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고택 전문 건축가 김인철

고택을 거닐며.

BYESQUIRE2020.07.25
 

고택을 거닐며 

 
김인철은 ‘풍토가 건축을 결정한다’는 믿음으로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온 건축가. 한옥의 아름다움을 물었을 때 그는 꼭 한 곳, 경주의 독락당만 돌아봐도 얼추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했다. 맑은 날 그와 함께 고택을 걸었고 며칠 후 장문의 원고를 받았다.
 
내부에서 개울가로 곧장 이어지는 길을 터 내부와 외부를 명확히 구분 짓지 않은 독락당의 독특한 구조.

내부에서 개울가로 곧장 이어지는 길을 터 내부와 외부를 명확히 구분 짓지 않은 독락당의 독특한 구조.

 
독락당 내부를 거니는 김인철 건축가.

독락당 내부를 거니는 김인철 건축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의 양동마을은 전통 시대의 집성촌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울린 언덕을 오르는 길에는 관가정, 무첨당, 향단, 서백당, 수졸당 등등 보물이거나 문화재인 집이 여럿 자리해 있다. 무심히 지나치면 그저 그런 옛 고을의 풍경이겠지만, 집의 앉음새와 터의 조화를 살피고 언제 누가 어찌 지었는지 알아보는 공부를 더하다 보면 훌쩍 전통 시대로의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의 건축물은 서구의 건축물처럼 그 집을 만든 건축가의 이름을 알 수 없다. 서구와 우리의 건축물이 서로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벽을 쌓아 다양한 모양을 만드는 서구의 건축물과 달리 형식이 일정한 목조건축에는 집을 세우는 기술보다 터를 고르고 자리를 잡는 안목이 더 우선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지침인 풍수는 시(詩), 서(書), 화(畵)와 함께 선비가 갖추어야 할 교양 중 하나였다고 한다. 곧 집주인이 건축가였던 셈이다.
 
양동마을에는 자신의 집뿐만 아니라 동생의 집까지 만들고 인근의 옥산리에 또 하나의 집, 독락당을 경영했던 특별한 인물이 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1491~1553)이다. 그는 세 채의 집을 남긴 당대의 건축가였던 셈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본가인 무첨당과 아우의 집 향단은 한 사람의 작업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서로 다르다. 평범한 대지에 편하게 자리한 무첨당을 일반 해법이라 본다면, 경사지에 조여 앉은 향단은 특수한 해결이다. 그래서 후대의 건축가들은 회재 이언적의 건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하다. 건축가의 속내를 알아보려면 그의 시간이 가장 오래 머문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방법이다. 그의 공간이 시작된 옥산리의 독락당으로 가기로 한다.
 
자계천변에서 바라본 계정의 모습.

자계천변에서 바라본 계정의 모습.

 
독락당은 사랑채인 옥산정사를 지칭하기도 한다. 옥산정사 현판은 회재 이언적의 제자인 퇴계 이황이 쓴 것이다.

독락당은 사랑채인 옥산정사를 지칭하기도 한다. 옥산정사 현판은 회재 이언적의 제자인 퇴계 이황이 쓴 것이다.

양동마을에 본가를 둔 회재가 초년에는 공부를 위해, 중년에는 은거를 위해 거처했던 독락당은 그의 부친이 지은 한 채의 조촐한 초가에서 시작했다. 회재는 10세 때 부친을 여의고 외삼촌인 우재 손중돈(1463~1529)의 가르침을 받아 23세에 과거에 급제한다. 회재는 25세에 들인 둘째 부인과의 새살림을 위해 초가에 안채와 행랑을 더해 주거의 틀을 갖춘다. 관직에 나갔던 회재는 40세가 되던 해에 원칙을 고집하다 관직을 놓고 낙향한다. 한가하게 책을 읽거나 자연의 풍경 속을 거닐고 이웃의 정혜사 스님과 교분을 나누던 회재는 초가를 기와집으로 고쳐 계정이라 부르고 안채에 사랑채를 덧붙여 독락당이라 이름 짓는다. 계정의 두 칸 방은 아예 양진암이라 이름 붙여 스님이 머물 수 있게 했다. 회재는 주위의 산과 바위에도 자옥산, 관어대 등 이름을 지어 자신의 장소로 삼는다. 계정 앞을 흐르는 개울은 자계라 명명해서 홀로 즐기는 공간의 큰 그림을 완성한다.
 
그렇게 이루어진 독락당의 문간에 서면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대문으로 들어오면 행랑채에 딸린 중문이 있다. 그런데 중문 너머의 안채와 사랑채 마당은 하늘이 열린 밖이다. 그리고 자계로 이어지는 골목은 바깥 길이다. 대문을 지나고 중문을 거쳐 집 안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밖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안에서 밖으로 들어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들어간다는 것은 안으로 향하는 행위를 말한다. 안으로 들어갔지만 여전히 밖이고, 또 안으로 들어갔지만 다시 밖이 되다가 막상 방 안에 들면 되돌아 밖을 보는 과정이 우리 전통 공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독락당 내부 곳곳에서 자연을 향해 한껏 열어놓는 건축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독락당 내부 곳곳에서 자연을 향해 한껏 열어놓는 건축 철학을 엿볼 수 있다.

 
홀로 독(獨) 자에 즐길 락(樂) 자를 쓰는 독락당은 ‘어진 선비도 세속의 일을 잊고 자신의 도를 즐긴다’는 뜻을 품고 있다.

홀로 독(獨) 자에 즐길 락(樂) 자를 쓰는 독락당은 ‘어진 선비도 세속의 일을 잊고 자신의 도를 즐긴다’는 뜻을 품고 있다.

건축물의 공간은 형식상 내부와 외부로 구분된다. 바닥과 벽과 지붕이 구축되어 그로 둘러싸인 곳을 내부라 하고 그 바깥을 외부라 구별한다. 전혀 틀리지 않은 구분임에도 다시 생각해보려는 것은 건축물의 공간에 대한 관점이 내부에 편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분법적이라는 의심을 하게 되어서다. 외부는 원래 있던 것이고 내부는 만들어낸 것이므로 내부가 곧 건축물의 공간이라 규정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안과 밖의 구분으로 공간을 만들지 않았다. 우리 전통에서 ‘안으로 들어가다’의 ‘안’은 영역으로 구분되는 것이지 내부 공간을 뜻하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갔는데 밖이다’에서의 안과 밖은 이분법적인 ‘안과 밖’을 의미한다. 안과 밖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다. 내가 있는 곳이 곧 안이라 정의한다면, 공간은 구획된 물리적 내부가 아니라 더 큰 공간인 땅과 관계를 맺는 포괄적인 범위로 해석되어야 한다.
 
가운데에 마당을 둔 안채를 곁눈으로 보며 사랑채 문을 열면 독락당이 나타난다. 사랑채는 짐짓 점잖은 표정이나 대청에서 보이는 담장에 창을 내어 자계를 향한 공간의 자세를 예고한다. 그 담을 따라가면 사랑채 뒤뜰에 이어 어서각과 사당 그리고 계정이 있는 후원이 자리한다. 이곳을 독락당의 정수로 삼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건물과 담으로 반듯하게 정리된 모습을 한 후원이 특별한 이유는 계정의 존재 방식 때문이다.
 
방과 마루로 이루어진 계정은 분류하자면 ㄱ자 형태의 정자에 해당한다. 계정은 독락당의 담이 연장되는 끝자락에서 자계 쪽으로 내밀어 있어서 마당에서 보면 건물이 담의 일부인 듯 입체가 아닌 면으로 읽힌다. 그리 대수롭지 않은 처리임에도 비어 있는 마루를 통해 연결되는 자계의 풍경은 창문을 통해 보는 2차원의 풍경과 격이 다른 감동을 연출한다. 계정의 마루는 3차원의 풍경에 둘러싸인 상황이 되어 한순간에 자연의 일부가 된다. 계정의 소박한 건축 형식에 비교해 그것으로 얻어지는 공간의 확장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독락당 내부 곳곳에서 자연을 향해 한껏 열어놓는 건축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독락당 내부 곳곳에서 자연을 향해 한껏 열어놓는 건축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계정 마루에 걸터앉은 김인철 건축가.

계정 마루에 걸터앉은 김인철 건축가.

결국 우리 건축의 특징은 땅과 건물이 맺고 있는 관계로 생겨나는 공간의 자세이다. 건물은 땅의 부분일 뿐 주체가 아닌 것이다. 건축은 주어진 큰 공간인 땅에 작은 공간인 건물을 놓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우리 건축은 안과 밖을 단단하게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설정한다. 그래야 내부 공간이 되기도 하고 외부 공간이 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공간은 내부만으로는 완성되지 못한다. 그것이 관계하는 외부와 연결되어야 비로소 공간이 된다. 건물로 나누어지거나 막히게 되는 자연의 공간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려면 건축물은 두루 통해야 한다.
 
그래서 독락당은 주변과의 관계를 파악하지 않으면 공간의 구성이 무엇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독락당의 공간적 실체는 건물의 물리적 공간을 초월해 만들어진 땅의 영역성이다. 은거의 한가로움을 주변의 자연과 교류하는 것으로 채우려 했던 주인의 생각은 그가 곳곳에 붙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취한 방법이 가두어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열어서 이어지게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성리학에 정통한 회재 이언적의 글을 보면 “허(虛)하나 무(無)한 것과 허하나 유(有)한 것이 다르고, 적(寂)하나 멸(滅)한 것과 적하나 감(感)한 것이 다르다”고 그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독락당이 채우려 하고 가지려 한 것은 건물로 완결되는 자폐적인 공간이 아니라 자계를 포함하는 주위를 향해 한껏 열어서 얻는 영역의 설정이었다. 영역은 경계를 갖지 않는다. 감각의 확장으로 이루어진 한계가 있을 뿐이다.
 
은거한 지 7년 만에 복직한 회재는 경상도 관찰사였던 53세 때 양동의 본가에 무첨당을 세우고 동생의 집인 향단을 짓는다. 아마도 독락당을 경영했던 사상이 두 집을 각각의 경우에 맞추어 설계하게 했을 것이다. 평범한 땅에는 무첨당을 풀어서 세우고, 가파른 땅에는 향단을 잔뜩 조여서 지었다. 전통 건축이 단순한 형식임에도 다양한 결과를 만든 것은 땅의 조건과 집안의 내력을 반영해야 하는 건축의 본질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회재의 말년은 불운했다. 57세에 ‘양재 벽서’ 사건으로 강계에 유배된 회재는 독락당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6년 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독락당은 회재 사후에도 후손들이 채를 더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독락당은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100년이 넘는 시간을 거치며 다듬어진 공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Who’s the Writer?
김인철은 건축 사무소 아르키움 대표다. 대한민국 최초의 건축가 그룹인 4.3그룹의 일원이었으며 중앙대학교 건축학부 교수와 국가건축정책위원을 역임했다. 현재는 부산광역시 초대 총괄건축가를 맡고 있다. 서울 강남구 교보타워 사거리의 어반하이브, 서초동의 질모서리, 파주출판도시의 웅진씽크빅 사옥 등을 설계했으며 김수근 문화상, 대한민국 건축문화대상, 한국건축가협회상, 서울시 건축상, 올해의 건축가상 등 유수의 건축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