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국제갤러리 전시 디렉터가 말하는 추상미술과 작가 최욱경

최욱경과 추상미술과 나.

BYESQUIRE2020.08.13
 
 

최욱경과 추상미술과 나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PHOTOGRAPHER AN CHUNHO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PHOTOGRAPHER AN CHUNHO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국제갤러리의 2020년도 연간 전시 일정은 모두 사전에 개별 작가들과 협의해 조율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코로나19 사태로 올해 상반기에 계획했던 전시 대부분이 연기되었다. 이 와중에 올해의 첫 전시로 최욱경 작가의 전시가 열렸다. 관람객이 마스크를 쓰고 입구에서 열 체크한 후에 입장하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도 아니나 다를까, 최욱경의 작품은 주변 상황과 무관하게 작품에 내재된 고유의 힘을 발산하며 무한한 생명력으로 전시장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전시 담당자인 나부터도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추상미술도 시각예술에서 필수불가결한 선, 면, 색 등의 요소를 이용해 화면을 구성하기는 하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형상과 직접적으로 명시하는 대상, 내러티브가 등장하는 구상미술과는 대조적으로 의도적으로 형상과 내러티브를 배재하는 미술 장르라 볼 수 있다. 추상미술은 시각적 요소들에 자율성을 부여해 구상미술에서는 접할 수 없는 에너지나 리듬을 느끼도록 해준다. 그 과정에서 미국 추상표현주의에서처럼 작가의 행위가 결부되기도 하고, 미니멀리즘에서처럼 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시스템을 갖추기도 하고, 색면 회화에서처럼 색이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기도 하며, 때로는 러시아 구축주의에서처럼 화면에 기하학적 장식성이 가미되기도 한다. 구상미술에서는 작품의 구성에서 필연성이 주된 동력으로 작용한다면 추상미술에서는 우연이 기본 논리로 깔려 있다. 그리고 그 우연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공간 개념으로까지 광범위하게 작용해, 추상미술이 설정하는 공간은 더 이상 특정 시공간을 지정하지 않으며 복수의 공간 또는 시간의 파편이 공존하는 추상적 공간까지도 포용한다. 그럼으로써 그 공간에는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무한한 깊이가 생겨버린다.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최욱경 작가의 추상 회화뿐 아니라 추상 드로잉 작품을 주요하게 소개하고 있다. 전시장에서 작가의 추상 작업을 회화군과 드로잉군으로 분리해 소개하면서 회화가 아닌 드로잉을 부각시킨 것은 최욱경이라는 작가를 익히 알던 관람객에게조차 신선하게 다가갈 것이다. 전통적으로 서양미술사에서 드로잉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을 위한 도구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최욱경에게 드로잉은 단지 과정이자 표현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어쩌면 아크릴물감이나 유화물감보다도 더 손쉽게 이용할 수 있고 매체의 혼용도 용이해서 다각도로 실험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래서 시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자기 존재의 흔적을 남기기에 더 적합한 도구였으리라. 실제로 최욱경은 베트남 전쟁이나 인종차별 문제 등 1960년대 말 미국 사회에 대두된 이슈를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지만, 특히 드로잉 작품에서는 연필, 목탄, 콩테 외에도 동양화나 서예의 정서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잉크를 이용해 추상적이면서도 동시에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그만의 고유한 선과 면을 만들어냈다. 추상미술이라는 장르를 선택함으로써 획득한 폭넓은 표현의 자유를 바탕으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한 그 패기, 그리고 서정성이 깃든 추상을 통해 삶에 대한 애착과 숨 쉬는 것의 의미를 대중과 소통하고자 했던 그의 열정이 오늘날 전시장을 들어서는 관람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갤러리 전시팀에서 최욱경 외에도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유영국, 그리고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화 운동인 단색화 작가들을 담당하고 있지만, 최욱경은 개인적으로 더욱 애정을 품게 되는 작가이다. 같은 여성이고 나 역시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던 입장에서, 반세기 전에 그가 보여준 결단력과 담대함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담한 체구의 여성 작가인 그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남성 중심적이던 당시의 미술계에서 그 누구보다도 힘 있는 필체와 남다른 작품 스케일을 선보인 것만으로 당대의 미술가나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 대범함은 작품 스타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자세에도 스며들어 있었다. 물론 유복한 환경과 재능이 우선적으로 뒷받침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여 부모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열 살 때부터 운보 김기창, 우향 박래현 부부의 화실에서 미술 지도를 받았고 1959년 서울예고, 196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학과를 졸업한 직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일반인은 해외여행조차 제한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여성의 신분으로 유학을 떠나 크랜브룩 미술학교 서양학과에서 수학했다. “서울 미대를 졸업하고 나서 나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꼈다. 그 당시 내 주변의 미술적 분위기와 지도 교수들의 경향을 내가 완전히 습득해 필연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욕구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요컨대 나의 유학의 절대적 동기는 변화에 있었다”라고 작가는 회상했다.
 
국제갤러리가 최욱경 작가의 유족들과 손잡고 일하게 된 계기는, 전적으로 세월을 거슬러 올라 국제갤러리 이현숙 회장이 최욱경 작가와 쌓았던 친분에서 기인한다. 여성으로서 당대 화랑계와 미술계에서 각각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며 고유의 영역을 개척해오던 두 분이 종종 같이 술잔을 기울였다고 하니, 이현숙 회장이 최욱경 작가에게 각별한 애정이 있었을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국제갤러리는 2005년 처음으로 최욱경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이후 2016년에 유족들이 관리하던 작품들을 인계받아 〈Wook-kyung Choi: American Years 1960s - 1970s〉전을 개최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외 기관 전시와 아트 페어를 통해 최욱경 작가를 널리 알리는 일에 몰두했다. 그 결과물로, 내년에 프랑스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 센터와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순회전으로 연이어 개최할 예정인 〈Women in Abstraction〉전에 초청받아 작가의 작품 3점을 출품하게 되었다. 이 전시는 전 세계 100명이 넘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 400여 점을 조명함으로써 기존 백인 남성 중심의 미술사를 벗어나 여성 작가들이 현대미술에 기여한 바를 재평가하고, 20~21세기의 추상미술을 새롭게 기술하고자 기획한 대규모 전시이다. 국제갤러리가 약 2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재단장한 K1 전시장의 재개관을 맞이해 4년 만에 다시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 것도 이 같은 전 세계적인 미술계의 시류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이번 최욱경 개인전 출품작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For Delicate Balance – Edward Albee’s Play〉이다. 최욱경 작가가 경험한 순간이 자유분방하게 표현돼 있다. 그는 모눈종이 위에 텍스트가 인쇄된 종이를 오려 붙이기도, 직접 텍스트를 써넣기도, 콩테를 사용해 힘이 느껴지는 무한한 면을 만들기도 하면서 서로 다른 질감의 공간들을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작가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하단에 적힌 제목을 보고 나서야 최욱경 작가가 에드워드 올비라는 극작가의 연극을 보고 난 후의 감상을 그린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들여다보면 보이는 ‘Balance’를 잘못 적어 ‘V’를 ‘B’로 고친 후 ‘wrong(틀렸다)’이라 적어둔 위트, 삶과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쾌활한 면모에 웃음도 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감상일 뿐 최욱경 작품의 매력은, 추상미술의 즐거움은, 작품 ‘읽기’를 통해 작품이 대변하는 무언가를 찾으려 하던 기존의 감상 방식에서 벗어나 작품 자체가 유희의 대상이 되고 관람객은 그것을 자유로이 누려 얻는 저마다의 기쁨에 있지 않을까.
 
WHO’S THE WRITER?
최보경은 국제갤러리 전시 디렉터이다. 6월 18일부터 7월 31일까지 열린 최욱경 개인전 〈Wook-kyung Choi〉전을 담당했고, 2021년 개최 예정인 이우환, 박서보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