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의 AI 알렉사가 인간을 향해 말했다. 살아도 좋습니까?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인류 멸망을 앞두고 갖춰야할 최소한의 예의.


살아도 좋습니까?



나의 일상은 지구를 착취하면서 유지되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평균에서 몇 발자국 앞서가는 사람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부러움 내지는 동경을 가졌다. 내 생일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내가 7월생이니 사실은 ‘조금만 더’가 아니라 반년 정도는 앞당겨 태어났어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여덟 살이 아닌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거라며 아쉬워한 아버지의 급한 성격을 물려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0대 때는 조숙한 재능과 그에 걸맞은 행운으로 일찌감치 주목받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순간 이동하는 상상을 하며 혼자 즐거워하기도 했다. 물론 기대와 현실은 많이 달랐다. 국어 시간에 글짓기 숙제로 제출한 글이 출판계 거물의 눈에 띄는 바람에 열두 살짜리 스티븐 킹이 되는 사건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기 입학은 언감생심, 재수 끝에 대학에 입학했고 어느덧 40대를 관통하고 있지만 근미래에는 결혼을 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더 이상 웬만한 건 ‘이른’ 성취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아이템이라면? 요절 정도가 아닐까 싶다.
농담처럼 던지기는 했지만 약간의 진심도 묻어 있는 이야기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이 따르지만 않는다면 나는 이른 죽음 자체에 큰 거부감이 없다. 빨리 죽는 일보다 두려운 건 오히려 지나치게 오래 살 가능성이다.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상태로 길고 무기력한 노년을 보내게 된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몇 년 전부터 꽤 구체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런 생각을 문득 해보게 됐다.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 나는 필요한 자원일까, 아니면 처리해야 하는 부담일까? 감정을 걷어내고 이성만으로 판단할 때 과연 나는 그럭저럭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
새삼스러운 질문을 던지게 만든 계기는 우연히 읽은 해외 단신이었다. 대니 모릿이라는 한 영국 여성이 에코 스피커에 탑재된 알렉사(아마존의 AI)에 자신의 심박수가 정상인지를 문의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아마존의 인공지능 비서는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심장 박동은 인간을 살아 있게 하고 그 결과 천연자원의 급속한 고갈을 야기합니다. 지구에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대의를 위해 심장을 찔러 자살하도록 하세요.” 중국 해안에서 목격된 바다 괴물이나 러시아 상공에 출현한 UFO 등 악명 높은 특종을 여럿 남긴 타블로이드 〈더 선〉의 보도인 만큼 신빙성은 제프 베조스의 머리숱 수준으로 희박할 것이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프리퀄 같은 이 에피소드는 진위 여부를 떠나 읽는 사람을 뜨끔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알렉사의 논리는 상당히 설득력 있어서 명쾌하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의 일상은 지구를 착취하면서 유지되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단 높은 빈도로 육식을 즐기는 내 입맛부터 심판대에 올려야 한다. 고기를 얻기 위한 공장식 축산에는 대규모 화석연료가 소비되고, 일련의 과정은 각종 기후변화의 원인이 된다. 틈날 때마다 단축 번호로 치킨을 주문하는 습관은 아무래도 유죄라는 이야기다. ‘치맥’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LP 쇼핑에도 돈을 쓴다. 먼지 냄새가 섞인 음악을 들으며 해치워야 할 일들을 외면하는 저녁은 하루 중에서 특히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더 가디언〉의 기사 ‘왁스의 악몽: 바이닐의 부활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이 역시 결백하지 못한 취미다. 저널리스트 카일 디바인은 최근 몇 년 새 다시금 성장 중인 LP 산업이 수질을 심각하게 오염시키는 낡은 제작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이닐이 잔뜩 담긴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그 대신 애플 뮤직을 결제한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하며 전송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온실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거대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두 유죄, 유죄, 유죄다. 주말 내내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집에서 넷플릭스를 뒤지면서 뒹굴었을 뿐인데, 콜로세움에서 엄지손가락을 찍어 내리며 잔인하게 즐거워하던 고대 로마인이라도 된 듯한 죄책감이 든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류는 기생충처럼 지구의 수명을 갉아먹으면서 살아간다. 전 세계적인 위기의 징후들도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다. 아마 뾰족한 해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친환경 기술도 완벽하지는 않아 보인다. 일례로 풍력발전에 사용하는 날개는 허리케인에도 버틸 수 있을 만큼 내구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쓸모를 다한 뒤에도 분해나 재활용이 어렵다고 한다. 알렉사의 말이 맞다. 우리의 심장이 뛴다는 건 지구에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럼 과연 내가 세상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여는 요절인 걸까? 너무 오래 살 생각은 없지만 당장 죽고 싶지도 않으니 최대한 염치 있게 타협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일단은 방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으려는 노력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롤란트 에머리히의 2004년 작 지구온난화 재난물인 〈투모로우〉의 원제는 ‘The Day After Tomorrow’다. 제목을 ‘모레’에서 ‘내일’로 수정한 이유에 대해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 사람들은 지구가 모레쯤 멸망한다고 하면 그다지 위급하게 느끼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16년 전과 상황이 또 달라졌다. 현실의 위기감은 구체적으로 고조되고 있다. 모레도 내일도 아닌 오늘의 일이기 때문에 속 편하게 모른 척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속도를 조금 당기거나 늦추는 정도에 그칠 뿐 인류는 결국 멸망할 것이다. 나 한 명의 심장 박동을 막는다고 해도 대세는 바뀌지 않을 게 분명하다. 인간은 지구의 집주인이 아닌 세입자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주어진 환경을 충분히 누리되 멋대로 바꾸거나 망가뜨리지 않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게 건축주 혹은 다음 세입자에 대한 의무가 아닐까? 우리의 뒤를 이을 세대, 혹은 인류를 대신할 또 다른 종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것. 멸망을 앞두고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다.
인류 멸망을 앞두고 갖춰야할 최소한의 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