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확진자 동선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내가 만일 확진자가 되면 출퇴근길은 물론 단골 가게도 수천만 명에게 드러나게 된다.



나의 재구성


요란한 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긴급 재난 문자가 도착했다. 최근 몇 주 동안 이런 메시지가 대출이나 고수익 알바를 권하는 스팸 광고와 엇비슷한 빈도로 매일 수차례씩 날아든다. 이미 익숙한 일상이 된 터라 대부분의 경우에는 건성으로 훑은 뒤 무시하기 일쑤다. 하지만 이번 문자만큼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며칠 전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문자는 해당 인물의 동선이 웹에 업데이트됐다고 안내하고 있었다. 이사 후 처음으로 구청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모니터를 채우는 건 빈 화면뿐이었다. 갑자기 접속자가 몰려 일시적으로 장애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새로고침을 눌렀다. 그제야 코로나19 상황판이 눈에 들어왔다. 코인 노래방, 카페, 편의점, 분식점, 그리고 병원까지 확진자의 이동 경로가 날짜별, 시간별로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내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의 며칠이 홈페이지를 마비시킬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통째로 공개됐다는 뜻이었으니까. 지금 막, 불과 몇 분 사이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변수는 새로운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잘잘못의 여부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약간의 불운이나 부주의만으로도 사생활이 온 국민에게 공개될 수 있다. 공인도 범죄자도 아닌 보통 환자의 사생활이 공개된다. 물론 혹시라도 확진 판정을 받는다면 나 역시 방역 당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생각이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출퇴근 루트나 단골 가게를 수천만 명에게 드러내는 일이 썩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더욱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건 부득이하게 공개된 자료가 호기심 섞인 추측에 난도질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몇몇 확진자의 미심쩍은 동선은 일종의 스캔들로 소비되기도 했다. 경유지 목록과 간략한 신상 정보에서 영감을 얻은 SNS 이용자들은 이미 불륜과 음모가 난무하는 막장 주말 드라마 집필을 서너 편쯤 마친 눈치다. 이쯤에서 문득 생각해보게 된다. 누군가가 일상에 남긴 궤적도 그에 대해 일정량의 진실을 알려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전혀 모르는 어떤 이가 나의 지난 며칠을 들여다본다면? 그로부터 추측한 내용은 실제의 나와 근사치로 포개어질까? 나의 데이터를 정리해봤다.

〈 주간 보고서 〉
기간 2020년 3월 2일 월요일~3월 8일 일요일
관찰 대상 정 씨(40대 남성)
기본 정보 독신자 1인 가구, 반려동물 없음, 일과 후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고 이웃과의 교류도 드문 편
주요 이동 경로 재택근무를 병행하며 3회 사무실 출근, 귀가 중 2회 마트 경유(그중 한 번은 일회용 니트릴 장갑 구입), 가장 활발하게 오간 동선은 침실과 거실 사이, 그리고 넷플릭스와 왓챠플레이 사이
기타 특이 사항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호러나 스릴러 장르를 자주 검색(〈마인드헌터〉나 〈고양이는 건드리지 마라〉에 높은 평점 부여. 두 작품 모두 연쇄살인범을 다룬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혈흔 제거제 주문
결론 연쇄살인범이 분명함

잠깐,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내가 연쇄살인범이었던가? 당연히 미지의 바이러스도 두렵긴 하다. 그런데 솔직히 털어놓자면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공공 기관의 게시판에 업데이트되고, 원치 않는 품평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조금 더 두렵다. 누군가의 일상은 자신만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퍼즐에 가깝다. 맥락 없이 타인 앞에 단면만 떼어 던져지면 아무래도 오독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곳에 사실은 있지만 진실은 없을지도 모른다.
‘객관적’인 데이터에 근거한 분류는 종종 폭력적인 성격을 띤다. 눈에 띄는 단서만으로 재구성한 나는 연쇄살인범이 아니라면 매사에 의욕이 부족하고 사교적이지 못한 중년 남성일 것이다. 삶의 방식에 대해 스스로가 느끼는 만족감은 이러한 평가에서 딱히 정상참작이 되지 않는다. 물론 수년간 주변의 참견에 충분히 단련이 되었기 때문에 한 귀로 듣는 척하다가 고스란히 흘려버리는 스킬은 꽤 탁월한 편이다. 그럼에도 구청 홈페이지에서 내 일과를 확인한 불특정 다수가 일사분란하게 혀를 차는 소리를 감당할 자신은 없다.
만약의 가능성에 대비해 일상에 새로운 동선을 차차 추가해야 할까? 주기적으로 인스타그램 맛집에 들러서 보기 좋고 비싼 한입거리 메뉴에 돈을 쓰거나, 겨울마다 스키장에 찾아가 슬로프 꼭대기부터 지상까지 굴러서 내려오기를 반복하거나. 그러면 외계인에게 납치되거나 원인 모를 변사체로 발견되더라도 세상이 나를 조금은 덜 딱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글을 맺기 전에 혈흔 제거제를 주문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을 덧붙여야겠다. 피 외에도 음식물 등 온갖 단백질 성분의 얼룩을 지우는 데 효과적이라는 팁을 SNS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연쇄살인마가 아니라는 걸 좀 믿어주기 바란다.
내가 만일 확진자가 되면 출퇴근길은 물론 단골 가게도 수천만 명에게 드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