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정재형은 왜 '컴퍼니에 대한 감각'이 중요하다고 말하나?

정재형의 컴퍼니에 대한 감각.

BYESQUIRE2020.09.24
 
 
 
앙고라 니트 톱 이즈니스 by 십화점. 블랙 쇼츠 사스콰치 패브릭스. 블랙 레이스업 슈즈 알든. 화이트 셔츠, 안경, 삭스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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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  

1970년 출생. 1995년 베이시스로 데뷔. ‘내가 날 버린 이유’,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작별의식’ 등의 노래로 길거리를 수놓았다. 1999년 베이시스 해체 후 프랑스로 건너가 근 10년 동안 음악을 만들며 공부했다. 귀국 후 2011년 〈무한도전〉 출연을 계기로 방송인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① 베이시스

제가 딱 사춘기 때 베이시스를 길보드 차트에서 들으며 자란 세대거든요.
25년이 그런 세월인 거죠.
혹시 데뷔한 날 기억나나요?
잘 생각 안 나요. 3월 언제라고 하는데, 사실 데뷔의 정의가 뭔지 모르겠어서요. 앨범이 나온 날인지, 아니면 방송에 출연한 날인지. 하여튼 1995년 3월에 앨범이 나왔어요.
당시에 엄청나게 파격적인 포맷이었잖아요.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클래식 전공하는 사람이 학교 다니면서 대중음악을 한 적이 없었대요. 학교에서도 그때는 암묵적으로 작곡과 학생은 가요를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더라고요. 예를 들면 저희 학교 출신으로 유재하 선배가 유명했었는데, 데뷔는 졸업 후에 하셨죠. 우순실 씨는 제가 알기로는 자퇴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김형석 씨도 대놓고 하지는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복학해서 2학년 때 데뷔했다가 교수 회의가 열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데뷔하게 된 계기도 남다르잖아요.
당시엔 가요를 할 생각은 없었어요. 공부하고 영화음악가가 되고 싶었거든요. (영화음악을 하려면) 클래식은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당시에 저랑 같이 하던 김아연, 김연빈 쌍둥이 친구들이 가요제를 계속 나가서 시도하던 중이었고, 셋이 해보자고 제안을 해왔어요. 그렇게 데뷔를 했죠.
제안은 군대에 있을 때 받았죠?
쌍둥이 친구들이 계속 오디션을 본다기에 곡을 써주마 했죠. 근데 막상 곡을 써주지는 못했고, 복학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가요를 준비하면서 썼어요.
제 기억엔 그때가 싱어송라이터들의 마지막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그렇죠. 특히나 우리 세대가 좀 특별하긴 했는데. 패닉도 그렇고. 싱어송라이터들이 대우받고 데뷔하던 때였어요. 선배들 영향도 컸죠. 유재하, 김형석, 그런 분들 덕에 환경이 조성돼 있었던 것 같아요. TV에 안 나가고 음반만 내도 지속할 수 있었던, 어찌 보면 특이한 세대죠. 1995년이면 사실 MTV 등이 꽤 파워풀했을 텐데, 우리는 전혀 다른 노선으로 활동할 수 있었어요.
길보드 차트에 장르가 정말 다양했죠. 듀스, 이적, 베이시스, 알이에프, 전람회 등등이 같은 테이프에 있었으니까요.
그때는 지하철 역 안에 레코드 숍이 있었어요. 아직도 그때 LP들이 생각나요. CD만 해도 신문물이었으니까요. CD보다는 테이프가 훨씬 많이 나가던 때이기도 하죠. 레코드 숍이 지닌 색깔도 굉장히 중요했어요. 제가 다니던 곳이 있었는데 거기는 한영애 씨 같은 블루스 앨범 등을 권해주는 가게였어요.
그러고 보니 그 시대의 동아기획 등의 회사를 보면 싱어송라이터를 대접해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어요. 지금은 안테나뮤직이 거의 유일하게 그 대를 잇는 레이블인 것 같아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레이블 시니어 그룹에 있으니까요. 루시드폴, 저, 페퍼톤스 등등 다 자기 곡을 만드는 사람들이고 그걸 이유로 함께하게 된 친구들이었으니까 그렇죠.
 
 
무대를 위한 준비는 오선지에 그린 노트부터 시작한다.

무대를 위한 준비는 오선지에 그린 노트부터 시작한다.

 

② 파리와 무도

파리에서 글도 쓰고 한국에서 작품 활동도 했지만, 사실 2011년에 〈무한도전〉으로 대중 앞에 서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이 정재형을 알지 못했어요.
맞아요. 사실 공백 기간이 7~8년이 넘었고, 유학 가 있을 때는 앨범 활동을 하긴 했지만 주로 영화음악을 작업했죠.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까지 우리가 잘 모르는 파리 생활을 좀 듣고 싶어요.
지금 저도 잘 생각 안 나요.(웃음) 굉장히 어려웠어요. 저는 제가 다 벌어서 공부하러 간 경우라서요.
베이시스 3집까지 내고 번 돈을 학비로 쓴 건가요?
맞아요. 거기서 번 돈으로 거기서 1년을 버티고, 음악 해서 번 돈으로 음악 공부를 했죠. 한 번도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었어요. 영화음악을 맡으면 한국에 와서 빨리 작업하고, 또 돈 벌어서 파리로 가서 공부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는 진짜 치열하게 살았죠.
방송으로 보면서는 막연히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참 낭만적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유학하면서 배운 건 그냥 나의 중요함, 창작자로서의 나의 중요함, 내 가치의 중요함이에요. 내가 가진 걸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대해 훈련했던 시간이라 그런지 그런 게 나한테 왜 중요하고 그걸 더 지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파리에 있었기 때문에 낭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저는 사실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저의 틀을 부수기도 하고, 저의 모자람을 느낀 시간이었어요. 사람들은 단순히 음악 했으니까 영화음악도 할 수 있고, 영화음악 했으니까 클래식도 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쉬운 과정은 아니었거든요. 끊임없이 제 모자람에 부딪히는 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요. 그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저의 디테일, 그런 자극들을 좀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브라운 코트 언유즈드. 블랙 쇼츠 꼼데가르송. 블랙 하이톱 스니커즈 컨버스. 네크리스 모두 수엘. 화이트 티셔츠, 안경, 삭스, 브레이슬릿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브라운 코트 언유즈드. 블랙 쇼츠 꼼데가르송. 블랙 하이톱 스니커즈 컨버스. 네크리스 모두 수엘. 화이트 티셔츠, 안경, 삭스, 브레이슬릿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③ 컴퍼니

‘뮤지션의 일’을 생각해보면 공연 준비 과정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마어마한 시간이 들어가죠.
연습 시간만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예를 들면 저는 이번에는 공연할 때 리허설을 10번 정도 잡고 해요. 공연 전날 하는 최종까지 합하면 12번 정도 맞춰보죠. 한 번 할 때 한 네 시간씩, 어떤 날은 여섯 시간도 해요. 제가 연습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될 때까지. 완벽할 때까지요. 많은 분들이 힘들어해요. 근데 저는 포기할 수가 없어요. 나이가 들수록 더 포기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음악을 계속 듣고 연주하면서 어쩔 수 없이 더 민감해지죠.
실수를 줄이려고 연륜이 필요한 건데, 그게 그렇게 금방 되는 것도 아니고. 결국 연습밖에 없어요.연습은 한 2주 안에 몰아서 해요. 연습 기간을 길게 잡으면 집중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죠. 대신 저는 그 전에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요. 모든 곡을 편곡해야 하니까요. 오히려 사전 준비가 더 오래 걸리고, 그런 게 힘들죠. 프로모션 역시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고요. 어떻게 프로모션을 효과적으로 하느냐가 앨범을 준비하고 녹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일이잖아요.
방송인 정재형과 아티스트 정재형의 역할 사이에 갈등은 없나요?
(웃음) 이제는 아티스트로 사는 게 예전보다 더 힘들어진 세상이잖아요. 근데 즐거워요. 물론 그 안에서 힘든 일도 있긴 하지만, 예능은 내 음악을, 굉장히 오타쿠적이고 음악을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만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제 음악을 확장하는 데 도움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라도 음악을 알릴 수 있다면 다행이죠. 전 그게 대중음악가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클래식 연주가들이 콩쿠르에 나가는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들었어요.
콩쿠르에 나가는 이유는 이름을 알리고 연주 기회를 많이 얻는 거거든요. 연주 기회가 없으면 나를 알릴 기회가 없어요. 접근이 다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대중음악가인 거죠. 예전처럼 가만히 앉아서 ‘알아서 저를 찾아주세요’라는 태도는 사실 되게 거만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요. 클래식, 대중음악을 떠나서 다 그런 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아요. 공연을 한 달에 두 번 이상 하면 거의 땅바닥에 가닿을 만큼 피폐해져요. 제 곡을 쓰고 제가 직접 편곡하고 그걸 알리는 역할까지 해야 하는 사람이라서요. 클래식하는 사람들도 연주 여행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1년 내내 외국에서, 내 집이 아닌 곳에서 투어를 다니는 거예요. 근데 그게 좋은 말로 월드 투어지, 그게 업인 거죠.
3등 칸 기차에서 바이올린을 끌어 안고 선잠 자며 다니는 연주가들 많죠.
클래식뿐만 아니라 사실 가요계도 그 안에서 일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본다면, 그 어느 누구도 쉽다고 생각할 수 없을 거예요. 음악이 예전처럼 명성에 기대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음악을 내가 알려야 된다는 마음이 없으면 매일 위기거든요. 음반을 만들고 나서 늘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일들을 또 이겨나가기 위해서 한 단계를 더 밟아야 해요. 작년에 제 앨범이 나왔을 때 그 앨범은 클래식인지 가요인지 분류도 안 돼 있었어요. 그냥 앨범이에요. 연주곡에도 뉴에이지다 뭐다 카테고리가 너무 중요한데. (저는) 카테고리가 없는 사람이에요.(웃음) 9년 동안 공연을 안 했으니까 정말 많은 분이 오시겠구나 했는데 첫날 딱 공연 티켓을 열었는데 매진이 안 됐어요. 그때 정말 충격을 받았죠. 하루를 그냥 멍하니 있었던 것 같아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공연을 이렇게나 오랫동안 안 했고, 내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그때 초등학생이었다면 이미 취업을 앞둔 사람이 되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걸 깨닫고는 다음 날 부랴부랴 A&R이랑 통화해서 방송도 하고, 예능도 하고, 라디오도 더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결국 그 공연을 첫날 본 사람들이 다음 날 다시 찾아주면서 전체 매진이 되긴 했어요. 그런 일이 내가 음악을 20년 넘게 했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매번 위기의 연속이더라고요. 가끔 내 음악이 경계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클래식도 아니고 가요도 아니고. 그럼 그냥 연예인이야? 아니야. 방송인이야? 아니야. 나를 어느 카테고리 안에 두자면 뭔가 되게 애매한 상황인 거죠. 이걸 어떻게 카테고리화하지? 이게 없어요, 다들. 저는 그런 사람이니까 계속 새로운 걸 시도할 거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거죠. 그러자면 위기가 왔을 때 놀고 있을 수는 없죠. 모든 사무실 식구가 나만 보고 있는데 제가 그럴 수는 없잖아요. 빨리 손을 써서 이 앨범을 통해 사무실도, 나도 수익이 나는 형태를 만들어야 하는데,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나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게 제 책임이라고 여겨요.
‘정재형 컴퍼니’라는 회사의 대표 같은 느낌도 들겠어요.
되게 중요해요. 그게 너무 중요하더라고요. 어렸을 땐 몰랐는데. 자력으로 음반을 만들어내는 것이요. 저와 사무실이 계속 수익을 내야 계속 앨범을 내죠. 그게 대중음악가예요. 음악을 쉰 살에도 멋있게 하고 일흔 살에도 멋있게 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어떻게 내 음악을 알릴 것인가, 또 어떻게 음악으로 나를 알릴 것인가, 그 둘 사이에서 객관적 태도를 갖는 게 중요해요.
 
 
*인터뷰 풀버전은 에스콰이어 10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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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박세회
  • PHOTOGRAPHER 안상미
  • STYLIST 강효석
  • HAIR 곽대혁
  • MAKEUP 김수빈
  • ASSISTANT 윤승현
  • DIGITAL DESIGNER 이효진