 소형 가전, 낡은 키친 클로스, 여행지에서 사 모은 장식품 따위의 너절한 세간이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용하지 않지만 버릴 수도 없는 물건. 그것들이 모여 있는 공간을 편의상 ‘맨 아래 서랍’이라고 칭하겠다. 나의 ‘맨 아래 서랍’의 역사는 첫 책상을 선물 받은 10대에 시작되었다. 귀여워서 샀는데 쓸 데는 없는 수첩, 엽서, 편지지, 스티커, 책갈피, 종이접기, 고장 난 인형, 고장 난 인형의 옷, 고장 난 인형의 옷에서 떨어져 나온 구슬 장식. 그런 것들이 내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채웠다.
질문들이 불쑥불쑥 솟아 마음을 맴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왜 어떤 물건들은 저런 식으로 존재하나?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대로인가? 총량은 변함없이 양상만 조금씩 달라지는 걸까? 이곳은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진리가 구현된 현장인가? 왜 이리도 끈질기게 줄기차게 구차한가! 갈피마다 포진되어 있는 하찮은 물건들을 보며 나는 환멸을 느꼈다. 악착같이 따라붙어 추억이란 말로 나를 설득하며 산뜻한 출발을 방해하는, 만고에 쓸데없는 찌꺼기들! 남들이 포장해서 옮긴 뒤 은폐해줄 때는 잘 안 보이던 그것들을 맞닥뜨리는 건 남 앞에서 벌거 벗는 일과 비슷했다. 부끄러웠다. 어쩌면 ‘맨 아래 서랍’은 우리 모두의 집에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물타기를 시도하고 싶어진다). 그것을 직접 열어 대면하는 일 역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심상 추천은 하지 않겠)다.
버릴까 말까 고민 끝에 생존한 물건들이 퍼즐처럼 차곡차곡 담긴, 높은 밀도의 박스가 집 안 가득 쌓였다. ‘맨 아래 서랍’에서 나온 물건은 대부분 버려졌다.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 스티커를 부착할 폐기물 등으로 나뉘어 차에 실렸고, 차는 여섯 차례 쓰레기장을 오갔다. 그리고 이삿날 아침, 내려올 때 5톤이었던 이삿짐이 올라갈 땐 1톤 트럭 두 대에 모두 실렸다. 두 번째 트럭은 반도 못 채웠으니 1.3톤쯤 되려나. 얼기설기 짠 초록색 그물로 짐을 고정한 화물차가 부르릉 몸을 떨더니 먼 길을 떠났다. 떠나는 트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당에서 잠시 해바라기를 하다가 활짝 피어난 동백꽃을 발견했다. 올해 첫 꽃. 야속하게 예쁜 꽃이었다.
4년 동안의 시골 생활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 순간. 텅 빈 집을 둘러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것은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는 기분도, 꿈꾸던 일을 끝내 실패했다는 기분도 아니었다. 두꺼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는 기분이었다. 그 책의 첫 장을 펼칠 때의 마음과는 분명 달랐다. 물건을 모두 치우면 흰 도화지처럼 보이는 도심의 아파트와는 딴판으로, 우리가 짓고 칠하고 고치며 정 붙인 땅집은 텅 비어도 우리 집처럼 보였다. 우리처럼 보였다. 4년은 짧은 세월이 아니어서 암만해도 섭섭했다. 허무했다. 애증하던 이와 영영 이별하는 기분이었다. 집 안을, 쓸고 닦으며 소중히 여기던 구석구석을 눈에 담는 동안 오래전 읽은 책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청첩장을 들고 옛 남자 앞에 나타난 주인공이 자신의 결혼 소식을 듣고 격렬하게 흐느끼는 그와 함께 운다. 그리고 자신의 눈물에 관해 명쾌하게 해석한다.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
-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우리도 떠나야 했다. 살아 있다는 이유로 이삿짐에 묻어 가지 못한 일곱 개의 화분을 싣고 도시로 향하는 길.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나는 태어나 처음 보는 장소를 구경하듯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인천에서 공항 리무진으로 갈아타고 서울로 향하던 그 많은 날들처럼, 흥분과 안도와 불안과 아쉬움이 범벅된 채로 몽롱하게. 돌아간다. 점잖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커다란 빌딩으로 향하는 곳. 그 빌딩에서 있었던 일로 생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또 다른 빌딩으로 들어가 먹고 마시고 울분을 토하며 다시 힘을 얻는 곳. 안도와 편리를 얻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곳. 자동차 바퀴에 진흙 묻힐 일이 거의 없는 곳. 노인정보다 놀이터가 많은 곳. 그곳으로 간다. 다시 군민이 아닌 시민이 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