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을 기대하진 않지만 충실히 준비하고 실행하는 책 만드는 일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다음 책은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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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책은 고독을 찾아 떠난 독일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랑을 만난 40대 여성의 웃기고 내밀한 여행기다. 기대해도 좋다.” 교보문고 2월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빛나는 〈양준일 MAYBE_ 너와 나의 암호말〉의 언론 배포용 보도 자료는 저렇게 마무리된다. 기대해도 좋다? 아, 저 해맑은 낙관이라니.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사이에서 저 문장을 쓴 때가 올해 2월 3일,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지금과 참 많이 달랐다.
‘코로나19’라는 공식 명칭이 생기기도 전이었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가 논란거리였다. 신천지가 뭔지 알 필요도 없었다. 공중화장실에서 평생 한 번도 손에 물 묻혀본 적 없을 아저씨들이 비누에 거품을 내 꼼꼼히 손을 씻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세상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날은 대표 K 선배와 디자이너 J, 에디터 겸 마케터 D, 편집장인 나까지 총 네 명으로 이뤄진 작은 출판사 모비딕북스의 운명이 걸린 날이었다.
사무실 안의 전화는 유선이든 무선이든 하루 온종일 울렸다. 전화를 받으면 “여보세요” 대신 “바쁘시죠?”라는 말이 먼저 들려왔다. 2020년 2월 3일 오전 10시, 양준일의 첫 책이자 출판사 모비딕북스가 두 번째로 내는 단행본인 〈양준일 MAYBE_ 너와 나의 암호말〉의 예약 판매가 4대 온라인 서점(예스24, 교보문고 온라인, 알라딘, 인터파크 도서)에서 일제히 시작됐다. 각 서점 담당자들의 이야기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알라딘에선 10분 만에 1500부가, 예스24에선 3시간 만에 7000부가 팔렸다. 그날 하루 예약된 부수가 2만 부가 넘었다. 공중분해될 뻔했던 출판사가 살아났다.
잡지 기자로 15년을 살았다. 기자가 아니었다면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을 만났고, 하기 어려운 일들을 경험했다. 글은 쓰기 전엔 괴로웠지만 다 쓰고 나면 후련했다. 매번 그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물론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다. 겪고-읽고-쓰고-고치는 일 자체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지만, 그것만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잡지 기자라는 업의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회사의 요구에 따라 행사의 사회를 보고, 전시 큐레이터와 도슨트 노릇을 하고, 협찬사 물건까지 팔아봤지만 정작 내겐 돌아오는 것도, 쌓이는 것도 없었다. 한 달의 노동이 잡지라는 실물로 돌아오는 데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변화는 절실했다. 그 무렵 K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출판사를 차렸고 책을 한 권 냈다고 했다. 출판사 이름은 모비딕북스라나. 가만 있자, 물고기를 잡아서 돌아왔는데 뼈만 남은 게 〈모비딕〉이었나 〈노인과 바다〉였나….
모비딕북스의 첫 책은 박찬일 주방장이 쓴 〈오사카는 기꺼이 서서 마신다〉였다. 박찬일의 충실한 독자를 자임하던 내게도 예외적으로 흥미로운 책이었다. 오사카 골목골목에 자리한 선술집과 음식점 100여 곳을 소개했다. 기묘한 생기로 가득한 문장과 간명한 디자인 사이에 감도는 긴장이 팽팽했다. K 선배와 함께 만난 박찬일 셰프는 죄다 직접 가서 먹고 마셨다고 했다. 하루에 열 군데도 더 가봤다고 했다. “요리를 평가하려면 한두 접시 시켜선 안 되죠.” 글로 쓴 곳보다 쓰지 않은 곳이 더 많다고 했다. 밥을 벌고 짓고 먹는 게 다 슬프지만, 먹고 마시는 것만큼 즐거운 게 없다는 그였다. “그 돈을 출판사에서 다 댔어요. 무조건 잘돼야 하는 책이죠.” 옆에 앉은 K 선배의 표정이 복잡했다.
세상에 없는 책이었고, 인터넷 검색으로는 알 수 없는 정보로 가득한, 매력적인 책이었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못했다. 인터넷 서점 여행 분야 1위까지 올랐던 그 책은 얼마 후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시작되자 주문이 딱 끊겼다. 안부를 묻자 K 선배는 한번 보자고 했다. 속은 쓰리지만 어쩌겠냐고, 새로 일을 하나 맡았다고 했다. “서울에 대한 잡지를 만들 거야. 같이 할 생각 없어?” 한 공공 기관과 함께 ‘손으로 만드는 제조업에서 머리로 만드는 창작’으로 변하는 서울 산업의 오늘에 대한 잡지, 달마다 하나의 주제로 가득 채우는 단행본 같은 잡지를 만들자고 했다. 큰 조직의 일부로 작은 부분에만 관여하는 처지에, 필요한 대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시키는 일에도 이력이 난 김에 그러마 했다. 술안주 말고도 뭔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새로 모인 편집부와 함께 창간호를 완성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울의 가치를 만드는 99명의 사람들’. 박찬일 주방장이 오사카 뒷골목을 누비며 먹고 마시고 기록한 것처럼 우리 편집부는 그 99명의 서울 사람을 하나하나 다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와 서울의 지금을 기록했다. 건축가 조성룡이 강남과 잠실의 탄생을 이야기했고, 배우 예수정은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탁구장 주인 아주머니와 내기 탁구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일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극도의 투명성을 추구하는 제도는 그 자체로 불투명했다. 하나하나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 그 잡지는 우리 손을 떠났다. 1년 농사가 무참히 날아갔다.
결과적으로, 지난 두 달 동안 모비딕북스는 〈양준일 MAYBE〉로 잡지를 계속 만들었다면 공공 기관에서 받았을 예산만큼의 돈을 벌었다. 〈오사카는 기꺼이 서서 마신다〉를 제작하며 얻은 빚도 갚았다. 재미있는 건 양준일 측이 여러 출판사와 미팅을 가진 끝에 모비딕북스와 함께 책을 내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가 〈오사카는 기꺼이 서서 마신다〉의 만듦새와 제작 방식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좋고 싫은 게 분명하고, 상냥하지만 언제나 느낀 바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양준일은 언젠가 회식 자리에서 특유의 서울 사투리를 섞어 K 선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책을 만드는 데에서 모비딕북스가 마치 바보처럼 돈을 투자해서 좋아요.” K 선배의 웃는 얼굴이 또 복잡했다.
바보 같든 그렇지 않든 책에 투자할 돈이 생겼다. 이전에도 잡지와 책을 만드는 틈틈이 몇 권의 책을 기획하고 필자에게 원고도 받고 있었다. 박찬일은 일본 후쿠오카에서 여전히 먹고 마시는 한편 규슈 지방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취재했고, 독일 베를린으로 떠난 D는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온 사랑을 감동적으로 기록했다. “기대해도 좋다!” 그런데 문제는 바야흐로 세계 어느 곳으로도 떠날 수 없는 코로나19 시대가 왔다는 사실이다. 언제, 어떻게 끝날지, 대체 끝이라는 게 있는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한다. 지금 여행책을 내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이 나을 거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데는 생각이라는 과정조차 필요하지 않다.
1년 농사를 날리고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한 출판사 모비딕북스는 가까스로 기사회생했다. 출판사로선 두 번째 책, 편집장인 나로선 처음으로 만든 책이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이런 로또는 다시 안 올 거야.” K 선배는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동전을 던져 앞뒤를 예측하는 실험에서 처음 몇 번을 맞힌 참가자들은 스스로가 감이 좋다거나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몇 달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계속 바뀌었다. 그건 우리가 잘하거나 못해서가 아니었다. 잘해야 하는 건 지금부터의 일이다. 그래서 다음 책은 무얼 내야 할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계속 기획을 하고 필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어수선한 시절 소소한 삶의 윤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은 뭘까?’, ‘본격 르포르타주를 한국 독자에게 읽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을 내는 과정 자체를 콘텐츠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단행본과 잡지 사이에서 해볼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등등. 불운은 말할 것도 없고, 더 이상의 행운을 바라지 않는다. SF 작가 로버트 A 하인라인이 걸작 장편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에서 주인공 아버지의 입을 빌려 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 다만 충실히 준비하고 실행할 뿐. “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확률적인 우주에 대처하기에 적절하거나 적절하지 않은 준비가 있을 뿐이지.” 기대해도 좋다.

Who’s the writer?
정규영은 〈GQ〉 〈루엘〉 등의 피처 에디터를 거쳐 지금은 출판사 모비딕북스 편집장으로 있다.
다음 책은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